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55)
155화. 엘릴 왕국 (3)
콰드드드드드!
광장을 들어 엎는 듯한 파괴적인 기세의 검격이 율리히를 향해 날아들었다.
공격이 아니라 철거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참혹한 파괴 속에서, 율리히가 검을 조용히 내리그었다. 이내 촉수가 율리히를 난타했다.
굉음이 울려 퍼졌다.
후두두둑…… 돌과 먼지가 비산하면서 떨어지는 소리가 폭우처럼 울려 퍼졌다.
간신히 숨을 내뱉을 수 있게 된 아이작은 오랜만에 느끼는 개운한 피로감으로 휘청거렸다. 약간의 공복감도 느껴졌다. 여덟 갈래로 찢어발긴 광장의 돌바닥에 맹렬한 흉터가 남아 있었다. 무심결에 촉수를 꺼낸 건 아닌가 생각했는데 정말 환각이었던 것 같았다.
‘……어떻게 한 건지도 모르겠군.’
파괴력이 이전에 비해 배는 강해진 상태였다. 바슐과 수련을 할 때에도 여덟 갈래를 몇 번 사용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파괴적인 궤적 한가운데, 정확히 중심부만을 빗겨 나간 자리에 율리히가 서 있었다.
그녀는 뒤집어쓴 먼지 외에는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끔 떨어지는 돌조각들이 그녀의 머리를 때릴 때마다 까닥까닥 흔들릴 뿐이었다.
‘내 칼보다 돌멩이에 더 많이 맞은 거 같군.’
율리히는 완전히 망가진 검을 바닥에 버렸다.
결투는 끝났다. 예상치도 못한 무시무시한 싸움에 광장의 사람들은 전부 침묵에 빠졌다. 이쯤 되자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싸움꾼들은 썰물처럼 빠졌다.
기사들도 아이작이 그저 특이한 이방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 뭔가를 쑥덕대다가 사라졌다.
율리히는 아이작 곁으로 터벅터벅 다가왔다.
“아슬아슬하게 내 제자들을 따라잡을 정도는 되는 것 같군.”
율리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이 보였다.
순간 아이작은 율리히의 정체를 직감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완전히 깨닫기도 전에, 아이작은 몰려드는 피곤으로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
아이작은 꿈을 꾸고 있었다.
다만 평소 종종 꾸는 그런 악몽은 아니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그저 눈을 감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주변과의 감각이 모두 차단될 정도로 강렬하게 몰입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종의 자각몽을 꾸는 것에 가까웠다.
그 안에서 아이작은 자신이 이때까지 싸웠던 모든 싸움을 돌이켜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촉수를 이용해 쥐를 잡던 순간부터, 지힐렛, 헤인켈, 골루와루, 헤사벨, 붉은 살점의 선지자, 알 두아자드, 익사자 왕, 바슐…… 그리고 율리히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투쟁이 아이작의 머릿속에 쉼 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이 반복한 싸움은 율리히와의 결투였다.
그 순간 아이작은 분명히 어떤 경지에 다다랐다. 알 두아자드의 싸움이나 바슐과의 대련 때 언뜻 엿볼 수 있었던 경지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위해 이렇게 싸움을 되짚고 자신의 것으로 삼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었을 때, 누군가 나타났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 칼센 밀터였다.
“명상하는 것치곤 깊게도 들어왔군.”
“아직도 성불을 못 했나?”
“원한이 많아서 못 하겠군. 여기 있으니 심심해 죽겠다. 어디 쓸모 있는 놈 좀 먹어봐라.”
그러나 문득 칼센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눈빛에 흥미를 가득 띄운 채 아이작을 훑어보았다.
“제법…… 벼려졌군. 쓸 만해졌어. 하지만 아직 다듬고 있는 모양이지?”
아이작은 대답 대신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칼센 밀터 앞에 자기 자신의 아바타가 마치 게임 캐릭터처럼 나타났다. 자기 자신을 3인칭 시점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기묘했지만, 객관적으로 보기 좋았다.
칼센은 미소 지으면서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칼센은 잡아먹히면서 갑옷도 빼앗긴 주제에 제대로 무장도 다 갖추고 있었다.
칼센은 빛의 법전 교단에서 성기사 중 최강으로 꼽혔다.
그렇다면 그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물론 자신이 알던 그대로라면 당장 지금은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아이작은 자신의 수준을 가늠해 보는 것에 더 집중했다.
아이작의 칼이 칼센과 맞닿기 시작했다.
싸움을 지켜보면서 아이작은 바슐과 율리히가 지적하던 이야기가 뭔지 알 수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사악해 보이는군.’
상상 속의 자신은 실력을 숨기거나 능력을 자제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거기다 흉흉하게 들러붙는 살기는 몸에 쩍쩍 달라붙는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어리숙한 상대라면 이 기세만으로도 질릴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은 칼센이었다. 그는 전혀 주눅 드는 기색 없이 아이작의 분신의 목을 베고, 몸통을 양단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조금씩 자신의 동작에 새로 얻은 가르침을 융합시키며 깨우치기 시작했다.
지적해 준 바슐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이작은 더 이상 단점─과도한 살기─을 고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단점을 없애려고 노력할 시간에 잘하는 걸 더 잘하려고 노력해라.’
율리히는 그 깨달음을 주기 위해 아이작의 검로를 틀고 막아 내며 정정해 준 것이다.
사실 단 한 번의 대련이 엄청난 가르침을 준 것은 아니었다.
이미 아이작의 실력은 가득 찬 둑처럼 아슬아슬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율리히는 그 둑을 터 준 것이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방식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그가 검술의 형태로 구현하는 이름 없는 혼돈의 본질은 절제하고 다스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상대방을 압도하는 살의와 포식이 그 핵심이었다.
그는 온갖 이유로 힘과 살기를 절제해야 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아이작은 이 흉폭성을 버릴 수도, 굳이 포기할 이유도 없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자신 안의 짐승을 통제하는 것.
아이작은 이 짐승이 다른 무엇보다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 다만 전제조건은 있었다. 자기 자신이 거기에 잡아먹히지 않아야 했다.
아이작은 짐승이 아니라 적을 지정했을 때 폭발적으로 터뜨릴 수 있는 군견을 원했다.
아이작이 혼돈에 질서라는 목줄을 채우자, 그가 이때까지 배웠던 모든 동작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게벨에게 배웠던 동작과 실전을 통해 익혔던 검술들, 심지어 숨을 쉬는 방법과 심장이 박동하는 템포까지. 그 모든 것이 새로운 경지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아이작의 검로가 점차 변화함에 따라 칼센의 동작도 점점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이건…….”
순간 아이작의 검이 시커먼 연기를 뿜어냈다.
먹물 같은 어둠이 단숨에 칼센을 집어삼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칼센의 머리 위로 강렬한 후광이 나타났다. 파수자의 등대였다.
명징한 빛과 질서의 상징이, 일그러진 검과 격돌했다.
잠시 뒤 어둠이 흐트러졌다.
아이작의 심장에는 칼센의 칼이 꽂혀 있었다.
대신, 칼센의 목은 아이작의 칼에 반쯤 베인 상태였다.
아이작의 형상은 흐트러지듯이 사라졌다. 아이작의 칼이 사라지자, 칼센의 상처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칼센은 상처 입은 것이 언짢아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어딘가 뿌듯해 보이기도 했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객사할 일은 없겠다.”
자신을 잡아먹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칭찬 중 가장 호의적인 칭찬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자신이 칼센을 이겼다거나 대등한 승부를 겨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자신의 상상에 불과하다. 상상 속에서 자신은 최적의 신체와 이상적인 검술, 최상의 환경에서 싸웠다. 실전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고, 칼센의 실력 또한 저게 전부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실력이 다음 단계로 넘어선 것은 분명했다.
칼센의 말마따나, 어디 가서 갑자기 객사할 일은 없을 정도로.
깨달음이 오자마자 아이작의 의식이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의식을 집중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희미해지는 시야 앞에, 칼센이 아이작을 향해 말했다.
다시 혼자 남겨지는 그의 미소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을 너무 믿지 마라.”
***
아이작은 눈을 떴다. 낯선 천장…… 대신 천장에 매달려 있는 헤사벨이 보였다.
그녀는 아이작이 눈을 뜨자마자 와락 뛰어내려 올라탔다.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아이작 님! 하도 깊게 잠드셔서 죽은 줄 알았어요!”
“어, 그래. 화물칸 하역이 끝난 모양이군?”
아이작은 원래 헤사벨을 데려오지 않으려고 했다.
엘릴 왕국과 왈라이카 왕국은 동쪽 끝과 서쪽 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멀었지만, 그 역사적인 인연 덕분에 마주치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할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다.
헤사벨이 이미 배교했으며 자신의 권속이라 해도 엘릴의 신도들이 과연 납득해 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아이작은 헤사벨을 데려왔다.
분열 예식을 반납할 때 의식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든 저렇든 분열 예식은 무희가 직접 손에 들고 사용한 물건이니, 붉은 성배 클럽의 의식에 정통한 사람이 필요했다. 아이작 곁에는 헤사벨 이상의 인재가 없었다.
하지만 완전한 내륙 사람인 헤사벨은 배를 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 데다…… 대단히 뱃멀미가 심했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선택한 방법이 관짝에 포장재와 함께 실은 다음 기절시키는 것이었다.
‘뱀파이어는 바다를 건너지 못한다는 전설은 이것 때문이었을지도.’
“그나저나 나를 이 정도로 걱정해줄 줄은 몰랐는데.”
“제 목숨까지 포함해 전 재산을 아이작 님의 승리에 베팅했는데 여기서 죽어버리시면 전부 나락 가는 거잖아요. 아이작 목숨이 아니라 제 목숨이다 생각하고 좀 더 명줄을 아껴주세요.”
‘비유하는 꼴을 보아하니 나 아니었으면 이미 어딘가에 전 재산을 꼴아박고 거렁뱅이가 되었을 것 같군.’
굴마르 공작가의 미래를 구원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어두워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아이작은 헤사벨을 대충 털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자리에는 당연하다는 듯 율리히가 옆으로 누운 채 어제 먹었던 감자튀김을 먹고 있었다.
“그 메뉴가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아직 이 세계도 존속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지.”
그 정도인가? 어제 먹었을 때는 그냥 평범한 감자튀김이었는데.
아이작은 뭔가 다른가 하며 하나 집어 보려다가 율리히에게 손등을 맞고 뒤로 뺐다. 그녀는 아이작의 기세가 뭔가 남달라진 것을 느낀 듯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드디어 벽을 뚫은 모양이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작은 율리히가 자신을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아이작 스스로 뚫었어야 하는 벽이다. 하지만 율리히와의 대련은 대놓고 등대의 불빛을 밝혀 준 수준이었다.
“자만할 거 없다. 옛날에는 말이다, 내가 가르치던 놈들은 다 그 정도는 기본이었다. 하지만 요즘 것들은 영 매가리가 없어. 누가 봐도 수준 미달인 놈을 성기사를 시켜주질 않나, 수도원에서 고양이를 키우질 않나…….”
율리히는 중얼중얼 투덜거렸다. 아이작은 여전히 고양이가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율리히의 말로 그녀의 정체를 확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도 오월의 검의 가르침을 직접 받는다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직접 왕림해주신 것만으로도 제게는 크나큰 영광입니다.”
파삭. 감자튀김이 부서지는 소리가 건조하게 울려 퍼졌다. 헤사벨은 오월의 검이라는 말에 일순간 고장 나 있다가 물벼락 맞은 고양이처럼 천장으로 튕겨 올라갔다.
천장에 머리를 박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율리히는 무감정한 눈동자로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닌데?”
“……아닙니까?”
“아니야.”
오월의 검.
모든 성기사의 스승, 최초의 성기사. 성 아르테의 본명은 율리히 아르테다.
뒤늦게 떠올린 설정이긴 하지만 아이작은 솔직히 정체를 숨길 생각이었다면 좀 더 공들여 숨겨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 숨길 의지가 없는 거 아냐?’
아이작은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애써 참았다.
“그렇군요. 그래도 역시 모든 성기사단 검술의 모태가 되신 분을 떠올릴 만큼 훌륭하셨습니다.”
어쨌든 율리히는 자신이 오월의 검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천사가 왜 정체도 숨기고, 네필림에 이교도이기까지 한 자신의 검을 손봐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율리히에게 적당히 감사하는 동시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가 깨어나기 전 칼센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오월의 검을 너무 믿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