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69)
169화. 소집 명령 (3)
연설의 흥분이 가라앉자 홀 안은 전쟁에 대한 흥분으로 가득 찼다.
물론 ‘그’ 게오르크 군을 상대해야 한다는 불안감은 여전히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하지만 엘릴에서 이런 기사답지 못한 ‘소수파’는 으레 말 못 하고 조용히 구석에서 상황이 흘러가는 꼴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기사 출신 귀족들로 가득한 왕실이라면.
그러거나 말거나 회의는 이내 목소리 큰 호전론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귀족이라기보다 기사, 기사라기보다 산적 두목에 가까운 이들은 그럴듯한 개회사나 선언 없이 큰 목소리 하나로 회의를 주도했다.
“당연히 선봉은 우리가 맡아야 하오!”
쿵. 덩치 큰 한 귀족이 누군가 말다툼을 벌이다 벌떡 일어나면서 외쳤다. 그 소리에 그쪽으로 귀족들의 시선이 쏠렸다. 다른 귀족들과 말싸움을 벌이다가 언성이 높아진 듯한 덩치 큰 귀족은 시뻘게진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 갤버드 기사단이 중심에서 묵직하게 적을 분쇄하지 않는다면 누가 대신하겠소! 우리 영지의 중갑기사들이 아니고서야!”
“그 느려터진 돼지들이 게오르크 기사들에게 상대가 되겠냐, 이 머저리야! 게오크르 반역자 놈들은 네 꿀꿀이들을 어린애 손목 비틀 듯이 쓰러뜨릴 거다!”
반박한 이는 그와 말싸움을 벌이던 애꾸눈의 여귀족이었다.
아이작은 일단 덩치와 애꾸라고 이름을 붙였다.
“선봉은 우리 힐스너 기사단이다! 우리 기사단이 빠른 유격 능력으로 적을 요격해서 군세를 분산시키는 게 방법이야! 너희들은 그 뒤에 따라와서 정리해!”
그때 떨어져 있던 콧수염이 멋진 귀족이 화를 내며 끼어들었다.
“무슨 소리! 지금 우리 카르바너 중갑보병대를 무시하고 선봉을 논하는 건가? 쇳덩이처럼 단단하게 서서 적을 몰아붙이면 아무도 감히 상대하기 힘들 거란 걸 알 텐데!”
아이작은 그에게 콧수염이라는 명칭을 붙여 주었지만, 이내 곧 여기저기서 자신들의 기사들이야말로 선봉으로 제격이라는 주장이 앞다퉈 튀어나오자 별명 붙이기를 포기하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게르토니아 제국이었다면 선봉을 지망하는 것은 공에 미친 소수고, 나머지는 어떻게 최대한 안 싸우고 원래 영지로 돌아갈까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건 그거대로 머리가 아프지만 엘릴 왕국은 모두가 머리가 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머리가 더 아팠다.
“모두들 용맹한 모습이 보기 좋소.”
그때 에델레드가 입을 열었다. 귀족들은 언성을 높이려다가 조용해졌다.
‘덩치’가 재빨리 에델레드에게 고했다.
“폐하, 저희 기사단을 부디 선봉에!”
“갤버드 기사단이라면 충분히 선봉에 설 만하지.”
덩치의 얼굴에 화색이 돌려던 순간, 에델레드가 이어 말했다.
“다만 상대편에는 아마 리안나가 선봉으로 설 거요. 그대 기사단에 소드마스터와 대적할 만한 기사가 있던가?”
덩치는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누군가 리안나에게 대적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닐 것이다. 공을 세워야 한다는 욕망이 두려움을 이겼을 뿐.
“신이 상대하겠습니다! 리안나의 목을 잘라 바치겠습니다!”
“……용맹함은 높게 사지만, 무모한 도전은 내키지 않소. 일단 리안나를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을 선봉으로 세우고 싶군.”
까다로운 조건에 떠들어대던 기사들이 조용해졌다.
소드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은 당연히 소드마스터다.
엘릴 신앙에서 가장 강력한 사제이자 성기사이기도 한 소드마스터들은 희귀한 건 물론이고, 대개 가문에 묶여 있기보다 방랑하며 단련하기를 좋아했다. 어딜 가도 대접받을 테니 굳이 한곳에 매여 있을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다.
대놓고 소속을 밝힌 소드마스터는 현재 리안나 게오르크가 유일했다.
‘그마저도 아버지 일이 아니었다면 그러지 않았겠지.’
“없다면 내가 한 사람을 추천하고 싶군.”
에델레드가 일어나 아이작을 가리켰다.
“성배기사 아이작 이사크레아, 그 역시도 소드마스터요.”
“설마!”
귀족들 사이로 경악과 충격이 번져 나갔다. 아이작은 빛의 법전 소속으로 알려진 자신이 검기를 쓴다는 것이 이렇게 마구 퍼져 나가도 괜찮은 건지 우려했지만, 이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이 원정에서 공을 크게 세워서 ‘엘릴로부터 축복을 받았음’을 변명 삼아야 했다. 전후가 뒤바뀌긴 했지만, 바다 건너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빛의 법전도 알기 힘들 것이다.
그때 ‘애꾸’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성지 수복 원정에 이교도가 선봉을 서다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왕의 명령에 대놓고 불응하는 모습에 아이작은 기가 찼지만 이게 엘릴 왕국의 현재 모습이었다. 심지어 다른 귀족들도 동조하는 모습이었다.
애당초 이 동네 인간들은 원래 그랬다. 아닌 건 아닌 거다. 아닌 걸 맞게 하려면 패서 말을 듣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건 에델레드의 목적을 달성시키려면 아이작이 선봉에 서야 했기 때문에 애꾸를 닥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은 이런 경우를 대비한 물건을 들고 애꾸 앞까지 저벅저벅 걸어갔다. 애꾸는 눈이 마주치자 움찔했지만 으르렁거리듯 이를 드러내며 마주 쏘아보았다.
쿵. 아이작은 그녀 앞에 커다란 천에 싸인 물건을 내려놓았다.
“……뭐요?”
“선봉에 걸어놓을 깃발을 대신할 것.”
애꾸는 의심스럽다는 듯 아이작을 바라보다가 단검을 꺼내 들어 감싼 천의 매듭을 끊었다. 천이 스르륵 흘러내리면서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이 나타났다.
이내 좌중 사이로 경악과 충격의 신음이 번져갔다.
“헤카틀리 마녀의 머리다. 얼마 전에 내 손으로 잘라 왔지.”
코 아래가 바스러지도록 밟은 탓에 엉망이 된 몰골이긴 했지만, 반을 나무, 반은 노파의 머리를 가진 커다란 머리통을 보고 애꾸는 할 말을 잃었다.
헤카틀리 마녀를 잡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추방하고 익사자 왕을 베었다. 리안나가 얼마나 강할지는 모르겠으나, 나 이상의 최선이 있을지 궁금하군.”
“하지만…….”
나왔다, ‘하지만’.
말로는 설득이 안 통하는 족속들이다. 하지만 훨씬 더 간편하고 쉬운 설득법이 있었다.
때로는 아이작도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서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정 마음에 안 든다면 엘릴께 판단을 맡기도록 하지.”
불만 있으면 나와서 덤벼 보라는 뜻이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업적이 바다를 건너오면서 얼마나 과장되고 널리 알려졌는지 알고 있었다.
따라서 마녀의 머리라는 강렬한 기선제압과 네필림의 카리스마가 더해지면 논쟁이 종료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귀족들이 벌떡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버의 아들, 호른 갤버드! 성배기사에게 도전을 청하오!”
“카르바너 중보병대장 달튼, 저명한 성배기사에게 가르침을…….”
‘이런.’
알데온 항구에 도착한 첫날 밤부터 연속 결투를 당했으면서도 엘릴 신도들의 광기를 얕봤다.
이 자들은 아이작의 실력을 얕봐서 덤비는 것이 아니다. 그와 칼을 겨룰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영광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아이작은 오늘 하루 종일 피곤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
“선봉은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총지휘를 맡으시는 데도 동의하더군요.”
“……고생하셨소, 성배기사. 가장 중요한 일을 그대에게 맡기게 되었군.”
“아닙니다. 제게도 필요한 경험이니까요.”
지휘권 통합은 사실 이번 내전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에델레드의 군대와 게오르크의 군대를 비교해 봤을 때, 숫자는 에델레드가 소집한 기사들이 훨씬 많지만, 게오르크 쪽은 질적으로 우수하고 사기도 높다. 지휘권 통합조차 안 한다면 부딪치자마자 산산조각 날 확률이 높았다.
‘결투를 통해 지휘권을 얻을 수 있다면 싼 거지.’
게르토니아 제국이었다면 더 어려웠을 것이다. 온갖 협상과 협박, 회유, 뇌물들이 오가고서야 겨우 같은 깃발이라도 올릴 수 있을 테니까.
엘릴 쪽이 단순하다면 단순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갈등의 여지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결투에 합류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회의에 참여하지 않던 귀족들이 있더군요.”
에델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소. 솔트아인이나 해안지대에 사는 귀족들이지. 솔트아인 변경백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도 있고. 그리고 믿기 힘들겠지만, 이 나라에도 비둘기파라는 게 존재하거든.”
정확히는 ‘현상 유지 지지자’라고 불러야 옳았다. 몇몇 귀족들은 이쪽도 저쪽도 편들지 않은 상태로 엘릴 왕국이 분열되어 있기를 바랐다. 알데온 왕가도, 게오르크 군벌도 괜히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그들을 내버려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귀족들은 세금만 내면 자기 영지에서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크게 네 갈래로 찢어져 있었을 뿐, 사실상 수백 개의 나라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그들은 솔트아인 변경백의 파벌로 분류되지. 테오 솔트아인은 생전에 복수 대신 독립을 선언했거든.”
엘릴 신앙을 버리지는 않겠지만, 왕가의 지배는 받을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아이작은 그 숫자가 귀족들 중 대략 1/3쯤 된다고 보았다.
숫자가 적지 않지만, 적극적으로 의견을 드러내지는 않는 조용한 파벌이다.
아무래도 솔트아인에서 벌어진 학살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그들은 그저 이 전쟁이 누군가의 승리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현상 유지를 바랄 뿐이다.
아이작은 세력 구도를 다시 정리했다.
국왕파인 알데온.
반역파인 게오르크.
중립파인 솔트아인.
솔트아인은 서쪽 끝에 있고, 게오르크 군벌의 중심이 되는 성지 엘리온은 동쪽에 있다. 솔트아인 쪽을 버리고 가기에는 뒤통수가 근질근질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로잘린드 부인이 보여주었던 그 모습을 보면 결코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의문은 로잘린드가 알데온을 방문한 시점에서 기묘해진다.
진짜 알데온에 현상 유지를 강요하고 싶다면 솔트아인에서 무력 시위를 하는 편이 낫다. 아무리 왕가라도 전선을 양쪽에 두고 싸우는 건 멍청한 짓이니까.
아이작은 기둥을 툭툭 두들기며 중얼거렸다.
“테오 솔트아인은 왜 소집령에 응하려고 한 걸까요?”
“음, 나도 잘 모르겠군. 아무도 그가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로잘린드 부인은 왜 여기까지 와서 자신의 증오를 드러낸 걸까요?”
단지 통합을 망치기 위해? 귀족들 앞에서 알데온 왕가의 치부를 드러내기 위해? 피해자였던 솔트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귀족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모두 가능한 일이었다. 로잘린드는 실제로 목숨을 걸고 이 짓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로잘린드는 그렇다 쳐도 다른 파벌들은 적극적으로 알데온 왕가와 맞서고 싶지 않아 한다. 바다 건너 있는 섬과 달리 그들은 알데온 왕가와 직접 부딪칠 수 있는 육지에 있으니.
즉, 로잘린드에게는 ‘성물 반납’이라는 명분 이상으로 알데온의 통합을 박살 낼 무언가가 있다.
그들은 그것이 드러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 아프군.’
당장 솔트아인을 경계하면서 게오르크를 어떻게 상대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민이 많았다. 솔트아인 파벌이 게오르크와 손잡고 알데온을 협공하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가능성이 낮은 일이니까.
진짜 걱정은 ‘고의적인 무능’이었다.
함께 게오르크를 공격하기로 해 놓고 갑자기 대열을 무너뜨리거나 후퇴하는 것만으로도 알데온 군을 치명적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 그런 소극적인 반항이 가장 가능성 높았다.
그래서 아이작은 만약의 보험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칼드부흐를 꺼내실 겁니까?”
에델레드는 아이작의 말에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성검 칼드부흐 말이오? 어, 당연히 가지고 가야 하지 않겠소?”
성검 칼드부흐. 엘릴이 쓰던 검 중 유일하게 남은 세 자루의 검 중 하나이자, 알데온 왕가 지하 보물창고에 보관 중인 검이었다.
다소 무방비하게 방치되어 있지만, 애초에 자격 없는 자가 쥐면 전신에 쥐어짜이는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건드리는 사람도 없었다.
이 성검 칼드부흐가 현재 소드마스터 하나 없는 알데온 왕가를 얕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성배기사를 믿긴 하지만 모든 위험을 성배기사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그리고 리안나도 성검 루미아드를 들고나올 거요. 우리도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비록 칼드부흐라는 이름에 맞지 않는 전장일지도 모르지만…….”
에델레드는 성검에 새겨진 이름의 뜻을 헤아리며 중얼거렸다.
정의라는 뜻의 칼드부흐.
명예라는 뜻의 루미아드.
성검과 성검의 대결이다. 게임이었다면 가슴이 웅장해졌겠지만 결국 내전이라는 비극 속에서 탄생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즐길 수만은 없었다.
‘성검 칼드부흐라도 에델레드가 리안나를 상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결국 리안나는 내가 상대해야겠는데…….’
성검들은 각각 특수한 능력이 있긴 하지만, 동시에 분열 예식처럼 강력한 의식용 촉매이기도 하다. 특히 칼드부흐에게는 일시적이나마 사용자에게 천사를 강신시키는 힘이 있었다.
인격을 가진 명천사는 아니고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기천사지만, 천사는 천사다.
그 힘을 얼마만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냥 강력한 검사가 되는 정도인지, 혹은 천사와 같은 힘을 발휘하는 정도인지가 달라진다. 하지만 왕처럼 자격 있는 자가 아닌 이상 어지간한 사람들은 거기까지 도달하기 전에 죽는다.
그러나 왕이라고 부담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강해진 근육의 힘을 뼈와 장기가 감당하지 못하고 으스러져 죽는 거였지, 아마.’
하지만 그 정도면 전쟁터에서 에델레드가 누군가에게 갑자기 살해당하거나, 성검을 누군가에게 빼앗길 염려는 없을 것이다. 리안나가 직접 회수한다면 모르겠지만.
아이작은 알데온 군의 가장 취약한 약점에 대한 걱정을 접어두고, 그다음 걱정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로잘린드 부인을 만나봐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