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68)
168화. 소집 명령 (2)
에델레드의 목소리는 녹이 슨 것처럼 거칠고 어색했다.
어떻게든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보였지만 꽉 쥔 손이 떨리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아이작은 다급히 모르스에게 속삭였다.
“솔트아인 쪽에서도 사람이 오기로 되어있었습니까?”
“그야 전령을 보내기는 했습니다만 답변은 없었습니다. 당연히 무시할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놓고 알데온 왕가에 가장 강한 원한을 품은 솔트아인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경호 하나 없이 맨몸으로, 커다란 포댓자루 하나 든 채 여기까지 와 있었다. 이 정도면 정문의 경비가 막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초대받은 대영주를 무턱대고 거절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로잘린드 솔트아인 부인은 에델레드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과장된 동작으로 인사하며 말했다.
“엘릴 왕국에 영광과 승리 있으라!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부인을 어찌 있을 수 있겠소. 늘 건강을 걱정하고 있었소. 솔직히 예기치 못한 방문이지만, 그래서 더 반갑구려. 테오 솔트아인 변경백은 안녕하시오?”
로잘린드는 느슨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퀭한 눈 아래 섬뜩한 증오가 뚝뚝 묻어나왔다.
“제 남편은 초대장을 받고 꼭 방문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병이 너무 깊어 거동이 어려웠지요.”
“안타깝구려. 하지만 부인께서 자리를 빛내주신다니 반가울 따름이오. 부디 머무는 동안 편히 지내도록 배려를…….”
“하지만 신하 된 자로서 어찌 폐하의 소집 명령을 거절하겠습니까? 반드시 가서 당신 눈을 똑바로 보고 간언하겠노라며 배를 타기를 고집하셨습니다.”
아이작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로잘린드는 바로 자신이 끌고 온 포댓자루 입구를 확 찢어 벌렸다. 순간 지독한 악취가 홀 안에 가득 번져나갔다. 심한 악취에 귀족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도착하셨지요.”
포대 자루 안에 들어있던 것은 반쯤 썩어 가는 테오 솔트아인 변경백의 시신이었다.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는 몸은 배 위에서 파도를 맞으며 방치된 것인지 하얀 소금이 몸 곳곳에 말라붙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밖에 남지 않은 회백색 눈은 여전히 부릅떠져 있었다. 죽은 노인이라곤 생각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로잘린드는 남편의 시신을 일으켜 세우더니 에델레드를 향해 끌고 가기 시작했다. 회백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에델레드는 숨을 들이켰다.
로잘린드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자, 폐하. 선왕 폐하께서 그토록 바라던 제 남편의 시신입니다! 죽어서도 폐하께 복종하겠다는 충의를 받아주셔야지요. 솔트아인에서 굶어 죽은 8만 명의 폐하의 백성들도 그걸 바라고 있을 겁니다.”
꺼득, 꺼드득.
소금에 말라붙은 시신은 딱딱하게 굳어서 끌려올 때마다 섬뜩한 소리를 냈다. 광기 어린 로잘린드의 기세에 질린 사람들은 굳은 채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자, 폐하, 어서!”
에델레드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려 했다. 순간 누군가 그의 등을 탁 받아 주었다.
아이작이었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끝장이다.’
어린아이에게 맡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집 명령을 내렸을 때 선왕의 업보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은 에델레드도 알고 있었다.
왕이 된 이상 어린애 취급만 하는 것은 오히려 모독이었다.
다만 아이작이 밀어줄 수는 있었다.
그때, 보다 못한 모르스가 먼저 소리쳤다.
“당장 저 마녀를 끌어내라!”
명령을 기다리던 알데온 기사들이 서둘러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 순간 에델레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러나라!”
알데온 기사들은 곧바로 멈춰 섰다.
에델레드는 호흡을 가다듬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손을 떨고 있었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로잘린드도 멈춰 서서 다가오는 에델레드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 점점 죽은 테오 솔트아인의 시신이 크게 담겼다. 에델레드는 그 안에 굶어 죽은 수만 명의 유령들을 보았다. 당장이라도 변경백의 시신을 박차고 튀어나와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에델레드는 기꺼이 그들의 이빨에 목과 어깨를 내어 주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소. 변경백. 알데온은 그대를 환영하오.”
생각보다 담대한 에델레드의 모습에 아이작은 감탄했다. 하지만 그가 솔트아인 변경백의 시신을 끌어안은 순간 여기저기서 탄식과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이작은 희비가 교차하는 귀족들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헤사벨에게도 이미 지시해 둔 일이었다.
“좀 더 일찍 귀하와 대화할 기회가 없어서 유감이오. 앞으로 있을 일을 생각하면 그 어느 때보다도 변경백의 조언이 귀했을 텐데. 부디 안식을 찾으셨길 바라오.”
로잘린드 부인은 뚫어져라 에델레드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무장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바로 로잘린드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눈빛이었다.
그러나 에델레드가 시선을 피하지 않자, 서서히 드러내던 감정을 가라앉혔다.
“……이렇게 두 팔 벌려 환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폐하.”
그렇게 말하는 로잘린드의 얼굴에는 그저 피로만이 가득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녀의 살의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더 조용하고 농축된 형태로 바뀌었을 뿐.
“죄송하지만 이 늙은이는 먼저 물러나도 되겠습니까? 폐하의 부름에 답하기 위해 서둘렀습니다만, 이제 나이가 나이인지라 열정적으로 호응하기가 어렵군요.”
“물론이오. 이곳까지 먼 걸음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오.”
에델레드는 로잘린드를 다독이고 기사들을 시켜 테오 솔트아인 변경백의 시신을 수습하도록 지시했다. 기사들은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시신을 조심스레 다시 포대에 담아 수습했다.
로잘린드는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시체처럼 푸른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
시작이 다소 극적이긴 했지만, 게오르크 반군에 합류한 귀족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귀족들이 소집에 응했다.
귀족들은 표면적으로는 에델레드 왕에게 큰 반감을 드러내거나 줄타기를 하는 듯한 모습 없이 그의 권위에 복종했다. 이 정도면 긴장했던 것에 비해 예상을 넘어서는 성공이었다. 귀족들이 모두 알데온에 복종한다면 게오르크 반군을 말려 죽이는 것도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아이작은 이 소식이 그다지 희소식만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로잘린드 부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분위기를 띄우는 연회가 이어지는 사이, 아이작은 모르스에게 물었다. 모르스는 양 넓적다리를 뜯다가 아이작의 말을 듣고 입맛이 달아난 표정으로 고기를 내려놓았다.
아까 그 시체가 떠오른 것 같았다.
“정숙한 귀부인과는 거리가 멉니다. 엘릴과 소금 의회,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한 사람이지요. 솔트아인 변경백과 만나 결혼하기 전까지는 왕국 서부 전역을 헤집던 해적이었다더군요.”
“해적…….”
“뭐, 본인은 의적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제멋대로 무장해서 세력을 이루고 왕과 귀족의 군대를 공격했던 것은 사실이지요.”
“그럼 솔트아인 변경백은 치안을 위해서 해적, 아니, 해상 무장 군벌과 손을 잡은 거군요.”
“음? 아닙니다. 솔트아인 변경백이 후계자 시절에 홀딱 반해서 따라다녔다죠. 죽을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3년이나 쫓아다니며 구애했다더군요. 심지어 부하로 들어가서 같이 노략질도 벌였다던데.”
“…….”
“흠, 하지만 사실 나도 그저 건너 건너 들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오늘 모습을 보고 나니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남편의 시체를 가져와 어전에 내던질 줄이야.”
아이작은 로잘린드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녀는 게임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으니까.
솔트아인 자체가 그다지 게임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다. 로잘린드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위협이 될 만한 힘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지.’
솔트아인 섬은 엘릴 왕국을 나누는 4개의 파벌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영향력이 강하다. 그 대학살을 당하고도 여전히 넓은 섬과 해상 무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뒤에 소금 의회가 있긴 하지만, 최소한 해안이나 강을 끼고 있는 귀족들에게는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뜻이다.
“로잘린드 부인은 이 소집을 망치고 싶었던 것 같군요.”
“그렇겠지요. 찾아온 것만으로도 다들 이렇게 놀랐으니. 폐하께서 그래도 의젓하게 대응하셔서 다행입니다.”
만약 알프레드 선왕이었다면 어떻게 대응했을까? 보나 마나 로잘린드의 목을 치거나 두들겨 패서 끌고 나가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델레드가 그렇게 대응하거나 모욕을 주었다면, 즉시 귀족들 사이에서 반감을 조장하는 불온한 분위기가 터졌을 것이다.
‘솔트아인에서 벌어진 학살에 유감을 품은 귀족들이 많지.’
단지 그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다. 자신들도 그렇게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로잘린드는 그런 분위기를 선동하고 끌어낼 준비를 하고 찾아왔다. 아이작은 귀족들 중에서 유달리 아쉬운 기색이 강했던 이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미 포섭당했거나, 혹은 에델레드의 권위가 깎이길 바랐던 귀족들일 것이다.
‘국가의 통합이 하루아침에 말 한마디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니…….’
선왕은 에델레드에게 안전한 울타리를 물려주었지만, 울타리 밖에 많은 적을 만들었다. 이제 그 울타리를 어떻게 지키는가는 온전히 에델레드의 몫이었다.
***
쿵쿵쿵.
연회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기사들이 검집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단상 위에서 식사를 하던 에델레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델레드는 조용해진 홀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왕의 부름에 답해 먼 곳에서 한달음에 달려와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오.”
쿵쿵쿵쿵! 귀족들은 호응하듯 맥주잔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에델레드에게 대신 대답했다.
“여러 가지 궁금하거나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겠지만, 자질구레한 것들은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겠소. 나는 성지 엘리온을 재정복하려 하오.”
에델레드의 말에 홀 안이 조용해졌다. 예상 못 했던 말은 아니었다. 성지를 빼앗겼다는 것은 엘릴 교단의 대표자로서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무엇보다 반역자를 계속 내버려 두면 왕국 전역에서 크고 작은 반역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엘리온에는 게오르크 가문이 있지. 하지만 여기에는 나의 기사들과 나의 군대, 그리고 여러분들이 있소. 이 원정 동안 여러분들은 나의 신하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친구, 나의 스승, 나의 전우로 대접받을 것이오.”
쿵쿵쿵쿵쿵! 아까보다 더 격렬하고 환호 섞인 맥주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서 흘러넘친 맥주가 테이블을 타고 흘러내렸다. 선왕의 독재와 폐해를 기억하고 있는 귀족들에게는 이런 유화책을 쓰는 에델레드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성지, 우리의 신, 패왕, 영원한 전장의 선봉장으로 서 계신 엘릴께 돌려드려야 할 성물이 있소.”
에델레드는 품속에서 분열 예식을 꺼내 들었다. 아이작에게 미리 빌린 것이었다.
분열 예식은 에델레드의 손에 들어가자마자 웅웅대며 울었다. 에델레드가 가진 엘릴 신앙의 신성력을 느낀 것이다. 엘릴의 피가 그대로 스며든 불길한 붉은 문양이 더욱 섬뜩하게 빛났다.
“엘릴의 가슴을 가른 단검, 가르갈디아요. 무희는 이 칼에 불경하게도 분열 예식이라는 이름을 붙였소. 갈라지는 결혼식이라는 뜻을.”
그 모습을 보던 귀족들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들이 가진 신앙이 저절로 분열 예식에 호응하듯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 혐오스러운 존재는 패왕의 총애를 받고도 배신하는 길을 선택했소. 그리곤 심장을 훔쳐 달아났소! 그래서 결국, 우리는 우리의 신이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소!”
쿵쿵쿵쿵! 맥주잔을 두들기는 소리가 더욱 요란해졌다.
“긴 시간을 지나 가르갈디아가 우리 손에 다시 돌아왔다는 것은, 마침내 우리의 신께서 돌아오실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오! 가르갈디아는 시작에 불과하오! 우리는 모든 성지와 성검을 되찾고, 성배를 되찾아와 엘릴의 귀환이라는 업적을 완수할 것이오!”
쾅쾅쾅! 귀족들의 호응은 광란에 가까웠다.
엘릴의 승천과 부활에 대한 전설을 듣지 않고 자란 기사들은 없다. 에델레드가 연설을 잘하든 못하든 이 연설에 호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국노 이단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었다.
그때 에델레드가 아이작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재투성이 기사 이후 가장 위대한 성배기사가 우리의 여정을 도울 것이오!”
“성배기사! 성배기사!”
아이작은 갑자기 지목받아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잔을 들어 올렸다. 귀족들 역시 의아해하는 눈치였지만 알데온 기사단원들이 호응하자 그들도 함께했다. 에델레드는 힘껏 외쳤다.
“우리는 성지로 돌아가야 하오!”
“성지로!”
귀족들 역시 너 나 할 것 없이 소리쳤다.
‘제법 하는군.’
아이작은 살짝 감탄했다. 에델레드는 연설에 은근슬쩍 리안나 게오르크에 대한 은유를 끼워 넣었다. 엘릴과 무희 사이에 있었던 일은 역사 그대로긴 하지만, 그 무희에 대한 혐오를 리안나에게로 돌렸다. 게오르크 가문에는 여러 가지 그럴 수밖에 없던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점은 에델레드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선동을 위해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이었다. 어린아이라고 보기 힘든 처세술이었다.
아이작은 쓴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더니 결국은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군’
에델레드는 이렇게 진정한 왕으로 한 걸음 다가간 것이다.
아이작은 그것이 어딘가 못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