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54)
154화. 엘릴 왕국 (2)
흥분과 소란, 어둠, 등불의 불빛이 어지럽게 일그러진 거리에서 저 너머의 색채를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심한 수를 쓸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귀나 눈에 색채를 쑤셔 넣고 잠깐 흔들어 줄 뿐.
팔다리가 부러지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당분간 밤에 잠을 못 잘지도 모르지만.
그때였다. 팔짱 끼고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던 율리히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이작, 잔재주는 부리지 마라.”
‘뭐?’
아이작은 소란 속에서 또렷이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율리히는 여전히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이작은 그녀가 설마 저 너머의 색채를 알아차렸나 싶어서 일단 회수했다.
아이작은 율리히가 자신의 실력을 가늠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싸움판이 그녀가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좋아! 이번에는 나다!”
아이작이 이미 두 명의 기사를 쓰러뜨린 뒤 호기롭게 손가락을 꺾으며 나타난 것은 한 여기사였다.
녹색 망토에는 멧돼지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현 엘릴 왕국 국왕, 알데온의 표식이었다.
‘알데온 기사단…… 왕실이 운영하는 기사단이군.’
제국에서 온 사절한테는 마중도 안 나왔으면서 길거리 싸움에는 끼어드는 꼴을 보니 이 나라 수준도 알만하다 싶었다. 하지만 내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정잡배가 아닌, 진짜 제대로 된 기사의 수준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어이없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칼을 든 채 마주 섰다. 지금까지는 루앗딘 열쇠의 불길을 피워 올릴 필요도 없었다.
“덤벼라, 건방진 이방인! 곱상한 얼굴에 멋쟁이 흉터를 만들어주마!”
여기사는 동료들의 호응 속에 씩 웃으며 곧바로 칼을 휘둘렀다. 아이작은 눈에 보일 만큼 느린 데다 살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검을 보면서 약간의 실망감을 느꼈다. 그러나 검날이 맞닿은 순간 손목이 꺾일 뻔했다.
‘무슨 힘이?’
도저히 저 체구에서 나올 수 없는 미친 완력이었다. 아이작은 급히 손목을 틀어 검을 흘려보내는 동시에 어깨로 부딪쳤다.
여기사는 아이작이 첫 일격을 받아 냈다는 사실에 놀란 듯했다. 그녀의 다음 동작은 놀라울 만큼 빈틈투성이였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알데온 기사의 검술이 어떤 형태인지 깨달았다.
‘첫 일격에 몸통을 양단한다는 기세로 휘두르고, 그다음은 그 뒤에 생각한다 이건가? 미친 발상이지만 의외로 쓸만할지도 모르겠군.’
수준 있는 검사들끼리의 싸움은 시작 전부터 어느 정도 합을 가늠한다. 수준이 비슷하다면 무조건 선공하는 사람이 불리하다. 더군다나 첫 동작부터 크게 휘두르는 내려치기를 하면 당연히 승기는 그 뒤에 공격하는 사람 쪽으로 기울어진다.
빗겨 내든 받아 내든, 그다음 수를 자기 마음대로 고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이작도 기사의 검을 받아낸 다음, 역으로 찔러 제압하려 했다.
하지만 알데온 기사는 그걸 역으로 이용했다.
칼과 손목, 그리고 머리까지도 부러뜨릴 수 있는 엄청난 첫 일격으로 ‘빗겨 내거나 받아 낸다’라는 선택지를 없애 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가까스로 검을 흘려보내는 데 성공했다.
‘진짜 머리가 쪼개졌으면 어쩌려고…… 아니, 그런 것치고는 살기도 없었어.’
아이작이 움직이지 않자 여기사는 급히 거리를 벌렸다. 동료들의 야유 속에서 여기사는 얼굴이 시뻘게졌지만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여유 있는 표정이 아니라 제법 진지한 모습이었다.
“다시 한번 받아봐라, 미남!”
여기사는 이번에도 똑같이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이번에는 아이작도 아래서 위로 힘껏 올려 쳤다. 완력 대결이라도 하겠다는 듯한 모습에 기사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 경우 내려치는 쪽이 당연히 더 유리하다.
까가가가가각! 검이 부딪친 순간 아이작은 아까보다 훨씬 더 강한 압력을 느꼈다. 저 체구에서선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힘이었다.
전신에 기적으로 무장한 아이작조차도 무릎이 꺾일 듯한 힘이었다.
‘상급 검술이군.’
알데온 기사단의 상급 검술은 단순해 보였다. 더 강한 힘, 더 강한 무게.
하지만 단순함이야말로 군대가 추구해야 할 미학이다.
아이작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과 정반대되는 검술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배울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가 이 멧돼지 같은 돌격을 정면에서 받아 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아이작은 당연히 검을 미끄러뜨렸다. 여기사도 이 대응을 예상했다는 듯 검을 바닥에 찍으며 곧바로 어깨로 아이작을 들이받으려 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문제는, 그녀의 검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마치 빨판에 붙은 듯, 혹은 무언가 검을 물고 놔주지 않는 것처럼 검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사는 불현듯 아이작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 잔잔한 눈동자에서 마치 휘감기는 듯한 섬뜩한 기세를 느꼈다.
‘잡아먹힌…….’
그 순간 아이작의 주먹이 그녀의 턱을 후려갈겼다. 어중간하게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 턱을 후려갈기자 여기사는 휘청거렸다. 눈이 휘꺼덕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아이작은 그녀가 당연히 쓰러질 줄 알았지만, 여기사는 그대로 기합을 내지르며 바닥을 쿵 찍었다.
“흐아아아!”
여기사는 핏줄이 번들번들하게 선 눈으로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아이작은 기가 막혔다.
‘힘만큼이나 맷집도…… 미쳤군. 진짜 멧돼지인가?’
아이작은 분명 여기사가 기절하는 것을 봤다. 하지만 방금 여기사는 그저 근성으로 기합을 내지르고는 기절에서 깨어난 것이다. 저게 기합으로 가능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엘릴 기사의 평균 수준은 아니겠지 싶었다.
그리고 처음 엘릴 왕국에 실망했던 것과 반대로, 의외로 진짜 기사 같은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는 쓰러지지 않는다!”
여기사는 이를 악물고 양손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았지만 하나하나에 폭풍 같은 기세가 서려 있었다. 아이작은 저 칼질 한 번에 나무도 부러뜨리는 트롤 같은 힘이 실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쓰러지지 않는 한 정의는 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작은 또 이 무식한 트롤과 같은 합을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아이작의 몸이 회전하면서 기묘한 곡선을 그렸다.
여기사는 자신의 몸이 불가사의한 압력에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수렁에 빠져드는 듯한 섬찟한 인력에 어떻게든 버티고 서려 애썼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미 아이작은 그녀의 코앞에 있었다.
심연이 아가리를 벌리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여기사가 마지막으로 발악 같은 검을 휘둘렀다. 아이작은 그대로 검을 맞부딪쳤다.
쩌억. 아이작의 검에서 피어오른 검기, 톱날 찢기가 그녀의 검을 순식간에 씹어 삼키며 부러뜨렸다. 단숨에 박살 난 칼을 본 여기사는 멍한 얼굴로 비산하는 쇳조각들을 보았다.
그 안에서 아이작의 주먹이 튀어나와 그녀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쾅. 이번에는 여기사의 몸이 붕 떠올라, 그대로 뒤통수를 지면에 처박고 말았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여기사가 몸을 쭉 폈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순간 거리에 정적이 번졌다.
‘너무 심했나?’
하지만 이미 기절한 상태였으니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이 정도는 버티고도 남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기사들의 정적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와! 와아! 레이나가 쓰러졌다! 레이나 힐드가!”
“이게 얼마 만이지? 거의 1년만 아냐?”
“아니, 젠장. 왜 하필 내가 돈을 걸었을 때!”
환호와 절규가 터져 나오는 소란 속에서 아이작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더 이상 덤빌 사람은 없어 보였다. 아니, 모르는 일이다. 이 동네는 정상인을 찾기 힘든 것 같았으니까.
그때 지금까지 싸움을 지켜보기만 했던 율리히가 다가왔다. 아이작은 그녀가 자신의 수준을 가늠해 보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내심 반응을 기대했다.
“형편없군. 하지만 조금만 손보면 쓸 만해질 것 같다.”
아이작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래 최고로 박한 평가였다.
율리히는 휘적휘적 걸어가더니 아이작 반대편에 섰다. 그녀의 손에는 아까 대머리가 기절하고 남긴 저질의 검이 쥐어져 있었다.
“살짝만 손보자, 아이작.”
***
군중들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도전자에 환호했다.
그 도전자는 방금 쓰러진 레니아라는 기사보다 작고 땅딸막한 체구에 제대로 된 갑옷도 걸치지 않았다. 게다가 어딘가 항구의 진창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비린내가 났다.
하지만 검을 든 자세는 제대로 잡혀 있었다.
아이작은 주변을 둘러보고 말했다.
“여기서요?”
“안 될 이유가 없지?”
“실수로 여기 있는 사람들을 다 죽여버리면 어쩌시려고?”
비아냥대는 투였지만 과연 그녀가 알아들었을지는 의문이었다.
“물론 내가 진짜 실력을 발휘하면 이 세상이 멸망하겠지.”
“점점 스케일이 커지는군요.”
“하지만 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니 거기에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자.”
율리히는 신호도 없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아이작이 보고 대응하지 못할 속도는 아니었다. 정확히 예상했던 장소에서 검이 맞물렸다.
하지만 아이작은 어딘가 율리히가 자신의 움직임에 맞춰서 칼을 꽂아 줬다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의미로.
그리고 진짜 결투가 시작되었다.
순간 율리히의 검이 빠르게 갈라지며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기겁하며 빠르게 검을 쳐냈다. 하지만 팔이 네 개라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상급 검술? 아니야, 이건…….’
그냥 찌르기 동작을 빠르고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이었다.
율리히가 든 검은 뱃사람들이 자주 드는 시미터로, 이런 빠른 찌르기 동작을 수행하기에 적당한 물건은 아니었다. 원래 율리히가 쓰는 검술도 아니고, 그녀의 무기도 아니었다. 그저 굴러다니는 것을 적당히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움직임은 잔상이 보일 정도로 빨랐다.
그것도 아이작이 아슬아슬하게 쳐 낼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율리히는 호흡이 가빠지거나 균형이 흐트러지는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더 빠르게 할 수도 있는 건가?’
아이작은 소름이 오싹 돋았다.
상대를 압도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상대와 정확히 수준을 맞춰주는 것이다.
율리히는 아이작을 완전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슐과는 비교하기도 힘든 수준이었다.
“방어만 할 거냐, 아이작?”
퉁. 아이작은 약간의 부상을 각오하면서 검을 휘둘렀다.
이삭 검술: 익사자의 손.
그가 새로운 상급 검술을 고안하면서 만들어 낸 동작이었다. 익사자 왕이 촉수를 휘둘러 감아 당기던 모습에 착안했다. 주로 도망치는 적을 붙잡거나 간격을 좁히기 위한 상황을 가정했지만, 이 빠르면서도 얄팍한 찌르기 동작을 묶기에도 유효했다.
쫘아아악. 마치 공기를 잡아 뜯는 듯한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때까지 시험삼아 펼칠 때에는 한 번도 나지 않았던 소리였다. 율리히의 검이 아이작의 검을 따라 궤도가 일그러졌다.
그러나 율리히의 눈빛에는 변화가 없었다.
율리히는 가볍게 칼을 횡으로 휘둘렀다. 엄청난 완력이 익사자의 손을 박살 내면서 빠져나왔다. 아이작은 나름 자신을 가진 상급 검술이 어이없게 깨진 상황에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이 개떡 같은 건 왜 하는 거냐?”
아이작은 뭐라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바슐과의 대련과 거기서 ‘살기가 너무 넘친다’는 지적을 받았던 것을 고치기 위해 시도해 본 기술이라는 것을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싸움이 너무 가빴다.
“살기를 억누르려고? 그걸 상급 검술로 해결하려고 해? 한심한 시도군.”
그러나 율리히는 가볍게 검을 몇 번 나누는 것만으로도 아이작의 의도와 생각을 읽어 냈다.
그녀는 코웃음 치며 말을 이어갔다.
“재능이 넘치는 것도 저주구나. 조금만 더 못난 놈이었으면 약간 돌아가더라도 제대로 된 길을 찾았을 텐데, 머리가 좋으니 잔재주를 찾는군.”
상급 검술을 고작 잔재주라고 부르는 건가?
아이작은 욱하는 마음이 올라왔지만, 동시에 율리히의 제대로 된 실력을 보고 싶다는 충동도 올라왔다.
“단점을 없애려고 노력할 시간에 잘하는 걸 더 잘하려고 노력해라.”
쩍, 쩌억. 율리히와 검이 부딪칠 때마다 쇳조각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작의 검은 어쨌든 성물인 루앗딘 열쇠다. 반면 율리히의 검은 녹슨 시미터다.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그녀의 검 다루는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 주었지만, 이가 나가고 휘어 가는 것은 율리히의 검이었다.
“살기가 읽혀서 검로가 빤히 보이는 것이 문제라면, 세상을 덮을 정도의 살기로 상대의 눈을 가려야지.”
그녀의 도발에 아이작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한번 받아 봐라.
아이작은 이를 악물고 율리히를 향해 이삭 검술: 여덟 갈래를 사용했다. 상대가 막을 수 있는가 없는가는 고려하지 않았다. 자신을 압도하는 이 존재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일격이 실패하면 그다음은 없다는 듯이 칼을 휘두르던 알데온 기사처럼.
아이작의 검에 무심코 검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광장의 돌바닥을 맹렬하게 박살 내는 궤적들이 무방비한 율리히의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순간, 아이작은 기묘한 환상을 보았다.
자신이 휘두르는 검의 궤적이 그대로 보랏빛 촉수의 형상을 하고 상대에게 날아드는 모습이었다.
아이작은 그 순간 이름 없는 혼돈의 형상이 되어있었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촉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