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6)
16화. 이단심문관 (2)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불경한 생각을 했다가 뜨끔하여 게벨을 돌아보았다. 게벨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이놈 머리통 쪼개서 혹시 머릿속에 촉수가 든 건 아닌가 확인해 보자’며 덤벼들 모습은 아니었다.
“뭐, 네게는 빛의 법전께서 뛰어난 재능을 주셨으니, 기적까지는 과하다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르지.”
아이작의 검에 대한 재능은 명백히 정상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게벨이 상급 검술을 쓰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 정도였다.
게벨은 잠시 눈 쌓인 마당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충분한 것 같군.”
“예?”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는 말이다.”
아이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게벨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바닥난 지는 오래였다. 그가 상급 검술을 가르쳐 주지 않는 이상, 아이작은 이미 배운 것을 계속 갈고닦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겠죠. 아발란체 검술은 함부로 유출할 수 없다고 하셨으니.”
아쉬움 섞인 아이작의 말에 게벨이 그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더니 의외의 말을 꺼냈다.
“내가 네게 가르친 것은 내가 속했던 아발란체 성기사단 검술의 기초다.”
“예?”
“아발란체 검술은 기본적으로 전장을 가정한 합격(合格) 검술이다. 단체를 이룰 때 강해지는 검술이지. 그래서 일단 합을 맞추기 위해 기초를 탄탄하게 다지곤 한다.”
게벨은 거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가 끌어내듯 단어 하나하나를 내뱉었다.
“하지만 지금 아발란체 상급 검술은 계승할 가치가 없다.”
“뭐라구요?”
“아발란체 상급 검술의 정수는 단체를 이루었을 때 극한의 효율을 이뤄낸다. 하지만 이미 성기사단이 망한 이상…… 합을 맞출 동료도 없지.”
아이작은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만약 게벨에게서 상급 검술을 배운대도 그걸 제대로 된 효율로 발휘할 방법이 없다는 말이었다. 단체전을 기본으로 한 검술이라니 성기사단답긴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그럴만한 동료가 없었다.
‘게임 속에서는 그런 제한이 없었는데.’
“그래서 나는 네가 배운 기초를 토대로 새로운 비전 검술을 만들었으면 한다. 네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무엇을 겪고, 무엇을 느끼는가에 따라 검술의 색채가 달라질 테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게벨은 지금 성인도 안 된 애한테 한 검술의 일가를 이루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상급 검술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모르지만,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말이 되는…….”
“할 수 있다.”
게벨은 담담하게 현실을 토로하듯 말했다.
“이미 나는 너에게서 여러 차례 가능성을 보았다. 하지만 네가 스스로 자제하더군. 배우지 않은 것을 함부로 써선 안 된다고 무의식 중에 자제한 것이겠지.”
실제로는 네필림의 낮은 HP 한계 때문에 몸이 알아서 멈춘 것이지만, 어쨌든 게벨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작을 성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게벨의 눈에 아이작은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빈 캔버스로 보였다. 만약 자신이 아발란체 검술의 정수를 가르쳤다면 아이작은 그것을 단숨에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명작이 그려질 백지에 나의 오탁을 흘리고 싶지 않다.”
아이작은 뭔가 깨달은 듯 검으로 휘저은 마당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게벨은 오랫동안 숨기고 있던 자신의 욕심을 떠올렸다.
아이작을 이대로 보내준다면 그는 분명 자신을 뛰어넘는 검의 대가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아이작을 데려온 이유를 달성할 수 없었다.
“물론…… 그 고생을 시켜놓고 그냥 보낼 수는 없겠지.”
게벨은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며 중얼거렸다.
“아발란체 검술의 상급 검술 중 하나만 보여주마.”
“유출시키면 안 된다면서요?”
“나는 그냥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네가 너 스스로를 충분히 자제할 수 있는 것 같으니…….”
그러니 멋대로 보고 배워 버리는 것은 네 자유다, 라는 속내가 숨겨진 말에 아이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오감이 게벨에게 집중되었다. 그의 동작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였다.
슥.
게벨은 나뭇가지를 느리게 흔들다가 어느 순간 휙 가로저었다. 나뭇가지는 눈 위를 쓸 듯이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순간 파도가 몰아친 것처럼 눈보라가 튀어 올랐다.
살랑이는 눈송이들 사이로 게벨의 실루엣이 움직였다.
“검술이란 건 어차피 네가 배운 세 가지 동작의 응용에 불과하다.”
나뭇가지는 느리지만 천천히 속도를 올려 가기 시작했다.
베고, 찌르고, 내려치고, 지극히 단조로운 동작의 연속이었다. 게벨은 아이작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시범을 보이려는 듯 반복해서 검술을 시연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게벨의 동작이 한 명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적들이 몰려드는 전장에서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한 명이 아니라 다수, 적어도 그를 향해 몰려오는 십수 명의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적들은 칼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고함을 치며 둘러싸려 애쓰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게벨이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병사들에게 포위당하는가 싶은 순간, 쾅 하고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눈 폭풍이 사방으로 밀어닥쳤다.
가만히 서 있던 아이작은 졸지에 눈을 덮어쓰고 말았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게벨을 중심으로 눈이 깔끔하게 원형으로 사라져 있었다.
마치 대포라도 쏜 것 같은 폭음.
아이작은 그것이 한순간 음속을 돌파하면서 발생하는 충격파라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이런 속도를 내는 것이 가능한가?
애초에 몸이 견딜 수는 있나?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게 상급 검술, 즉 스킬이겠지.’
아이작은 게벨을 중심으로 세 갈래의 폭발한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만약 그 자리에 누군가 있었다면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이건 아발란체 성기사단 상급 검술 중 하나인 ‘전조’ 동작이다. 잘 보면 네가 이때까지 배운 것이란 걸 알 거다.”
게벨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검술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게 되면, 어떤 형상을 본받아 그 속성을 구현해낼 수 있게 된다. 마치 마법처럼.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검술은 그중에서도 광포하게 몰아닥치는 산사태의 형상을 담았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나?”
“……예.”
아이작은 게벨이 하던 동작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벨이 펼치던 동작들.
‘할 수 있다.’
게벨이 방금 보여준 그 동작을, 아이작도 금방이라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머릿속에 각인된 듯 그 동작의 흐름과 검로의 움직임이 이해되었다.
방금 게벨이 펼친 ‘전조’ 동작은 전부 아이작이 이 수도원에서 지내는 내내 연습해 왔던 동작을 조합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쉴 새 없이 내려치고 베고 긋던 그 동작들은 아이작이 수련해 왔던 동작이었다. 그것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켰을 때 비로소 검술이 나타나는 형태였다.
‘아발란체 성기사단 검술은 산사태의 형상을 받아들여 만든 검술이라고 했지.’
아이작은 문득 게벨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그럼 내가 아까 발휘했던 검술은…… 나는 대체 무슨 형상을 본받아 검술을 만들고 있었던 거지?’
게벨은 나뭇가지를 바닥에 꽂아 두고 말했다.
“상급 검술이 한번 봤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네 완성되지 않은 몸으로는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게 할 뿐이다. 하지만 너는 이미 내게서 배울 수 있는 만큼 배웠다. 네게 상급 검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뿐이지 너의 호흡, 너의 발디딤엔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정수가 녹아 있다…….”
게벨은 더 자세히 가르칠까 말까 고민하다가 단념했다.
여기서부터는 욕심이었다. 훗날 거장이 될 성기사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업보를 떠넘기고 싶다는 욕심.
“다만 지금부터는 네 길을 스스로 나아가는 게 좋겠구나.”
아이작의 상급 검술은 아이작 스스로 연구해서 만들어 내라는 말이었다. 아이작은 이런 무책임한 스승이 있나 생각했지만, 그의 말뜻 또한 이해했다.
아발란체 검술은 그가 쓰기엔 너무 무겁고 위력적이다.
아이작에게는 아이작에게 맞는 검술이 존재할 것이다. 심지어 아이작은 게벨이 오기 직전에 그 단서 또한 발견했다.
아이작은 손가락이 벌써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작.”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게벨이 아이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년 초에 란셀 수도원으로 가기로 했었지?”
“예.”
수도원에 들어온 고아들은 성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나가게 된다. 어떤 아이들은 수도사가 되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교단에 추천되어 교육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도제가 되어 기술을 배운다.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다른 경로가 열려있었다. 그는 도시의 수도원으로 가 제대로 된 성기사 수업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란셀 수도원은 인근에서 가장 큰 도시에 위치한 수도원이었다. 사제와 성기사들을 직접 육성하는, 상주 인원만 1,600명이 넘는다는 곳이었다. 아이작은 거기서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게벨에게서 모든 검술을 배운 것이 맞다면 더 이상 여기선 배울 것이 없었다.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떠나야 했다.
갑자기 교단으로부터 촉수 괴물 아니냐는 의심을 받지 않는 한, 아이작의 출세는 보장되어 있었다.
“만약 네가 성기사가 된다면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뭐죠?”
“내가 아발란체 성기사단을 벗어난 이유와 다른 사소한 것에 대해서.”
게벨은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것을 말하는 순간 게벨도 이 수도원을 떠날 생각이라는 것을, 아이작은 직감할 수 있었다.
아이작의 존재가, 아이작을 가르치는 과정이 그에게 무언가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나는 네게 기초만 가르쳤지만 분명 아발란체 검술의 기초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다. 나와 똑같은 검술을 쓰는 사람일 테니까.”
아발란체 성기사단 검술을 쓰는 사람이라면 같은 성기사단원일 것이다. 혹시 검술을 숨기라는 걸까? 따지고 보면 게벨은 기사단 검술을 외부로 유출시킨 셈이니 죄를 저지른 것일 수도 있다.
“마주친 즉시 그 자리에서 죽여라.”
아이작은 흠칫했다.
“아니, 그래도 검술을 몰래 배운 걸 들켰다고 상대를 죽이는 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이미 아발란체 성기사단은 망해서 사라졌다. 따질 사람도 없어.”
아이작은 게벨의 지적을 듣고서야 뒤늦게 아까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면 왜 죽이라는 거지?’
살인의 찜찜함 때문에 내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성기사라고 부르지만 결국 군인이다. 그리고 살인은 군인의 업이다.
무엇보다 아이작은 자신의 손으로는 아니더라도, 이미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심지어 먹어 치우기까지 했다.
“네가 죽이고 싶지 않더라도 놈은 너를 반드시 죽이려고 들 거다. 그러니 너를 위해서라도 놈을 죽여야 한다.”
“……아발란체 성기사단 검술을 쓴다는 것 외에 다른 특징은 없나요?”
“외모까지 달라졌을 테니 알려줘봤자 의미가 없다. 그리고 헷갈릴 염려는 없다. 이제 세상에 아발란체 성기사단 검술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너와 나, 그놈밖에 없으니까.”
아이작은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지, 왜 죽이라고 하는 건지 물어보려고 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살인의 대행이라면 알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분명 게벨이 성기사로서의 업을 내려놓고 수도원에 몸을 의탁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작의 정체를 일부러 숨겼던 것과 분명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까악.
그때 까마귀가 큰 소리로 울었다.
아이작이 하늘을 올려다보자 수도원장실 창틀에 앉아있던 까마귀와 눈이 마주쳤다. 까마귀는 아이작을 보고 한 번 더 울더니 크게 날갯짓하며 날아갔다. 발목에는 붉은 끈이 묶여 있었다.
연락책으로 쓰이는 까마귀였다.
게벨도 그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갈까마귀로군.”
“안 좋은 징조인가요?”
“갈까마귀보다는 갈까마귀를 부리는 자들이 문제지.”
게벨은 묘한 여운을 남기며 말했다. 그때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수도원의 문이 열렸다.
수도원장 예브하르가 창백한 안색으로 바쁘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이작은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게벨 역시 마찬가지인 듯 안색을 굳혔다.
“무슨 일입니까, 수도원장님?”
“게벨 씨.”
예브하르는 창백한 안색으로 얼굴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단심문관이 우리 수도원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