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57)
157화. 이상한 나라의 성배기사 (2)
에델레드 알데온.
현재 엘릴 왕국 수도인 알데온을 근거지로 삼은 가문의 가주이자 왕이다. 전대의 왕은 폭군으로도 유명했는데, 과도한 음주와 폭식으로 인한 고혈압으로 죽었다. 비극적이지만 엘릴 왕국에서 칼 맞아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장수했다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에델레드는 거기서 교훈을 얻었는지 술은커녕 고기도 입에 대지 않는 채식주의자였다. 하지만 이 명예로운 기사의 성지에서 굉장히 희귀한 특징이 하나 있다면…… 바로 그가 기사들을 지독하게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엘릴 신앙에 대한 신앙심이 부족한 건 아니야. 그냥 정의, 용기, 명예만을 부르짖는 마초들을 혐오하는 거지.’
아이작은 에델레드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어쨌든 부친이 급사하는 바람에 이른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에델레드는 나쁘지 않은 왕이었다. 특히 아이작이 느끼기에는 더더욱 그랬다.
에델레드는 초조하게 손톱을 딱딱 깨물다가 물었다.
“발트제메르 황제로부터 전언이 있을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소. 혹시 가져온 서신이 있소?”
아이작은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황제의 인장으로 봉인된 편지였다.
뜯을 수도, 뜯어볼 생각도 없었지만 아이작은 대충 내용을 알고 있었다. 엘릴 왕국이 여명군에 참전하길 바란다는 것과 아이작을 전권대사로 임명한다…… 뭐 그런 내용이었으니까.
길지 않은 편지인 만큼 남몰래 다른 정보를 전달하기도 어려웠다.
에델레드는 편지를 금방 읽고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초조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듯 걷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발트제메르 황제께서는 결국 여명군에 참전하기로 마음을 돌리신 모양이군? 아직 제국 상황도 충분히 안정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이번 여명군 원정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 듯합니다. 아니, 오히려 이번 여명군 원정을 통해 교단으로부터 주도권을 빼앗아 오실 심산이 아니실지.”
아이작의 말에 에델레드는 약간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교단과 왕정이 일체화된 엘릴과 달리, 게르토니아 제국은 빛의 법전과 서로 견제하고 있다는 것을 에델레드조차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빛의 법전 소속으로 알려진 성배기사가 황제를 편드는 듯한 말을 하니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애당초 황제파가 아니었다면 사절을 맡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에델레드는 편지의 내용을 신뢰하며 아이작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하긴, 성체이신 몸이니 교단으로부터 주도권을 가져오는 것도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대도 봤다시피 우리 왕국에는 문제가 많소.”
아이작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릴 왕국은 게르토니아 제국보다도 중앙집권화가 안 되어있다. 자잘한 반군은 말할 것도 없고, 크게는 네 개의 세력이 엘릴 왕국을 갈라 먹고 있었다. 에델레드가 여명군 참전을 하고 싶어도 불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에델레드가 너무 어리다는 점이다.
“제일 먼저 내 신하들부터 설득해야 할 상황인데, 그대도 봤다시피 지금 독대조차도 겨우 강행했을 지경이오. 다들 나를 절벽 위 어린애처럼 취급하지. 나를 얕보거든.”
“충성일 겁니다. 폐하.”
아이작은 진심으로 말했다.
전대 왕은 툭하면 무시무시한 숙청을 벌이는 폭군이었지만, 그가 잘한 점이 있다면 싹수 노란 놈은 가차 없이 잘라냈다는 점이다. 덕분에 에델레드는 능력은 둘째치고 신하들에게 뒤통수 맞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럴 능력이 있는 자들은 이미 전대 왕 시절에 전부 죽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에델레드는 아이작의 말이 배려인지 칭찬인지 의심하는 눈치였지만, 일단 좋게 받아들였다.
“다른 자들이 문제요. 특히 마녀 헤카틀리 자매와 반역자 게오르크, 어떻게든 이 작자들을 복속시켜야 뭐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에델레드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말했다.
“일단 좀 걸으면서 이야기합시다. 사실 이 나라에서는 내 속내를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소. 하지만 성배기사에겐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군.”
***
“이 나라는 미쳤소.”
에델레드는 정원을 걸으면서 아이작에게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다들 칼부림과 자기 단련, 제멋대로인 정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용기, 자기들끼리만 알아보는 하잘것없는 명예에 미쳐있소. 정의, 용기, 명예. 그래, 좋지. 좋은 말이지. 그런데 다들 칼을 들고 싸우면! 대체 쟁기와 끌, 망치는 누가 든단 말이오?”
그의 가슴 속에 묵은 분노는 오래된 것 같았다.
자기 아버지를 보면서 키운 건지, 아니면 왕국을 영원한 내전 상태로 몰아가고 있는 기사들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여전히 자신을 ‘기사답지 못한 기사’로 보고 있는 신하들 때문에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에게 용맹하게 싸우는 왕은 상수였으니까.
“아마도 이 성까지 오면서 못 볼 꼴을 많이 봤을 거요.”
“……그런 일이 없었다고는 못하겠군요, 폐하.”
아이작은 엉망인 도로와 후줄근한 빈민들, 칼부림에 미쳐 있는 사내들과 일개 항구 노동자들마저 칼을 찬 모습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확실히 에델레드가 화를 내는 이유가 이해가 갔다. 뜻을 같이하는 신하들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신하들조차도 에델레드의 말을 이해 못 할 것이 분명하니 그가 분통 터지는 것도 당연하다.
“다들 칼부림에만 미쳐있으니 나라가 이 꼴인 거요. 그래, 강자에게는 약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 엘릴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 그런데 그건 세상을 한 손에 움켜쥘 만한 강자가 있을 때나 통하는 말이고!”
강자에게는 약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
얼핏 듣기에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에는 동시에 지독하게 내리깔아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보호받는 자와 보호하는 자 사이에 대등한 관계는 성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호할 의무’라는 것은 까딱 잘못하면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 규칙, 억압, 세금, 징벌로도 이어진다.
엘릴이 살아 있던 시절에는 기사도를 지키는 낭만적인 기사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한 700년쯤 왜곡되고 와전된다면, 짠, 지금의 엘릴 왕국이 태어난다.
“나는 게르토니아 제국에 가 보지 못했지만 거기서 전해지는 문물과 이야기는 듣고 있소. 그래, 물론 그곳도 폐해가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이 나라처럼 농부도 칼을 쥐어야 하고, 상인도 칼을 쥐어야 하고, 세상 모든 인재와 자원들이 군대로 빨려들어 가진 않을 거요.”
“그렇습니다. 폐하.”
“그렇다고 군대가 강한 것도 아니오. 왜냐? 그 많은 인재와 목숨, 자원들을 죄다 자기들끼리 죽이는 데만 쏟아붓고 있거든! 이러니 나라가 미쳐 돌아가지, 빌어먹을.”
강한 자가 규칙을 정한다.
이 나라에서 존중받는 자는 조금 더 강한 자뿐이다. 혹은 강해지려고 노력하는 자거나. 하지만 바슐 같은 강자도 굶으면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농부는 바슐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엘릴 왕국에선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밭 갈고 소치는 일 따위는 패배자나 하는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게르토니아 제국보다 한참이나 발전이 더디고 수준이 퇴보할 수밖에 없었다. 진보한 게 있다면 검술과 전략, 전술 정도뿐일까.
“사실 나는 이미 황제와 만나본 적 있소.”
“발트제메르 황제 폐하를 만나보셨다구요?”
아이작은 놀라 되물었다. 전혀 몰랐던 정보였다.
“그렇소. 내가 아직 왕이 되기 전의 일이지. 내 아버지와 뭔가 상의했지만, 아버지는 거절하셨지. 아마 여명군에 대한 이야기였을 거요. 그때 나와 잠깐 마주쳐서 짧게 대화해본 적 있소. 굉장한 남자였지…….”
에델레드는 꿈을 꾸는 듯 중얼거렸다.
아이작은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빛나는 뿔을 가진 황제를 만났다면 당연히 넋이 나갈 수밖에 없다. 아이작 본인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때 황제와 대화하면서 깨달았소. 이 나라가 미쳐있다는 것과,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선 이 미친 나라가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이작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외세의 개입이라니, 이 세계에서는 단순히 매국노 수준이 아니다. 엘릴이 세운 왕국을 빛의 법전에게 넘긴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배교자로 몰려도 할 말이 없었다.
“폐하, 그 말씀은…….”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소. 진지하게 한 생각은 아니니까. 자성을 위한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는 말이오. 하지만 내 힘만으로는 불가능했지.”
에델레드는 그렇게 말하며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아이작은 에델레드가 왜 자신에게 이런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는지 알 수 있었다. 발트제메르 황제를 만난 것은 그가 기사를 혐오하게 된 계기인 동시에 성장기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이작은 그 황제가 보낸 사람이니, 에델레드가 아이작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이다.
아이작은 키가 자신의 가슴께에 오는 에델레드를 보며 착잡한 표정을 했다. 그 역시 자신과 가치관이 너무 다른 세상에서 혼자 정상인인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어떤 고독을 느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에델레드는 아이작의 표정을 난감함으로 해석한 듯 고개를 떨궜다.
“그래. 어려운 문제겠지. 마냥 내 뜻을 따라 줄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소. 여명군에 필요한 병력을 요청하러 왔을 뿐 이런 머리 아픈 문제를 떠안고 싶진 않겠지.”
“아닙니다. 폐하.”
아이작은 에델레드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에델레드는 자기 사정을 하소연하듯이 말하긴 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아이작의 목적과 맞닿아 있었다. 더군다나 그가 고민하는 일들은 이미 아이작이 겪고 해결해 보았던 일이기도 했다.
왕국을 정상화하고 여명군에 참전시키는 것.
엘릴 신앙 엔딩을 보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이다.
“저는 폐하께 왕국을 돌려드리기 위해 방문한 것입니다.”
에델레드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왕국을? 내게? 어떻게?”
아이작은 엘릴 왕국 고위층이 가장 비밀스럽게 유지하고 있는 기밀을, 그리고 알데온 왕가가 제대로 된 왕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엘릴 왕국이 온통 내전에 휩싸이게 된 계기에 대해 언급했다.
“엘릴께서 100년째 침묵 중이시지요?”
에델레드의 동공이 급격하게 커졌다. 그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아이작은 그가 표정 관리하는 법을 좀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어떻게?”
엘릴 교단은 사제와 성기사의 구분이 크게 없다. 다들 칼 들고 싸우러 다니기 때문이다.
다만 소드마스터라고 일컫는 초월자 수준에 이른 자들은 천사와 대화하고 엘릴로부터 신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100여 년 전부터 엘릴로부터의 모든 대화가 갑작스럽게 끊어졌다. 천사들에게 물어봐도 그들 역시 모른다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전대미문의 사태가 이어지면서 엘릴 왕국은 긴 내전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 엘릴의 인정을 받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
알데온 왕성의 홀.
비어 있는 왕좌 앞에 늘어선 신하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최근 방문한 성배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이 바다 건너에서 온 성배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들에게서도 사라져가는 전통인 성배기사를 이교도가 자처한다는 것도 그런데, 심지어 그 일을 아주 잘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작의 곱상한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릇 강자라면 우락부락한 근육질 체구에 흉터 아홉 개쯤 달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곱상한 외모는 둘째치고 호리호리한 몸까지, 아이작은 아무리 봐도 소문의 성배기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엘릴을 홀렸던 무희라면 모를까.
“……나는 잘 모르겠군. 그 성배기사가 정말 이 성배기사 맞는 거요? 도저히 그럴 얼굴로 보이진 않았는데.”
“빛의 법전 놈들이 적당히 영웅을 만들기 위해 꾸며낸 걸지도 모르지. 엘릴의 피를 이은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그런 영웅이 갑자기 튀어나온단 말이오?”
“보나 마나 그 여명군인지 뭔지 그 부질없는 짓에 우리 피까지 끌어들이려고 하는 게 분명합니다. 적당히 대접하고 쫓아내야 합시다.”
“그런데 엘릴 기사단의 누가 성배기사와 맞붙어보았다고 하지 않았나?”
“레이나 힐드!”
한참 심각하게 대화하던 신하들은 출입문 근처에서 경비를 서던 레이나를 불렀다. 원래 그녀는 왕좌 옆에서 경호를 서야 했지만, 얻어맞은 얼굴의 붓기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아 구석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성배기사와 맞붙어봤다고 했지? 그자가 그렇게 강한가?”
레이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진 사람을 바라보았다.
“제 얼굴 안 보이십니까?”
“……콧등 잘 관리하게. 내 말은 그 이상의 탁월함은 보이지 않았냐는 거지.”
그 말에 레이나는 씨익 웃으며 자신의 부러진 콧등을 쓰다듬었다.
“검기를 뿜더군요. 그리고 저는 무려 거기서 살아남았지요.”
허어, 신하들 사이에서 감탄과 경악, 한숨이 뒤섞여 흘러나왔다. 그들은 잠시 침묵하다가 서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흠, 그게 사실이라면 뭐…….”
“검기라면 어쩔 수 없지.”
“드디어 빛의 법전도 도움이 되는 때가 오는군요.”
“그 치졸한 샌님들도 패왕 엘릴의 뿌리는 잊지 않은 모양입니다.”
“역시 성배기사를 자처할 만하군요!”
한편, 아이작은 헤사벨을 통해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전부 엿듣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적대적인 평판이 검기라는 단어 한방에 역전되는 것을 보며 어이없는 것을 느꼈지만, 이곳 엘릴은 원래 이런 나라였다.
단순하다는 점이 장점인 동시에 단점인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