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77)
177화. 전쟁이 다가오는 소리 (2)
헤카틀리 마녀 사냥이 끝나면서 변방이 안정되고, 솔트아인이 알데온에 대한 지지 선언을 보내자 왕권에 대한 지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공기 중에서 피와 철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엘릴 왕국을 네 개로 분할하던 세력 중 셋이 한 세력에 굴복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성지 엘리온의 수호자 게오르크의 반군뿐이었다.
모두가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성배기사가 있었다.
어떤 귀족들은 성배기사를 찬양하고 좋아했지만, 어떤 귀족들은 여전히 성배기사를 의심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외국인에 이교도인 자는 믿을 수 없다는 것.
특히 갑자기 굴러들어온 외부인에게 명예와 업적마저 빼앗긴 기사들은 그를 질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엘릴 왕국 기사들의 질투와 존경의 시선을 한 몸에 사로잡는 성배기사는 익숙하지 않은 매파 일 때문에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런 거엔 완전 약한데.’
아이작 본인도 천사와 공작, 심지어 황제까지 나서서 떠먹여 줘야 간신히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었다. 그정도 압박이 아니었다면 아이작은 진작에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그런 자신이 다른 사람에 대한 연애 대책 강구?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차라리 내가 리안나를 꼬시는 거라면 얼굴만 믿고 어떻게 들이댈 수 있겠군.’
하지만 그러면 이솔데를 볼 면목도 사라질 뿐만 아니라 문제를 한층 더 복잡하게 꼬기까지 할 것이다.
차라리 에델레드가 네필림이었다면 일이 더 편했을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닿자, 아이작은 자신이 앉은 자리에서 고민할 수 있는 건 이미 다 끝냈다고 결론 내렸다.
‘일단 할 수 있는 준비를 하자. 지금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니.’
아이작은 에델레드에게 부탁해 전령을 보냈다. 리안나에게 ‘평화협상’을 제안하는 전령이었다.
일단 둘이 만나긴 해야 눈이 맞든 역사가 이뤄지든 할 테니까.
물론 다른 기사들은 ‘드디어 왕께서 게오르크 토벌 준비를 마치셨다’라며 좋아했다. 보통 엘릴 왕국에서 ‘평화협상’이라는 건 ‘항복협상’을 외교적으로 표현한 말이고, 동시에 선전포고를 위한 빌미로 사용해 왔으니까.
사실 그 내막에 혼담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다는 것은 아이작과 에델레드만이 알고 있었다.
“이사크레아 경!”
아이작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정원…… 을 가장한 연병장 주변을 걷고 있을 때, 모르스 장군이 큰 소리로 말을 걸며 다가왔다. 그의 뒤쪽으로 알데온 기사들과 병사들이 진흙투성이가 된 상태로 어기적거리며 걷고 있었다.
“훈련 중이셨습니까?”
“아, 험지 훈련 중이었습니다. 델프릭 힐드 단장이 엘리온 주변은 습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겨울이 곧 끝날 테니 봄장마와 녹은 진창에 대비하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델프릭 힐드 단장?”
“아아, 알데온 기사단장입니다. 분열 예식이 드러났을 때 게오르크 영지 경계 임무를 맡고 선제적으로 파견되었었지요. 지금은 전쟁 준비를 위해 돌아왔습니다.”
아이작이 고개를 돌리자 뒤쪽으로 비슷비슷하게 생긴 진흙투성이 기사가 손을 들어 올리며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델프릭 힐드입니다! 성배기사님! 제 동생이 신세 많이 졌다고 들었습니다!”
“동생? 아아, 레이나 힐드의 오빠인가 보군.”
“맞습니다!”
엘릴 왕국에 도착하자마자 시비를 걸었던 레이나 힐드는 어쨌든 아이작에게 여러 가지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녀의 오빠 역시도 기사, 그것도 알데온 기사단의 단장인 듯했다.
“남매가 이렇게 훌륭한 기사이니, 춘부장께서도 뿌듯하시겠군.”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하급 기사부터 기사단장까지 이렇게 진흙투성이가 되어 훈련하는 모습을 보니 알데온 기사단의 미래가 밝았다. 다만 그 모습은 동시에 아이작에게 껄끄러운 느낌을 주었다.
“봄철 전투에 대비하는 걸 보니 곧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응? 에델레드 폐하께서 전령을 보내셨으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평화협상이 당연히 깨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 보니 역시 엘릴 신도다.
아이작도 긍정적인 예견은 하지 않았지만 조금 시간을 들이더라도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으면 그게 최선이라고 보고 있었다. 이런 전투 준비와 갑작스러운 병력 이동이 게오르크 군에게 긍정적인 신호를 줄 것 같진 않았다.
툭, 투툭, 투투툭…….
그때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먹구름이 낀다 했더니 모르스가 말했던 봄장마가 다가오는 듯했다.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그때 어딘가 불길한 울림을 주는 외침이 들려왔다.
***
전령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곧바로 에델레드가 뛰어 달려왔다.
왕이면 왕답게 왕좌에 앉아서 거만하게 전령의 보고를 들으면 될 일이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돌아온 게 전령이 아니라 전령의 말뿐이기 때문이었다.
파발마는 극도로 흥분한 듯 알데온 성의 연병장까지 뛰어 들어와 날뛰다가 가까스로 제압되었다.
눈이 충혈되고 거품을 문 것을 볼 때 약을 먹은 듯했다.
파발마의 상태를 확인하는 사이 성문의 경비를 맡고 있던 기사들이 허겁지겁 보고했다.
“보고된 바에 따르면, 소수의 기마병들이 알데온 인근에 나타났다가 파발마를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파발마는 곧바로 성문으로 돌진했는데, 전령의 말임을 인증하는 깃발이 걸려있어서 죽여서는 저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문을 뚫린 것은 죽여도 할 말이 없는 죄였지만, 그게 전령으로 보내진 파발마라면 기사들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말에 걸려 있는 왕가의 문장이 찢어지기라도 한다면, 그 불길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이 될 테니까.
모르스조차도 질책할지 말지 고민하는 사이, 에델레드가 말했다.
“잘했다. 하지만 다음에는 바로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도록. 성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은 이유 불문하고 저지해야 한다.”
“예, 주의하겠습니다!”
“가방에 뭐가 담겨있습니다!”
그때 파발마를 뒤지던 한 기사가 외쳤다. 에델레드와 아이작은 굳은 표정으로 다가갔다. 전령 없이 파발마만 돌아온 것은 역시 긍정적인 신호는 아니었다. 말 가까이 다가가자 또 다른 부정적인 신호가 경종을 울렸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풍겨 왔던 것이다.
기사가 가방의 잠금장치를 칼로 잘라 연 순간 얼굴을 찡그린 채 물러났다.
동시에, 활짝 열린 가방에서 툭 머리통 하나가 떨어졌다. 에델레드가 전령으로 보낸 기사의 머리였다. 그 귀에는 에델레드가 보낸 편지가 인장도 뜯어져 있지 않은 채로 못으로 박혀 있었다.
연병장 안을 정적이 가득 채웠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이 보낸 전령을 살해하고 편지는 읽지도 않은 채 묶어서 돌려보냈다.
피로 물든 엘릴 왕국의 역사 속에서도 보기 드문 참혹한 짓이었다.
“전령을 살해하다니!”
이내 분노를 참지 못한 모르스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그 외침이 기폭제가 된 듯 병사들과 기사들까지도 함께 욕설과 분노한 함성을 토해 냈다.
전령을 살해한다는 것은 앞으로 대화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는 메시지였다.
물론 엘릴 왕국이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건 항복이나 타협조차도 없을 것이라는 선언이다.
즉, 자신들이 전멸당하거나, 그쪽이 전멸당해야 끝날 것이라는 뜻.
물론 게오르크 군은 자신들이 전멸당할 생각으로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오르크 이 개새끼들! 감히!”
“엘리온에 게오르크 개들의 피를 흩뿌려야 한다!”
분위기가 끓어오르면서 성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이미 아이작이나 에델레드가 분위기를 수습하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전령 살해는 그만큼이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에델레드의 눈가에도 분노와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을 테니까.
“폐하! 성전을 선포하소서! 성지 엘리온을 반역도당으로부터 정화하기 위한 성전을!”
흥분한 레이나 힐드가 자신의 칼을 뽑아 들고 바닥에 꽂으며 소리쳤다. 왕 앞에서 칼을 뽑아 든다는 미친 짓을 벌이고 있었지만 이건 엘릴 신도들 나름대로의 호소였다. 만약 들어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목을 치라는.
심지어 분위기를 따라 다른 기사들 몇몇마저 레이나를 따라 하고 있었다. 델프릭과 모르스 정도만이 지위를 인식하고 가만히 있었지만, 그들을 말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에델레드는 아이작을 한번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이작도 더 이상 여기서 어떻게 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외국인인 그가 이 정도로 흥분한 기사들 앞에서 평화 운운했다간 당장 칼부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에델레드는 침통함과 실망감, 분노,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레이나의 칼을 뽑았다.
그는 이내 칼을 높이 들어 올리며 선언했다.
“성지 엘리온 탈환을 위한 성전을 선포한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이작은 날뛰는 쇠붙이들 앞에 에델레드를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단 앞을 가로막았다.
그때 에델레드가 아이작의 망토를 꽉 끌어 쥐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전쟁! 전쟁이다!”
“이 반역자들을 전부 죽이고 성지를 되찾자!”
모두가 다가오는 전쟁에 환호하고 있었다.
웃고 떠들며 전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귀한 피를 버리고, 대신 한 줌 흙 묻은 명예를 손에 쥐기 위해.
***
“뭔가 이상합니다.”
알데온 성에서 시작된 전쟁의 흥분이 도시 전역을 뒤덮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쟁에 시큰둥해하던 자들조차도 전령이 살해당해 돌아왔다는 소식에 흥분했고, 이성적인 자들조차도 ‘상황이 극적이긴 하지만 예상했던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며 놀라워하지 않았다.
아이작은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안나 게오르크가 보수적이라고 듣긴 했지만, 명예를 아는 사람이라고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전령을 살해할 정도로 강경하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구요.”
에델레드는 말없이 복도를 걸으면서 아이작의 말을 들었다.
“누군가 전령을 중간에 차단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게오르크 군이 아닌 다른 세력이…….”
“전령을 성지 엘리온까지 호위했던 기사들 말로는 엘리온 성채까지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군요. 리안나는 게오르크 군을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알데온 성안에 비둘기파와 매파가 존재하듯, 게오르크 군에도 당연히 그런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강경한 기사들이 이번 일을 벌였을 확률이 높았다.
아이작은 헤카틀리 마녀 사냥을 했을 때 정찰해 왔던 게오르크 기사들을 떠올렸다.
‘여명군 참전 저지를 위해서라면 나를 죽이는 것도 감수하겠다고 했었지…….’
황제의 전령, 브란트 공작가의 사위, 부활의 성자인 성배기사를 살해하는 것만큼 여명군 참전을 저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즉시 두 나라의 사이가 틀어질 테니까. 하지만 아이작을 살해하는 것은 실패했고, 에델레드를 죽이는 것도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전령을 죽이는 건 상대적으로 쉽다. 일단 저지르고 전쟁 분위기로 끌어가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원정을 피하고 싶어서 내전을 치른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 같은데.’
이 사건엔 분명 뭔가 내막이 있다. 불현듯 아이작은 한참 나중의 일이지만 엘릴 왕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사건을 떠올렸다. 플레이어가 어떤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승리 조건이 완전히 날아가고 엘릴 왕국도 멸망하는 배드엔딩 루트를.
‘하지만 그게 벌써 일어날 리가…… 아니, 예상은 소용없어. 이미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이 달라졌다.’
칼센은 없고, 천사들도 몇이나 사라졌다. 아이작은 모진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그때 잡아 온 기사들을 좀 더 심문해 보겠습니다. 뭔가 더 알아낼 수 있을지도요.”
그중 한두 명은 죽일 각오로 혼돈의 눈을 쓸 생각이었다. 필요하다면 인질로 잡은 세 명 전부 죽여서라도.
에델레드는 문득 멈춰 서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시오. 성배기사.”
그렇게 말하는 에델레드의 눈동자는 텅 비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다고 인제 와서 전쟁을 막을 수 있겠소?”
“그야 전쟁을 막을 순 없겠지요. 폐하. 전쟁은 항상 일어납니다. ”
아이작은 무슨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대답했다.
아이작에게 이 세상은 게임이다. 이 게임의 장르는 다소 자유도 높은 ‘액션’이다. 당연히 세상은 전쟁으로 가득하다.
이 세계의 규칙은 신이 쓰는 것이고, 인간들은 천사들의 노리개에 불과하다.
운명 앞에 인간의 의지나 신념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운명에 반항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누구에 의해 전쟁이 일어나는지는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왜 죽여야 하는지 알려면요.”
아이작의 말에 처져있던 에델레드의 눈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에델레드는 이내 주먹을 꽉 쥐고 속삭였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또 이렇게 가르침을 주시는군요.”
다시 마음을 다잡은 에델레드는 독한 결심을 품고 먼 곳을 응시했다.
성지 엘리온이 있는 방향을.
“전쟁은 피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그 결과는 놈들 뜻대로 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