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73)
173화. 당신의 정의를 보여 주소서 (4)
“안돼……!”
찬송이 시작된 순간 에델레드는 뛰쳐나가려 했지만 헤사벨이 붙들었다. 지하 보물창고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콰두두두! 서 있기조차 힘든 격렬한 지진이었다. 바닥에 꽂혀있던 칼드부흐가 위로 솟구쳐오르기 시작했다. 칼드부흐가 뽑혀 나오는 진동만으로 성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아이작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칼은 시드리크가 있는 공간을 허무하게 갈랐다. 마치 그곳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미 의식이 시작된 순간 이 일대는 정상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이곳은 ‘심판’을 위한 공간이었다. 아이작과 헤사벨, 시드리크는 순식간에 어떤 개입도 할 수 없는 방청객에 불과한 입장이 되었다.
“무슨, 무슨 의식을 치른 겁니까?”
경험이 없는 에델레드만이 당황하며 주저앉아 있었다.
아이작은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심판의 의식입니다.”
“심판의 의식?”
“신께 정의를 청원하는 겁니다. 비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지상의 권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을 때 신에게 억울함을 탄원하는 거죠.”
아이작은 시드리크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로잘린드 부인은 훌륭한 검사가 아니라 훌륭한 사제가 필요했던 거군요.”
사람의 규칙과 판단으로 정의를 구할 수 없을 때.
목숨을 걸고서라도 전능한 존재에게 판단을 구하고 싶을 때.
그때 사람들은 신을 찾으며 정의를 탄원한다.
그게 바로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심판의 의식이었다.
이런 의식은 아홉 신앙 모두에 존재한다.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하는 것도 이 심판 의식의 간이 버전이다.
이러한 간단한 의식은 불운이 닥치거나, 병에 시달리거나, 심해봤자 죽어서 지옥에 가는 정도다. 그러나 로잘린드가 벌이는 의식은 그 엄중함도 심각성도 달랐다.
지금 의식은 신, 혹은 천사에게 직접적인 개입을 요청하는 것과 같았다.
‘군인이 직속 간부가 아니라 곧바로 국방부에 민원을 제기하는 정도의…… 아니, 제길. 내가 무슨 생각을.’
가당찮은 비유를 떠올렸지만 이보다 적당한 비유도 떠오르지 않았다.
툭, 투툭. 투투툭…….
어디선가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깊은 지하에서 느껴질 리 없는 청량한 숲의 내음과 은은한 바람, 그리고 낙엽들이 지하 곳곳에 흩날렸다.
아이작은 칼드부흐가 있던 자리에서 익숙한 기척을 느꼈다.
우르반수스의 기운이었다.
엘릴의 주관하에 영원한 전쟁과 영광을 쟁취하는 크리스탈 전장이 저 너머에 있었다. 아이작이 손가락에 낀 크리스탈 반지가 전장의 열기에 호응하듯 부르르 떨렸다.
흩날리는 낙엽 속에서, 이내 녹색의 갑옷을 입은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3m에 이르는 거대한 키에 양손검인 칼드부흐를 마치 한손검처럼 쥐고 있었다.
몸에 걸친 녹색 갑옷엔 고목의 줄기 같은 무늬가 불규칙하고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등 뒤로는 바로 그 고목이 피워올렸다가 흘려보낸 듯한 낙엽의 날개가 망토처럼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낙엽들은 숨을 쉬듯 느리게 출렁였고, 그때마다 숲속의 바람이 밀려왔다.
천사가 왔다.
엘릴과 함께 전장의 적들을 살육하던 진짜 전투 천사가.
***
로잘린드는 더 이상 분노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유지를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에델레드를 용서할 만큼 관대하지는 못했고, 그 복수를 실행할 만큼의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에 또 절망했다.
억누를 수 없는 분노, 남편에 대한 연민, 해소될 수 없는 원한, 정당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에 대한 증오, 스스로의 나약함에 대한 절망…… 로잘린드는 그 갈데없는 감정에 좀먹히고 있었다.
그녀는 이 감정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말 그대로, 그녀는 구원을 바랐다.
자신으로부터의 구원.
그래서 그녀는 모순적이고 복잡한 고뇌에 시달리는 대신,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에게 심판을 대신 맡기기로 했다.
절망 끝에 치달은 결론이었다.
그러나 현명한 판단은 아니었다.
‘미친 짓이지.’
아이작은 녹색 기사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심판 의식은 만능이 아니다. 불만이 생길 때마다 신에게 연락해서 저 새끼 좀 죽여 달라고 하면 세상에 사람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신에게 정의를 청원하기에 부족한 이유로 심판 의식을 진행했다면, 그 즉시 지옥에서 불타는 것은 청원 당사자다.
설령 충분히 억울하다 느껴져서 청원이 받아들여지더라도, 청원자는 알 수 없는 천사와 신들의 기준 아래 판결이 내려지기도 한다. ‘정의’가 아니라 신앙과 교리의 질서, 혹은 필멸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계획의 방향성을 따라 정해지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이 청원자에게 부당하게 느껴지더라도 그에게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심판에서 결정된 일은 그 신앙의 신도들에게 절대적인 것이니까.
후욱.
아이작은 밀려오는 바람에 가까스로 호흡을 골랐다.
천사의 압도적인 존재감은 몇 번이나 천사와 맞서본 아이작도 견디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일반인인 에델레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에델레드는 완전히 주저앉은 채 멍하니 녹색 기사를 바라보았다.
녹색 기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로잘린드를, 그리고 에델레드를 응시했다.
아이작이나 헤사벨, 시드리크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역시 기천사로군.’
로잘린드는 칼드부흐에 빙의되어 있는 천사를 불러내 정의를 탄원한 것이다.
기천사(基天使, Basic Angel).
신들이 그저 어떤 기능을 위해 만든 존재.
감정이 있고 배신까지도 저지르는 명천사와 달리, 기천사는 신성한 기계 생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역할에 맞게 움직이는 천사였다. 온전히 신의 권능으로 만들어지는 만큼 부담도 적지 않지만, 기능에 딱 맞춰 만들어지기 때문에 얼마나 강한지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칼드부흐를 쥐었을 때 부여된다는 천사의 힘. 바로 그 힘이 이 천사에게서 나오는 것일 가능성이 높은 만큼, 약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천사시여, 저는…….”
가까스로 압력을 이겨낸 로잘린드가 탄원하려 한 순간 녹색 기사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로잘린드는 숨통이 막히는 기분을 느끼며 침묵했다.
녹색 기사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로잘린드를 내려다보았다.
“청원자의 탄원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다.”
어딘가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듯한 간지러운 목소리였다. 날개만이 아니라 갑옷 안의 몸까지도 낙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 로잘린드는 핏발 선 눈으로 녹색 기사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 묻고 싶군. 그대가 탄원하고자 하는 대상이 엘릴의 왕이라는 건 알고 있는가?”
아이작은 끼어들고 싶었지만, 오직 심판이라는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그때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을 떠올렸다.
모든 질서를 깨뜨리고 스며드는 혼돈.
정해진 질서 대신 무정형의 혼란을 부여하는 혼돈에게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규칙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아이작은 왼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촉수가 느리게 그의 손바닥을 뚫고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이작이 어떻게든 구속을 깨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이, 녹색 기사는 계속해서 심판을 진행했다.
로잘린드는 겨우 대답을 허락받고서야 녹색 기사의 질문에 답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엘릴의 왕은 엘릴의 가장 으뜸가는 신도로서 내 힘을 사용하도록 허락받았다는 것을 아는가?”
“그것이 제 억울함을 증명하는 데 문제가 됩니까?”
로잘린드는 얼마나 입술을 깨물었는지 피가 흐르는 입으로 천사를 향해 쏘아붙였다.
“문제가 된다면 저를 이 자리에서 쳐죽이십시오. 엘릴이 주관하는 전장에 개로 만들어 내던지십시오. 군마에 짓밟히더라도 저는 짖기를 멈추지 않을 겁니다.”
일흔 먹은 노인이건, 눈이 없건, 팔이 없건, 그건 상관없다. 엘릴 신도들은 죽기 전이나 죽은 후나 전사다.
로잘린드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엘릴의 신도였으니까.
그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로잘린드의 말에 녹색 기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전사로군.”
녹색 기사는 고개를 돌려 에델레드를 바라보았다.
“나는 청원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스스로 문제를 극복할 것이 아니라 신께 쪼르르 달려와 고자질하는 애새끼 같아서.”
스륵. 어느새 그의 손에는 칼드부흐가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대를 전사로 인정하고 청원을 받아들이겠다.”
청원자라는 최소한의 조건을 인정받았다는 뜻이었다. 로잘린드는 간신히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식은땀을 훔쳤다. 녹색 기사는 이내 에델레드를 향해 다가갔다.
‘이거 안 좋은데.’
에델레드는 솔직히 모범적인 엘릴 신도라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탁월하게 강하지도 않고, 용기와 명예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런 것들에 매여 멍청한 짓을 하는 기사들을 혐오한다. 청원과 관계없이 천사의 눈에 거슬릴 수도 있었다.
녹색 기사는 에델레드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일어나시오, 왕이시여. 비록 피고의 입장이나 그대는 엘릴의 왕이오.”
녹색 기사의 말은 부탁이라기보다 명령이었고, 명령보다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었다. 에델레드는 비실거리면서도 일어섰다. 녹색 기사는 투구 속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움직이며 에델레드를 들여다보았다.
아이작은 로잘린드의 탄원을 생략했던 것처럼, 에델레드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촉수는 심판의 공간을 끊임없이 침식하고 있었지만, 충분히 빠르지 못했다.
아이작의 눈이 번뜩이며 다른 쪽으로 향했다.
심판 의식이 이미 시작된 이상 진행은 천사의 힘으로 유지된다. 하지만 사제를 방해한다면 최소한 천사의 이목을 끌 수는 있었다.
쾅. 아이작은 바로 시드리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시드리크는 소드마스터답게 바로 아이작의 적의를 알아차리고 재빨리 대응했다.
“멈춰!”
휘리릭, 까가가가각!
칼을 휘두르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아직 시드리크와는 한참의 거리가 있었지만, 그의 검날은 아이작의 곁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가 꺼내 든 것은 얇은 레이피어 한 자루였다.
시드리크는 분노한 얼굴로 아이작에게 쏘아붙였다.
“이는 신성한 재판이다! 이단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그래, 나는 여기서 이단이지.”
아이작은 으르렁거리며 중얼거렸다.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서뿐만이 아니라 세상 어디서도 이단이었다.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그는, 그렇기 때문에 어디서도 규칙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이 결정은 내게 신성하지도 존엄하지도 않아. 내 앞을 막으면 너도 같이 죽여주마.”
***
아이작의 우려대로 판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델레드를 들여다보던 녹색 기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선왕의 죄악을 억울하게 뒤집어쓰고 청원을 당한 억울한 자여. 엘릴께서는 부모의 죄악을 자식에게 계승시키는 것을 인정하지 않소. 그러나 왕의 자리는 단순한 개인의 부모 자식 간이 아닌 백성과 기사들의 어버이를 대표하는 자리. 책임을 피할 수는 없소.”
녹색 기사는 천천히 로잘린드를 다시 돌아보았다.
“왕은 청원자의 탄원에 책임져야 하오. 다만, 청원자 역시 억울한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쿵. 녹색 기사는 칼드부흐를 바닥에 내리찍으며 선언했다.
“둘 다 명예롭게 죽을 수 있도록 처형에 처하겠소. 이는 엘릴의 대리자의 결정이오.”
녹색 기사의 선언에 로잘린드의 얼굴에 희망인지 절망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이 요동쳤다. 목숨이 아까워서 느낀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비로소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감정 때문이었다.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그녀는 목멘 목소리로 받아들이겠노라 선언하려 했다.
“아니, 아닙니다.”
그때 에델레드가 흐느끼며 입을 열었다.
“신하의 잘못은 왕의 부덕입니다. 왜 왕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신하에게도 넘기려 하십니까? 이는 엘릴의 뜻이 아닙니다.”
에델레드는 휘청거리다가 녹색 기사 앞에 다시 무릎 꿇고 주저앉았다.
“청컨대 책임질 목 하나로 이 비극을 끝내주십시오. 저는 준비가 됐습니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녹색 기사는 에델레드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엘릴 신도답지 않은 태도와 불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델레드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에델레드의 말에 녹색 기사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세상은 그렇게 말랑말랑하지 않습니다. 왕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