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75)
175화. 당신의 정의를 보여 주소서 (6)
천사를 상대하게 된 순간 아이작은 적당히 하겠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천사들조차도 같은 천사를 상대할 때에는 결코 방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강물처럼 맥동 치며 몰아닥친 저 너머의 색채가 순식간에 아이작과 녹색 기사를 감쌌다. 녹색 기사는 자신을 둘러싼 색채의 기운을 느끼고 투구 안의 눈빛을 불태웠다.
“이놈, 혼돈의 권속이구나! 감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약간 반가운 반응이군.’
지금까지 만났던 천사들은 모두 아이작의 걱정과 달리 그럭저럭 용납해 주거나 오히려 같은 편을 먹으려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이 정석적이면서도 틀에 박힌 듯한 천사의 반응이 반갑기까지 했다.
엘릴의 특성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적은 적이다.
상대를 죽이고 나는 살아남는 것.
아이작은 그 담백함이 마음에 들었다.
쿠르르르르!
아이작이 불러낸 저 너머의 색채는 안개처럼 주변을 감싸고도 용틀임을 하며 거대한 뱀처럼 녹색 기사를 향해 몰아닥쳤다. 다만 색채가 품은 물리력으로는 녹색 기사의 갑옷에 흠집 하나 내기 힘들었다. 색채가 속삭이는 환각과 환청조차도 천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잔수작 부리지 마라!”
녹색 기사가 노성을 터뜨리는 것만으로도 색채의 안개에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아이작은 그 공간 사이로 뛰어들었다. 조금이라도 틈새를 만들 수 있도록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이작의 목적이었다.
콰드드득, 콰가각. 여덟 갈래의 궤적이 사납게 녹색 기사를 물어뜯었다.
낙엽 날개가 거칠게 펄럭이며 사방으로 흩날렸다. 아이작의 검기가 사납게 포효했다.
그러나 녹색 기사가 칼드부흐를 횡으로 휘두른 순간, 아이작이 검기로 만들어 낸 ‘여덟 갈래’가 조각조각 찢겨 나갔다.
아이작은 그 충격파에 한참이나 뒤로 밀려났다.
‘미친.’
각오하긴 했지만 역시나 아득한 힘이다. 그나마 반가운 점은 녹색 기사의 갑옷에 상처라도 남겼다는 부분이었다. 검기에 담긴 기운은 우르반수스의 존재인 천사에게도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의 검술 실력이 아무리 성장했다 해도 검술만으로 엘릴의 천사를 꺾기에는 무리였다.
‘놈은 소환된 입장이다. 그러면 다시 돌려보내는 걸로 충분해.’
시드리크는 기절했고, 기천사에 불과한 녹색 기사는 칼드부흐에 담긴 힘을 뽑아 쓸 뿐이다.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성검 칼드부흐를 보호하고 사용자를 보좌하는 것. 성검이 파손될 정도로 싸울 수는 없으니 위기에 처한다면 기능에 충실하게 돌아갈 것이다.
‘그때까지 버틸 수 있다면 말이지만.’
아이작의 생각이 길어진다고 녹색 기사도 같이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있진 않았다. 녹색 기사는 별다른 전조도 없이 칼드부흐를 휘둘렀다.
바람이 몰아닥쳤다. 순간 아이작은 온 사방에서 적의를 느꼈다.
세상 만물이 아이작을 향해 살의를 품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은 살의는 점이나 선이 아닌 바다였다. 아이작은 그 안에 이미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주변에 흩날리던 바람과 낙엽, 먼지 따위들이 아이작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큭……!”
바랜 낙엽, 스치는 바람 한 줄기에도 아이작을 죽이고자 하는 살의와 검기가 담겨 있었다.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몇 초 지나기도 전에 다진 고기 같은 꼴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작은 아득해지는 기분 속에서 크리스탈 비석 조각을 발동시켰다.
한 발짝만 잘못 내디뎌도 죽을 수 있는 생사의 기로 속에서, 아이작은 어떤 일련의 동작을 흉내 냈다. 연습할 틈도, 녹여 낼 틈도 없었으며 그 안에 담긴 철학이나 미학도 이해하지 못한 채였지만 아이작은 크리스탈 반지의 힘으로 그 동작을 완벽하게 모방했다.
그리고 어떤 모방은 원본을 넘어서기도 한다.
쩌억. 저 너머의 색채가 단숨에 아이작의 몸을 중심으로 강하게 수축했다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퍼버버벅. 녹색 기사는 재빨리 칼드부흐를 내려쳐 몰아닥치는 검기의 폭풍을 막아 냈다.
아이작의 몸을 중심으로 저 너머의 색채들이 고슴도치처럼 수천 개의 가시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즉발적이었지만 시드리크의 상급 검술을 흉내 낸 것이다. 그의 검기는 주변에 살기를 품은 모든 것을 찔러 버렸기 때문에 바람은 순식간에 멎고 낙엽들은 성한 것 없이 바스러져 내렸다.
‘빌어먹을.’
색채가 다시 액체처럼 무너져 내리다가 안개가 되어 피어올랐다. 아이작은 파르르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타인의 상급 검술을 완전히 자신의 검술에 녹여 내지 않고 겉껍질만을 흉내 내는 것은 아이작에게도 부담이 컸다. 그나마 색채의 도움을 받아 성공적으로 쓸 수 있었다.
아이작의 눈이 번뜩였다. 녹색 기사는 아이작이 무언가를 한다고 느낀 순간, 다시 정직하게 달려드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녹색 기사는 이미 아이작의 수준을 가늠했다. 그의 성취는 놀라울 정도지만 천사인 자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방심하지도 않았다. 혼돈의 권속들은 늘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드러내곤 했으니.
그래서 그는 사방에 흩뿌려진 색채 속에서 촉수들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을 때, 놀라지도 않았다. 마치 덩굴처럼 기어오른 촉수들이 녹색 기사를 움켜쥐고 찢어발기기 위해 당겼다.
그러나 녹색 기사가 낙엽 날개를 펄럭이며 칼을 휘두른 순간, 촉수들이 터져나갔다.
“감히 불손하게 엘릴의 천사에게 맞서려 드느냐!”
“불손한 건 네놈이고.”
아이작은 터지고 끊어지는 촉수들 사이에서 이를 악물고 루앗딘 열쇠를 휘둘렀다.
“나는 혼돈의 대리인이다!”
그러나 녹색 기사는 이미 자신의 몸을 속박하려던 촉수를 모두 끊어 낸 상태였다. 그는 아이작의 교만함을 비웃으며 그의 머리를 조각내기 위해 칼드부흐를 내려쳤다. 루앗딘 열쇠는 강력한 성물이지만 칼드부흐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한다.
루앗딘 열쇠와 아이작을 동시에 두 토막 낼 만한 힘이 쇄도해 왔다.
쾅! 굉음과 함께 칼드부흐의 칼날이 아이작의 왼팔을 갈랐다.
“……!”
녹색 기사는 다음 순간 벌어진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작은 내려치는 칼드부흐를 향해 마치 방패처럼 왼팔을 내밀었다. 칼과 몸통을 양단 낼 생각으로 내려친 검이었으니, 고작 살덩이에 불과한 팔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아이작의 팔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아니, 아가리를 벌렸다.
콰드드득. 아이작의 왼팔이 갈라지면서 터져 나온 촉수가 칼드부흐를 집어삼켰다. 경악스러운 모습에 녹색 기사는 경악했다.
아이작은 그 짧은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예정대로 오른손에 든 루앗딘 열쇠로 녹색 기사의 목과 가슴받이 사이의 빈틈을 찔렀다.
파스스…… 허무하게 나뭇잎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당초 녹색 기사에게 정상적인 육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앗딘 열쇠에는 다른 기능이 있었다.
“불조심해야지.”
화아아아악! 루앗딘 열쇠에서 불꽃이 터져 나오면서 녹색 기사의 갑옷 안의 메마른 낙엽 속에 불이 붙었다.
물론 평범한 불은 녹색 기사에게 타격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루앗딘 열쇠의 불꽃은 달랐다.
그것은 우르반수스의 열기를 투영하는 불꽃이었다. 온 사방이 혼돈의 짐승들로 가득해도 차단하고 막아 낼 수 있는 강력한 열기. 그 일부만으로도 녹색 기사가 불타오르기에는 충분했다.
“…….”
녹색 기사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므로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패배를 직감할 수 있었다. 루앗딘 열쇠의 불꽃이, 그리고 칼드부흐를 휘감은 촉수가 그에게 끊임없는 영적인 타격을 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칼드부흐였다. 그의 기능은 칼드부흐를 지키는 것이었으므로, 지금도 칼드부흐가 부러지거나 다치지 않게 끊임없이 힘을 소모하고 있었다. 현실에 물리적 실체를 가지고 머무를 수 있게 해주는 힘까지도.
툭, 투툭.
녹색 기사의 갑옷이 바닥에 떨어져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녹색 기사는 불타는 투구 안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을 흩날리며 아이작에게 속삭였다.
“전사로군.”
***
아이작은 녹색 기사가 사라지자마자 간신히 한숨을 토해 내며 주저앉았다. 천사 본인보다 칼을 공략한다는 전략은 통했지만, 타격이 컸다.
강렬한 허기와 고통이 밀려 들어왔다. 서둘러 저 너머의 색채를 돌려보내고 에델레드의 상태를 살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파슥, 파스슥…… 아이작은 힘겹게 왼손이 원래 형태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녹색 기사의 일격을 왼손으로 막아내는 것은 도박수에 가까운 미친 짓이었다. 아무리 촉수가 강하다 한들 그건 필멸자 레벨의 이야기지, 천사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겼군.’
촉수를 사용하긴 했지만 무려 1:1로 전투 천사와 맞서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나 익사자 왕과는 다른 정상적인 컨디션의 맞대결이었다.
아이작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실감했다.
물론 대가는 컸지만.
아이작의 왼팔은 너덜너덜한 수준으로 찢어져 있었다. 촉수가 그대로 사라진다면 즉시 출혈로 의식을 잃을 게 뻔했다.
아이작은 일단 칼라일 성해포로 팔을 감쌌다. 그리고 바로 촉수를 돌려보내지는 않았다. 적어도 회복할 때까지는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게 좋아 보였다.
‘이 고생을 하고도 얻은 게 없다니.’
아이작은 바닥에 널브러진 칼드부흐를 보면서 원통하게 생각했다. 칼드부흐는 왕가의 상징이나 다름없으니 자신이 가져갈 수도 없었다.
그때 아이작은 바닥에 흐트러진 크리스탈 조각들을 발견했다.
엘릴 신앙의 천사나 신수를 잡을 때마다 흘리곤 하는 우르반수스의 흔적들이었다. 그것을 본 아이작의 눈이 반짝이며 서둘러 주워 담았다. 이정도 양이라면 타천사 못지않게 귀중한 가치가 있었다.
‘이거라면 유용하게 쓸 수 있지.’
크리스탈 반지는 몇 번 쓰지도 않았는데 벌써 색이 바래 가고 있었다. 앞으로 많아 봐야 두 번 내지는 한 번이 끝일 것이다. 하지만 이 크리스탈 비석 조각이라면 사용횟수를 보충할 수도 있고, 아니면 더 유용한 아이템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에델레드가…….’
아이작은 크리스탈 조각을 주워 담고 색채를 흐트러뜨렸다. 에델레드가 휩쓸리지 않도록 떨어진 곳에서 싸우는 주의를 기울이긴 했지만 워낙에 싸움이 치열하다 보니 크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저 운이 나쁘지 않길 바라야 했다.
“이런.”
아이작은 주변의 풍경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천사와 성배기사의 싸움에 휩쓸린 유서 깊은 보물창고는 이미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
먼저 의식을 되찾은 것은 로잘린드였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매캐한 먼지 속에서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의 아래 깔린 에델레드를 발견했다.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그 기괴한 어둠에 휩싸였을 때, 의지할 것을 찾다가 그렇게 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로잘린드는 무너지는 지하의 잔해 속에서 에델레드를 보호한 모습이 되었다.
그녀는 멍하니 에델레드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품 안에 들어온 무방비하고 약한 생물.
엘릴의 왕이지만 칼질 한 번이면 복수를 마무리하고 알데온 가의 저주받은 씨앗을 끝내는 것도 가능하다. 에델레드는 아직 자식이 없으니까.
로잘린드는 홀린 듯이 품 안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저 칼질 한 번이면.
단검의 날은 칼드부흐 못지않게 충분히 날카로웠다.
단검이 말하는 것만 같았다.
정의를 청구하고 싶다면 신에게 호소할 것이 아니라 네 손으로 쟁취해라…… 아니면 오늘 이 자리에서 영원히 포기하든가.
‘테오.’
로잘린드는 속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
죽은 남편이 뭐라고 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단검을 다시 내려놓았다.
로잘린드는 지금 에델레드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용서하기로 했다.
그 순간 그녀는 몸 깊숙한 곳 어딘가에 응어리져 있던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예상보다 더 좋은 기분이었다.
로잘린드는 에델레드를 깨워 보려 했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에델레드를 들쳐 업었다. 아이라곤 하지만 거의 다 큰 아이였다. 쇠약해진 몸으로 먼지투성이에, 기절한 남자애를 업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악다구니 속에 로잘린드는 간신히 에델레드의 팔 한쪽을 어깨에 둘렀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그때서야 로잘린드는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이작이 황망한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굴속을 헤매다가 드디어 마주친 햇빛 같았다.
로잘린드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구경만 하지 말고 내려와서 좀 도와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