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76)
176화. 전쟁이 다가오는 소리 (1)
보물창고는 난장판이었지만 모르스가 지상에서 병사들을 데리고 내려오면서 빠르게 수습되었다. 아이작이 접근하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왕이 함께 내려간 상황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상황이 종료된 뒤에 왔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에델레드와 로잘린드가 적당히 입만 다물어 준다면.’
아이작은 자신의 싸움을 돌이켜보며 생각했다. 결정적인 녹색 기사와의 싸움은 색채로 감싸고 싸운 덕분에 드러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심판을 위한 공간을 깨뜨리느라 손을 변형시켰던 것이 걸렸다.
둘 다 그럴 정신은 없던 것 같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또 하나 있었다.
“시드리크 경은 못 찾았나?”
“네…….”
헤사벨은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투가 끝난 후 헤사벨은 그를 완전히 제압하려 했지만, 아이작과 녹색 기사의 싸움으로 천장이 붕괴한 사이 놓치고 말았다. 아이작은 어차피 시드리크를 죽이지 않는 이상, 헤사벨이 제압하긴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피로 쓴 글이 남겨져 있던데요.”
“글?”
아이작은 헤사벨이 가리킨 자리를 보았다. 흘러나온 피로 적은 듯한 글귀는 마치 저주의 경고처럼 처참했다.
“……다시 보자고?”
“복수하겠다는 뜻일까요?”
아이작은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봤지만, 시드리크가 보여 준 태도를 보았을 때 다른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다. 어쩌면 자신이 아니라 헤사벨을 향한 글귀일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생각이었지만 아이작은 다음에 이 소드마스터를 다시 만나게 되면 길들일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소속이 이미 있거나 정신 나간 소드마스터를 제외하면 곁에 둘 만한 자유로운 소드마스터는 시드리크뿐이었다. 솔트아인 섬에는 더 이상 소드마스터가 필요 없을 테니까.
아이작은 로잘린드와 에델레드가 업혀서 나가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
“솔트아인에 자치를 허락하려고 하오.”
에델레드는 침대에서 자신을 둘러싼 신하들에게 말했다. 모르스를 비롯한 귀족들은 술렁이며 동요했지만, 아이작만은 조용히 있었다.
이미 예상했던 말이었다. 아니, 그가 제안한 건이었다.
솔트아인과 엘릴 왕국은 같은 언어, 같은, 신앙을 공유하지만 아무래도 멀리 떨어진 돌섬이다보니 독자적인 문화와 역사로 괴리가 있다. 더군다나 불과 몇 년 전에 대학살에 가까운 일을 벌였으니 무작정 합병을 고집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이작은 엘릴 왕국에 이전에 없던 형태의 평화를 제안했다.
“폐하, 솔트아인에 자치를 허락하면 반란 분자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그래서 그들에게도 자치를 허락할 생각이오.”
에델레드는 신하들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엘릴 왕국은 연합왕국이 될 것이오.”
엘릴 연합왕국.
강력한 왕권을 제안했던 아이작의 말과 반대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병권과 신권만 장악하면 충분한 통합력을 얻을 수 있다. 최선은 아니겠지만 엘릴 신앙을 유지하면서 평화를 만들 유일한 방법이었다.
엘릴의 왕은 엘릴의 대리인으로 인정받고, 기사들은 오로지 왕에게만 충성한다. 그 외 자치령들은 자신들만의 문화와 제도를 유지한다.
물론 이 제도도 완벽하진 않다.
일단 엘릴 왕국에서 귀족들은 ‘그 지역에서 제일 센 기사’일 확률이 높다. 기사와 귀족을 딱 잘라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제도는 ‘모든 귀족들이 왕에게 무조건 충성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당연히 귀족들은 탐탁잖게 여길 것이다.
엘릴 왕국의 근본인 ‘강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사상을 위배하는 제도니까. 결국 왕이 카리스마를 유지하지 못하면 즉시 모든 체계가 와해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또 전쟁이 터지고, 반복.
때문에 아이작은 연합왕국이라는 미끼를 주면서 사실상 ‘강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논리를 ‘왕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로 바꿀 생각이었다. 왕은 무조건적인 강자고, 독재자이며, 신의 선지자이고, 국가 그 자체이어야 한다. 그 이하, 연합에 속한 제후들은 그 절대왕권의 달콤한 꿀을 빨아 먹으면서 자치를 유지하는 거고.
중세─절대왕권─군국주의─파시즘 국가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연히 현대인인 아이작 입장에서는 아름답지 않은 나라다. 하지만 엘릴 신도들 수준에 딱 맞는, 최선의 방안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낙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최선의 방법을 고르는 것이 아이작이 제안한 방식이었다.
‘개개인의 무력 차이도 크고, 천사와 신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민주주의 같은 건 소금 의회에서나 있을 수 있는 헛소리지…….’
에델레드의 말은 귀족들에게 파급 효과가 적지 않았다. 강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엘릴의 논리와 달리 그의 말은 유약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귀족들은 감정적인 반발과 달리, 이성의 한편에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왕국의 내전이 끝나는 건가?’
오랜 내전과 갈등으로 지쳐있던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 눈치 게임만 하면서 살 수는 없었으니까. 내전은 사람 목숨을 해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교류와 성장, 발전마저 가로막고 있었다.
그때 모르스가 입을 열었다.
“폐하, 그러면 리안나 게오르크와의 전쟁도 그만두시는 겁니까?”
리안나는 다른 반역자나 독립론자들과의 위상이 다르다. 알데온의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하고, 백성들의 지지도 크다. ‘엘릴의 왕’ 자리를 노리기에 충분한 위치인 데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도 컸다.
“일단 제안은 해봐야겠지. 하지만 왕의 위엄을 보일 필요가 있다면 망설이지 않을 것이오.”
에델레드의 담백한 말에 귀족들은 안도했다.
‘역시 게오르크와의 내전은 피할 수 없겠지…….’
아이작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에델레드가 존경받는 ‘엘릴의 대리인’으로 인정받으려면 성지 엘리온의 수복이 필요하다. 알데온이 정치 경제의 중심지일 수는 있어도, 엘리온이 가진 위상은 완전히 다르니까.
무엇보다 백 년이 넘게 중단된 신탁을 다시 받아야 할 필요도 있다.
에델레드는 성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게오르크 가문이 성지의 수호자 자리를 내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내전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로잘린드 솔트아인이 협력에 가까운 중립을 선택했다는 것.
지하에서 무슨 감정의 변화를 겪었는지 몰라도 로잘린드는 에델레드에게 더 이상 적의를 느끼지 않는 듯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노인의 모습은 이제 평범한 귀부인 같았다.
에델레드 역시 지하에서 남다른 변화를 겪은 듯했다. 이제 그는 소년에서 왕이 된 것처럼 남다른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죽음에 가까운 체험, 천사를 눈앞에서 목도한 것, 자애와 용서의 경험이 그를 바꿔 놓았다.
‘이제 조금 엘릴의 왕 같은 모습이군.’
“자세한 것은 추후에 다시 설명하겠소.”
에델레드는 침상 위에 앉은 채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성배기사는 잠시 남아주시오. 할 이야기가 있소.”
***
“리안나 게오르크와 혼약을 추진하는 건 어떻습니까?”
아이작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저는 기혼자입니다. 폐하. 아니, 아직 식을 올리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니, 아니. 내가 주어를 생략했군. 내가 리안나와 결혼하면 어떨까 묻는 것이오.”
아이작은 안도했지만, 다른 방향으로 머리가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결혼? 왕과 반역자가?
그러다 번뜩 지난 연회 때 했던 에델레드의 연설을 떠올렸다.
“……일전에 연설 때 패왕과 무희 이야기를 하시더니, 폐하께선 스스로가 엘릴이라도 된 줄 아십니까?”
뜬금없는 결혼이벤트라니.
물론 혼인은 극적인 화해의 상징이자 강력한 두 가문이 결속하는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리안나 게오르크와 혼인?
아이작 눈에는 에델레드가 기사 혐오에 돌아버린 나머지 최대한 전쟁과 거리가 먼 선택지를 고른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그만큼 위로 올라갈 것도 없소. 내가 참고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오.”
“최근의 일을 참고하셨다구요?”
“로잘린드 부인. 그녀를 참고했소.”
아이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모르스에게 들었던 그녀의 부부관계에 대한 극적인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주로 섬 서부에서 활동했던 로잘린드 해적…… 아니, 바다 의적들은 당연히 솔트아인 섬도 목표로 삼았다.
당시 솔트아인 변경백 입장에서 해적들은 원수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아들인 테오 솔트아인이 해적 우두머리 로잘린드를 꼬셔서 아내로 만든 것은 확실히 극적인 사건이었다.
“……지금 시대의 테오 솔트아인 같은 사람이 되겠다구요?”
“적을 죽이지 않아도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좋은 상징 아니오?”
에델레드는 피곤한 듯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서로 죽이고 죽이려고 드는 건 이미 700년 동안이나 했소. 특히 선왕 대에는 그걸 아주 많이, 그것도 아주 잘했고. 그런데 그게 성공적이었소? 내 눈에는 폐허만 보이는구려.”
아이작도 함께 이마를 짚었다.
그야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에델레드의 우려와 달리 아이작은 정말로 성공시킬 자신이 있었다. 물론 그 피가 진창을 이루고, 많은 사람들이 죽겠지만.
하지만 아이작이 아는 길은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에델레드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성공한다면?’
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에델레드가 성지의 주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가문이 합친다면 내전을 벌일 이유도 사라진다. 남은 것은 리안나가 얼마나 관용적으로 나올 것인가가 문제인데, 이건 에델레드에게 맡겨 두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약간이나마 희망이 생겼다.
어쨌든 아이작에게는 엘릴 왕국의 기사들이 많이 필요하다. 내전으로 가장 강력한 전력인 게오르크 군벌의 기사들을 잃는다면 여명군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는 뜻이 된다.
에델레드의 선택은 아이작에게 최선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오. 리안나 게오르크와 나는 과거 약혼이 내정되어 있었소.”
“뭐라……?! 아니, 젠장.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언제나 그렇듯이, 네임리스 카오스는 설정을 세세하게 설명해 주는 게임이 아니다. 플레이어가 게임 내에 산재한 플레이버 텍스트로 미루어 짐작할 뿐.
생각해보면 왕국 내 가장 강력한 군벌과 왕가가 혈연을 맺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특히 리안나라면 게오르크 가문의 장녀이고 소드마스터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 테니, 왕가에 편입시키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었다.
다만 그 꼬맹이 약혼자들이 지금은 반역자와 왕이 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일 뿐.
“물론 내가 갓난아기였을 때 나왔던 이야기지. 비오 게오르크가 죽고 리안나가 충성 맹세도 없이 일방적으로 가문 계승을 선언한 순간 파투 났던 것이고.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공식적인 파혼선언은 듣지 못했소.”
아이작은 문득 의심이 생겼다.
“혹시 리안나 게오르크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있으십니까?”
“그럴 리가? 그녀는 나보다 5살이나 많소. 얼굴은 몇 번 봤지만 연인이라기보다 누님 같은 분이지. 어렸을 때는 검술 단련을 이유로 내 이빨이나 팔을 부러뜨린 적도 있고.”
에델레드는 치가 떨린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이작은 에델레드가 단지 피를 보기 싫어서 고른 선택지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나름대로 고뇌 끝에 결론을 내린 것이다.
싸우지 않고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방법.
‘통할까?’
게임에서 두 사람은 앙숙이다. 심지어 주인공은 둘 중 한 명을 골라 왕으로 만들 수도 있다. 왕위에 앉는 것은 한쪽인 것이다. 결혼하는 루트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리안나에게 알데온 왕가는 아버지의 원수고, 에델레드에게 게오르크 군벌은 위협적인 반역자다. 둘 중 하나는 끝장나야 했다.
“그럼 일전에 했던 연설과 이 회의는 무슨 의미입니까?”
“사실 게오르크를 쳐부수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소.”
아이작은 또 한 번 경악했다.
“그때부터 생각하셨던 겁니까? 애초에 갑자기 떠올리신 생각이 아니었군요.”
“이 내전을 끝낼 방법을 구상하다 보니 떠오른 방법 중 하나요.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접어두고 있었는데,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안될 게 뭐가 있겠냐 싶더군. 누가 솔트아인과의 화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겠소?”
에델레드는 수줍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말한 것은 사실 여명군을 염두에 둔 것이었소. 그대도 공짜로 짐을 돕는 것은 아닐 테니.”
성지와 성검, 성배를 되찾아 엘릴의 귀환이라는 업적을 완수하겠다.
에델레드는 그렇게 선언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화려한 미사여구를 쓴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해낼 생각인 것이다. 엘릴의 귀환은 엘릴 신앙 루트의 최종 승리 조건이긴 했지만, 에델레드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아이작은 놀랐다.
“귀족들은 리안나와 전쟁을 치르리라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요.”
“결속을 위해 사기를 끌어올렸을 뿐이오. 막상 게오르크 반군과 전쟁을 치르라고 하면 그들도 내키지 않겠지. 목숨은 누구에게나 소중하지 않소?”
이런 발언에서만큼은 에델레드가 엘릴 기사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전쟁의 흥분에 빠지면 엘릴 기사들은 적이 천사라도 거리낌 없이 달려든다.
전쟁터에서 가장 많이 죽이는 것도, 많이 죽는 것도 엘릴 기사들이다.
아이작은 긴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어려운 길을 가시는군요.”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먼저 손을 내민다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뇨, 어렵긴 하지만 가능하긴 할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고?”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두 사람 사이를 잘 조율해서 어떻게든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만들고 사랑과 애착이 꽃피는 로맨스…… 따위를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아이작이 구상한 방법은 오히려 그 정반대였다. 살벌하고 피 튀기는 긴장감.
“이 결혼은 두 사람만의 결혼이 아닙니다. 리안나의 뜻은 아직 모르지만, 두 사람이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결혼을 성공시키려면 왕국 모두가 찬성해야 한다.
그것은 몇몇 사람의 각오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전쟁이 필요할 겁니다.”
유혈과 폭력은 사랑을 만들어 낸다.
원래 긴장과 혐오 속에서 싹트는 애정이 진득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