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당신의 정의를 보여 주소서 (3)
쾅쾅쾅! 한밤중에 갑자기 찾아온 에델레드는 얼떨떨한 얼굴로 아이작을 맞이했다.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
“성검 칼드부흐. 칼드부흐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야 성 지하 보물창고에…….”
“로잘린드 부인이 칼드부흐를 탈취할 생각입니다!”
그 말에 에델레드는 정신이 번쩍 든 표정이었다. 그는 상황 파악이나 논리적으로 따지기 전에 움직이는 게 우선이라는 것을 깨닫고 덥석 칼부터 붙들고 아이작과 함께 뛰기 시작했다. 엉겁결에 경호를 서던 알데온 기사들도 뒤따라왔다.
에델레드는 서둘러 달리면서 물었다.
“그, 성배기사, 로잘린드 부인이 칼드부흐를 탈취한다고 하셨소? 하지만 그 노인이 무슨 수로?”
칼드부흐는 성검 치고 소홀하게 보관되고 있긴 하지만 경비나 잠금장치, 함정 따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보물창고엔 늘 호위병력이 있으니까.
늙은이 혼자서 뚫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소드마스터 시드리크가 로잘린드 부인을 돕고 있습니다!”
“시드리크 경이? 아니, 하지만…… 로잘린드 부인이 칼드부흐로 뭘 어쩐단 말이오?”
칼드부흐가 소홀하게 보관되는 이유는 그것을 쥔 사람이 천사의 힘을 가지더라도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이다. 소드마스터라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늙은 로잘린드는 한순간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칼드부흐를 회수해두지 않으면…….”
아이작은 멈춰 섰다. 보물창고로 통하는 지하실 문 앞에 기사 둘이 쓰러져 있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바로 방금 전에 로잘린드와 시드리크가 지나간 것이다.
‘어떻게? 아, 젠장. 헤사벨 때문이군.’
헤사벨이 그의 의도를 알아낸 것은 좋았다. 하지만 시드리크 역시 여자에 약할 뿐이지 멍청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발설이 계획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바로 로잘린드와 함께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며칠 뒤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거사를 돌발적으로 실행한 상황이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시드리크가 보물창고에 침입한 거요?”
“그런 것 같습니다. 폐하는 여기 남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이작은 로잘린드가 이미 칼드부흐를 손에 넣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알데온 왕가에 원한을 품은 사람이 천사의 힘을 얻을지도 모르는데 에델레드를 데려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 같았다. 목표물을 배달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에델레드 역시 그 뜻을 알아차린 듯 굳어있었지만 이미 결심한 듯 걸음을 옮겼다.
“아니, 나도 가겠소.”
“폐하…….”
“칼드부흐는 왕가의 상징이오. 그걸 내가 회수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소? 이미 성배기사에게는 많은 빚을 졌소. 우리가 그대에게 더 많은 명예를 신세 지게 하지 말아주시오.”
엘릴 국왕으로서의 자존심이었다. 아이작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습니다. 대신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침묵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폐하를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겁니다.”
아이작은 다른 기사들에게도 따라오지 말도록 지시하고 접근을 차단하라 지시했다.
최악의 경우 촉수를 꺼내는 일이 생기게 될지도 몰랐다.
로잘린드가 복수에 찌들어 칼드부흐를 휘둘러대기 시작하면 아이작은 에델레드 한 사람도 지키기 힘들었다.
심지어 시드리크까지 상대해야 한다면 더더욱.
‘헤사벨, 에델레드를 지켜라.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넵.’
아이작은 엘릴 왕국의 거대한 보물창고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소드마스터는 얼마나 강한 존재인가?
강함이라는 것이 자로 잰 듯 딱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이작은 대략 인간과 천사 사이에 있는 초월적 존재라고 보았다. 단순히 노력만으로 달성할 수 없는 위치다. 소드마스터가 대부분 젊은 나이에 도달하는 경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리안나는 스무 살 초반이고, 시드리크 역시 많아 봐야 30대다. 아직은 아니지만 미래에 소드마스터가 될 에델레드 역시 게임에선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도달했다.
이런 정신 나간 재능은 다른 신앙에서 어지간해선 나타나지 않는다. 엘릴 신도들에게서만 쉽게 발현될 뿐이다.
재능, 축복, 노력, 운 모두가 합쳐져 태어난 존재.
그렇다면 이 소드마스터를 막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필요할까?
정답은 ‘막지 못한다’이다.
괜히 소드마스터들을 초월자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신의 힘을 빌려 기적을 발휘하거나 상급 검술을 익힌 기사들이 없다면 그들을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예상은 했지만 처참하군요.”
에델레드는 복도에 쓰러져 있는 병사들을 보며 신음했다. 병사들은 무기도 뽑지 못하고 당했다. 심지어 야간 경계를 서던 병사들이 휴식하던 대기실에서는 8명이 넘는 병사들이 저항도 못 하고 쓰러져 있었다.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흔들어 봐도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시드리크 특유의 기술에 당했으리라.
한밤중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이곳이 왕성의 중심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상황이 심각했다. 시드리크가 마음을 바꿔 먹고 에델레드의 목을 가져가기로 했으면 상황이 어찌 됐을지 모르니까.
“경계체제가 허술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엘릴 왕국은 암살과 첩보에 너무 약하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신뢰인지, 적의 명예에 대한 신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이작이 보기에는 반드시 뜯어고쳐야 할 문제였다.
“지난 긴 세월 동안 소드마스터가 이렇게 몰래 들어온 적이 없었소. 하지만 이런 침입에 대비한 봉인과 함정이 있으니…….”
아마도 ‘천하의 소드마스터가 왜 암살을 하나?’라는 생각이었겠지. 적어도 이 엘릴에선 상식에 가깝긴 할 것이다.
그러나 에델레드는 곧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난 유니콘 강철상을 발견했다. 거대한 철제문 옆에 놓인 이 강철상은 허락받지 않은 자가 접근하면 곧바로 살아 움직여 들이받는 신수였다. 하지만 예리한 단면은 마치 종이가 잘린 듯 조각나 있었다.
아이작은 전투의 흔적을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여기서는 조금 지체한 것 같습니다. 이런 타입엔 좀 애를 먹는 모양이군요.”
“하지만 소드마스터를 막을 정도는 아니군.”
아이작은 시드리크의 능력과 전투 스타일을 떠올렸다.
시드리크는 빠르고 날카로운 쾌검을 사용한다.
게임에서라면 몰라도 현실에서 그 쾌검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아이작은 자신이 시드리크를 압도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봤지만, 촉수를 쓰지 않는다면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사실 그는 아직 한 번도 그 정도 경지의 검사를 이긴 적이 없었으니까.
‘소드마스터를 쓰러뜨린다는 건 사실상 검술 쪽에서는 정점에 도달했다는 뜻이니…….’
아이작과 에델레드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지하에는 엄청난 규모의 보물 창고들이 여러 개의 방을 이루며 만들어져 있었다.
한때 패왕 엘릴의 시대에는 이 안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금은보화와 성물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초라하게 남은 빈 공간에 먼지만 날릴 뿐이었다. 패왕의 부귀를 자랑했던 거대한 창고는 이제 엘릴 왕국의 빈곤함을 알려 주는 표식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저기…….”
에델레드가 시야 끝에 들어온 뭔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긴장하며 앞을 보고 있던 아이작은 온몸을 긴장시켰다.
마지막 보물창고 한가운데, 성검 칼드부흐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이미 그 앞에는 소드마스터 시드리크와 로잘린드 부인이 함께 서 있었다.
***
아이작은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로잘린드는 칼드부흐에 손을 대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가 마음먹는다면 언제든 검을 쥘 수 있는 위치였다.
“로잘린드 부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지 마십시오.”
로잘린드는 물끄러미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옆에 있는 시드리크에게도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시드리크 경, 그쪽도 함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 말에 시드리크는 흥미롭다는 듯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 이름 높은 성배기사시군. 미안하지만 내게 명령할 수 있는 것은 내 고용주뿐이다.”
“칼드부흐에 손대면 바로 그 고용주가 죽을 거요. 그럼 당신은 뒷감당할 수 있고?”
그러나 그 말에 시드리크는 오히려 웃었다. 그는 슬쩍 로잘린드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음,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칼드부흐를 함부로 휘두르면 수명이 줄어든다는 건 알고 있거든. 만약 로잘린드 부인께서 칼드부흐를 들고 왕성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을 다 죽여버리겠다는 목적으로 왔다면 난 돕지 않았을 거야.”
“……그럼 칼드부흐에 손대지 않겠다고?”
그럼 대체 왜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아이작은 순간 에델레드를 떠올리고 앞을 가로막았다.
시드리크는 이미 칼을 뽑은 상태였다. 소드마스터 정도 된다면 바로 전투가 시작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에델레드를 유인하는 게 목적이었나? 주변의 방해가 없는 상태에서 왕을 죽이려고?
하지만 시드리크는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암살이 목적이었다면 에델레드를 유인했겠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헤사벨이 시드리크를 만났기에 돌발적으로 벌어진 상황이야.’
그때 시드리크의 시선이 에델레드의 곁으로 향했다.
아이작이 앞을 가로막으면서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헤사벨이었다.
헤사벨을 본 시드리크는 이내 흠칫하며 분노한 표정을 했다.
“너!”
헤사벨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침착하게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에 시드리크는 한층 더 분노했다.
“인제 와서 나를 유혹한다고 내가 넘어갈 것 같으냐! 나는 명예로운 엘릴의 소드마스터다! 이런 유혹의 고난 따위에 굴하지 않아!”
아이작은 잠시 말을 잃고 있다가 슬쩍 헤사벨을 돌아보았다. 헤사벨 역시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아이작에게 속삭였다.
“저 아무것도 안 했어요.”
“알아. 저쪽이 제정신이 아닌 거겠지.”
“조용히 해라, 이 숙녀!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날 굴복시키려 해도 소용없다!”
헤사벨은 슬쩍 시드리크를 떠보았다.
“시드리크 경, 우리 칼은 내려놓고 대화하면 안 될까요? 소드마스터의 칼 앞에서 대화하는 건 너무 무서워요…….”
“이번만이다!”
시드리크는 헤사벨에게 엄포를 놓으며 칼을 칼집에 다시 넣으려다 로잘린드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고서야 멈춰 섰다. 시드리크는 자신이 또 한 번 유혹에 넘어갔다는 사실에 분개했지만, 그 분노를 표출할 기회를 놓쳤다.
에델레드가 앞으로 나선 것이다.
“로잘린드 부인.”
에델레드는 손에 아무것도 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며 양팔을 벌리고 걸어갔다. 물론 허리춤에는 칼을 차고 있었지만, 소드마스터 앞에 빈손으로 나간다는 것은 목을 내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잠깐.”
아이작과 시드리크 모두 일단 에델레드를 멈춰 세웠다.
둘은 이미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에델레드가 한 발짝이라도 잘못 내디디면 바로 싸움이 벌어질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싸우는 것은 아이작도 시드리크도 바라지 않았다.
에델레드는 어정쩡한 거리에 멈춰서서 로잘린드에게 호소했다.
“부인. 저는 부인이 알데온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를 거쳤는지 압니다. 그래서 저는 부인을 빵과 포도주로 환영하고 그 결심에 호응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
“제 믿음을 배신했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가 주십시오. 그리고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화해할 방법을 찾아봅시다. 이런 축축하고 어두운 지하는 화해를 논할 자리가 아닙니다.”
“왕.”
로잘린드는 비스듬하게 서서 에델레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증오보다는 피로가, 피로보다는 권태가 깊게 쌓여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찌들어서 권태가 되어 버린 증오가.
“알데온에 오겠다는 결심은 내가 아니라 내 남편이 했었소. 그러니 그대의 찬사를 들을 사람도 내 남편이지.”
“……테오 솔트아인 변경백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내 남편, 테오는 왕가와 화해하고 싶어 했지.”
지금 왕이라면 과거의 비극에 대한 사과를 듣고 화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찌든 증오와 과오를 청산하고 다시 평화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내 남편은 바닷길에서 죽어버렸지. 원래부터 오늘내일하던 양반인데, 바닷길은 보통 험한 게 아니거든.”
로잘린드는 흐린 눈으로 어둠 저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허공뿐이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로잘린드는 이 자리에 반드시 오고 싶어 했던 자신의 남편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비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늦었소, 왕?”
“부인…….”
“1년, 아니 1달이라도 빨랐으면 내 남편은 사과를 받았을지도 모르오.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다 죽어가는 몸으로 파도를 맞으면서 알데온에 도착하길 기다리던 그이는 화해하기 전에 죽었소.”
로잘린드의 눈이 번뜩였다.
찌들었던 권태가 다시 증오로 부글거리며 느리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가지고 있던 복수의 권리는 내가 승계받았소. 이제 나는 정당하게 분노할 권리와 복수할 권리가 있소. 하지만 나는 내 남편만큼 인격자가 못되더군. 그래서 그대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었지.”
그녀의 몸이 크게 움직였다. 아이작은 발작적으로 루앗딘 열쇠를 뽑아 들었지만 로잘린드의 손이 칼드부흐 근처에서 머무는 것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로잘린드의 시선이 아이작에게로 꽂혔다.
“성배기사! 내게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을 원하느냐 물었지?”
“……그랬지요.”
“나는 나로부터의 구원을 원하오.”
아이작은 피를 토할듯한 로잘린드의 목소리를 들었다.
핏발이 터지기 시작한 로잘린드의 새빨간 눈이 아이작과 에델레드, 이 보물창고를 넘어서 세상으로 향했다.
“이제 그만 내가 나의 분노와 증오에 휘둘리지 않게 해줄 구원을 바라오.”
로잘린드는 시선을 돌려 시드리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두 사람은 칼드부흐에 손을 얹었다. 아이작이 튀어 나가려 한 순간, 그는 상대의 손 모양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을 잡고 휘두르기 위한 자세가 아니었다.
아이작은 뒤늦게 칼드부흐의 다른 용도를 떠올렸다.
훌륭한 성물은 훌륭한 의식용 도구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드마스터는 훌륭한 검사인 동시에, 훌륭한 사제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찬송하듯 노래를 불렀다.
[엘릴! 당신의 분노를 노래하소서.] [이 땅에 당신의 정의를 보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