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66)
166화. 눈뜨라 부르는 소리 있도다 (3)
아이작은 추격전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껏 채워 놓은 포만감을 꺼뜨리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신나서 펄펄 뛰어다니고 힘도 쓰고 그랬지만, 그 모든 것이 배를 꺼뜨리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 자중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이런 졸개들한테 포만감을 소비하기에는 아까웠다.
하지만 힘을 쓰지 않으면 적들도 겁을 먹지 않으니, 적당한 수준을 찾아야 했다.
스르르륵. 아이작의 발밑에서 넓게 저 너머의 색채가 퍼져나갔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드넓은 들판에 저 너머의 색채가 안개처럼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숨어 있는 기사들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뛰는 건 힘드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까 봐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어이!”
감시 중이던 기사들에게서 동요하는 기색이 번졌다. 놈들은 철저하게 숨어 있다고 믿고 있겠지만 붉은 성배의 인간사냥꾼들에 비하면 대낮에 벌거벗고 다니는 수준으로 눈에 띄었다.
잠입은 기사의 미덕이 아닌 모양이다.
놈들은 아이작이 자신을 떠본다고 생각한 건지 조용히 있었다. 그 사이 아이작은 휘적휘적 그들을 향해 직진으로 걸어갔다. 결국 들켰다고 판단한 네 명의 기사들은 서서히 언덕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달이 좋은 밤이군. 쌍쌍이 데이트라도 하고 있었나?”
“……아이작 이사크레아 경이오?”
“그렇다면?”
기사들은 수군거리며 시선을 교환했다. 아이작은 금방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게오르크 장군의 기사들인가?”
기사들은 침묵했다. 하지만 숨겨 봤자 의미 없다고 판단한 건지 긴장한 얼굴로 하나둘 검을 꺼내 들었다. 아이작은 달빛에 번뜩이는 검광을 보며 중얼거렸다.
“게오르크 가문에 대한 우울한 이야기를 방금 들었으니 검을 꺼내는 것까지는 봐주겠다. 당장 집어넣으면 방금 전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야기할 테고.”
하지만 상대방의 실력도 확인하지 않고 압력에 굴한다면 그건 엘릴 기사가 아니다.
“바다를 건너온 성배기사의 실력 좀 보겠소!”
게오르크 기사는 아이작을 향해 곧바로 달려들며 칼을 내리쳤다. 이미 알데온 기사의 매운맛을 본 적 있는 아이작은 곧바로 칼을 부딪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퍼뜨린 저 너머의 색채에 힘을 집중해 게오르크 기사의 발목을 잡아챘다.
“큭, 헉!”
게오르크 기사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린 순간 아이작의 발이 그의 고간을 걷어찼다. 게오르크 기사는 기이한 신음성을 내지르면서 휘청거리다가 쓰러졌다. 원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발목이 걸리면서 드러난 빈틈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다행히 일격에 그들의 선임 기사가 쓰러지는 모습이 다른 기사들에게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남은 세 명의 기사 중 두 명이 동시에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고, 다른 한 명은 곧바로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언덕 아래에 말 몇 마리가 묶여 있었다.
“후배를 도망치게 하고 선배들은 희생한다는 건가?”
“칼을 뽑아라, 성배기사!”
아이작은 그들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칼을 뽑았다.
‘실력 좀 봐야겠군.’
검광이 번뜩이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
게오르크 기사는 전력을 다해 내려쳤음에도 불구하고 검격을 손쉽게 받아 내는 아이작을 보며 놀란 표정을 했다. 그러나 당황하지 않고 바로 다음 동작을 이어 가며 아이작을 공격했다.
아이작은 그들의 실력을 가늠해 보았다.
‘역시 알데온 기사단과는 다른 검술이군. 강력하지만 좀 더…… 유연한 타입인가?’
다르게 말하자면 변화무쌍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마치 한 몸처럼 유연하게 공수를 교대하며 아이작을 몰아붙였다. 알데온 검술처럼 일격필살을 노리는 것보다는 상대의 밸런스를 무너뜨리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역시 리안나 게오르크와 비슷한 검술인 것 같군.’
아이작은 엘릴 왕국에서 처음 보는 검술과 맞부딪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데온에 처음 들어온 날 호된 신고식을 통해 배웠다. 그렇기에 이번엔 미리 알아두기로 했다.
게임에서 리안나는 성검의 능력을 바탕으로 한 화려한 검술로 적을 압도한다. 지금 이 기사들의 검술에 성검의 능력이 합쳐진다면 격이 다르긴 해도 얼추 비슷할 것 같았다.
어느 순간 게오르크 기사 중 하나가 아이작의 칼날을 손에 쥐었다. 칼날 안쪽 깊숙한 쪽은 손잡이와의 균형을 위해 날이 서 있지 않은 뭉뚝한 부분이 있다. 게오르크 기사는 곧바로 칼날을 겨드랑이에 끼고 아이작에게 유술을 걸었다. 아이작의 두 발이 공중에 떴다.
아이작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어깨가 날아갈 수도 있는 과감한 공격이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소드 레슬링이란 것을 들어 보긴 했지, 당하는 것은 처음이군.’
지금까지 그가 만난 적들 중에선 이렇게 위험천만한 기술을 시도하는 이들이 없었다.
균형을 잃은 아이작을 향해 다른 기사가 칼을 휘둘렀다. 아이작이 아닌 다른 기사였다면 이대로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게오르크 기사들의 수준과 검술의 특징을 알기 위해 적당히 봐주고 있을 뿐이었다.
까드드득, 쾅!
찰나의 순간 굉음과 함께 두 기사가 나자빠졌다.
두 기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휘청거리다가 주저앉았다. 뒤늦게 통증이 찾아왔다. 어떻게 다쳤는지도 알 수 없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마치 아이작이 허공에서 그들을 집어 올려 던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갑옷 또한 엉망진창으로 찌그러져 있었다.
“쟤 피난다. 겨드랑이 베였으니까 피 많이 날 거다. 지혈해줘.”
아이작은 그의 칼날을 쥐고 있던 기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칼날을 쥐고 있던 기사는 갑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손가락과 겨드랑이를 크게 베였다. 워낙 강하게 쥐고 있어서 다치지 않게 할 수는 없었다. 기사는 이를 악물고 칼을 쥐려다가 자신의 칼이 이미 박살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작은 반항적인 엘릴 기사를 닥치게 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칼에서 검기를 피워 올렸다.
툭, 투툭. 주변에 있던 풀들이 그 예기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물어뜯기듯 잘려 나갔다.
“거, 검기…….”
게오르크 기사는 숨을 헐떡이며 저항을 포기했다. 그는 그제야 아이작이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검기를 발휘했으면 그들은 이미 조각조각 났을 테니까.
“치료하라고.”
아이작이 다시 내린 명령에 놈은 주춤주춤 기어가 동료를 지혈했다. 그 역시도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았지만 지금 당장은 피 흘리는 동료가 더 중요했다.
끙끙 앓는 동료의 상처 부위를 꽉 움켜쥐고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피가 빠르게 아물었다. 기적을 발휘할 수 있는 기사라는 것은 엘릴 기사들 가운데서도 수준급이라는 뜻이다.
그는 빛의 법전 신도인 아이작이 어떻게 검기를 발휘할 수 있는지 궁금한 기색이었지만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아이작이 어딘가를 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한 족속들이라니까.”
“으아아아아!!”
두두두두두! 분명 먼저 도망쳤던 후배 기사가 어느새 말을 타고 돌아와 아이작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분명 한 명쯤은 살아서 돌아가 보고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일 텐데, 임무에 대한 사명감을 엘릴 신도로서의 신념이 압도한 것이다.
“물러나라, 성배기사……!”
아이작은 달려오는 말과 맞서고 싶은 마음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는 그저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혼돈의 눈을 발동시켰다.
아이작의 눈동자에 연한 보랏빛이 스며들면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 눈동자가 순식간에 기사의 시야를, 생각을, 본능을 사로잡았다. 강한 암시를 걸 필요도 없었다.
선배 기사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린 솜씨와 피어오르고 있는 검기.
후배 기사는 이미 겁에 질려 있었고, 기수의 공포는 말에게 쉽게 전염된다.
히히히히힝!
말은 거칠게 투레질하면서 기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뒹군 기사는 신음을 흘리며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아이작은 쓰러진 기사를 발로 걷어차 뒤집으며 말했다.
“다들 누워서 대화하는 게 좋은 모양이지? 이제 좀 얘기를 해 보자고.”
***
“……우리는 리안나 게오르크 장군께 충성하는 엘리온 기사단이다.”
수도인 알데온에 알데온 기사단이 있다면, 성지 엘리온에는 엘리온 기사단이 있다.
안일한 이름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데온 기사단에게는 백사자 기사단이라는 이름이, 엘리온 기사단에게는 검은 매 기사단이라는 이름이 있다.
다만 기억하기 쉽다는 이유로 그냥 지역명을 붙여 부를 뿐이다.
“그래. 이름은?”
아이작은 가장 먼저 덤벼들었지만 고간을 맞고 쓰러졌던 기사에게 물었다. 그가 가장 계급이 높은데다 상대적으로 다른 기사들보다 상태가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기사는 잠시 우물거리다가 뱉듯이 대답했다.
“허크. 허크 펠트.”
“내 친애하는 친구 허크. 그대는 에델레드 왕에게 어떤 말을 전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나?”
“에델레드 왕이 아니라…… 당신을 관찰하러 왔다. 성배기사, 아이작 이사크레아.”
허크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나? 나는 그냥 외국인일 뿐이야. 굳이 게오르크가 나를 적대할 이유는 없을 텐데?”
어차피 에델레드를 돕기 위해 게오르크 가문을 토벌할 생각이었으면서, 아이작은 일단 그렇게 주장해 보았다. 물론 분열 예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게오르크 가문의 입지를 위협하는 일이기는 했다. 에델레드가 성물을 반납하겠다는 것을 ‘감히’ 성지수호자에 불과한 자가 거절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허크는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은 발트제메르 황제의 전언을 전하러 왔겠지. 여명군을 일으킬 테니 병력과 물자를 협조하라고. 하지만 엘릴의 땅에는 그럴 손도, 넘겨줄 칼도, 응원할 마음도 없다. 성배기사.”
“여명군?”
아이작이 엘릴 왕국까지 넘어와 에델레드를 돕는 이유는 사실 그의 말대로였다.
엘릴 왕국의 강력한 전력을 빌리는 것.
아이작이 엘릴 왕국까지 넘어와 부딪쳐 본 기사들의 수준이 평균이라고 감안하면 게르토니아 제국의 평균을 훨씬 상회한다.
그야 국가 전체가 칼부림에 미쳤으니까 그렇긴 하겠지만, 황제로선 탐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무의미한 타국의 전쟁에 희생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알데온 놈들도 증오스럽지만, 바다 너머의 일에 개입하는 것도 사절이야.”
퉤. 허크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아이작은 그의 반응을 보며 난감함을 느꼈다.
‘이러면 곤란한데.’
그가 걱정했던 것은 엘릴 왕국에 통일된 세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에델레드의 협조를 구하더라도 뒤통수가 허전하면 제대로 된 지원 병력을 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게오르크를 토벌하려 했던 건데,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엘릴 기사들이 싸움을 거절한다고?’
다른 무엇보다 아이작에게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엘릴 기사들은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그들이 여명군에 개입하지 않던 것은 빛의 법전 교단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을 뿐만 아니라, 내전이 격화되면서 자기들끼리 싸우기 바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분과 조건이 충분하다면 그들은 이 성전에 기꺼이 몸 바칠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엘릴과 엘릴의 신도들이니까. 더군다나 보수적인 엘리온의 성지수호자들이라면 더더욱.
‘이건 뭔가 있군.’
아이작은 일단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 알겠다. 그래서 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서 매장하려고 했던 모양이군? 사절 자체가 없던 것처럼 하려고?”
“…….”
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으로 아이작을 죽이는 것 또한 선택지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작은 생각을 확장시켰다.
레이나 힐드는 아이작이 도착하는 날짜를 잘못 알았다고 했고, 에델레드는 보고조차 받지 못했었다.
처음에는 그저 엉망인 행정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지만, 게오르크 파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생각을 달리했다.
‘게오르크만이 아니라 엘릴의 많은 기사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겠군.’
아이작은 생각을 더더욱 확장시켰다.
‘엘릴, 혹은 엘릴의 천사 중 누군가가 게르토니아 제국 사정에 참견하고 싶지 않은 건가?’
생각을 집중하던 아이작은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리기에 섣부른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바닥에 앉아있는 엘리온 기사들을 살펴보다가 마지막에 말에서 떨어진 막내를 보고 턱짓했다.
“막내. 너는 집으로 가라.”
“예? 무, 무슨…….”
“나머지는 인질이다. 너는 가서 게오르크에게 내 메시지를 전해.”
그는 다급한 표정으로 다른 선배기사들을 보았다. 허크를 비롯한 기사들은 침통한 표정이었지만 아이작이 아량을 베푸는 것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한 명이라도 돌아가야 이곳에서 벌어진 일과 사정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메시지 말씀이십니까?”
아이작은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다가 입을 열었다.
“엘릴이 침묵을 깰 때가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