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78)
178화. 전쟁이 다가오는 소리 (3)
여자는 표류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끝나지 않을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다. 그녀가 탄 작은 나룻배에는 마른 장작들이 가득 실려 있었고, 장작에선 천천히 휘발되는 기름 냄새가 풍겼다. 여자는 작은 불티 하나만 튀어도 언제든 불타버릴 수 있는 장작 위에 누워서 흐린 하늘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투툭, 툭.
그때 그녀의 뺨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얼굴을 어루만지던 여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멍하니 호수를 응시하던 여자는 수면 위를 수놓기 시작한 수많은 파문들을 보고서야 자신의 의식이 성과 없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봄장마가 시작된 건가. 이번에도 실패군.’
비에 젖기 시작한 나룻배는 이제 더 이상 불이 붙을 일이 없을 것이다. 여자는 방치되어 있던 노를 들어 젓기 시작했다. 호리호리하지만 긴 팔이 노를 움직이자마자 배는 쭉쭉 수면 위를 나아갔다.
그녀가 호수 위를 표류한 것은 일주일이 넘었지만, 호수변에 닿기까지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촤아아아아. 호수변의 나루터에는 이미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여자가 배에서 내려 호수에 발을 딛는 순간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출렁이던 호수 표면이 얼어붙었다.
여자는 얼어붙은 표면을 밟으며 땅 위로 발을 옮겼다. 곧 기사들이 달려와 배를 땅 위로 끌어 올리고 여자에게 물과 따뜻한 수건을 건넸다.
“리안나 가주님.”
리안나가 일주일 만에 얼굴을 닦고 있을 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짧은 턱수염에 화강암을 깎아 만든 것 같은 단단한 인상의 남자가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숙부님, 왜 여기까지 마중 나와 계세요?”
“말씀드렸지만 그냥 빌론이라고만 부르셔도 됩니다.”
빌론의 말에 리안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형제지만 리안나는 게오르크 군의 수장이 되기 전까지 빌론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다른 게오르크 일족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흩어져 살다가 비보를 듣고 모인 일족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빌론은 바다 건너 12차 여명군에 참전했을 정도로 발 넓게 돌아다니며 경력을 쌓은 베테랑이었다. 그런 그가 방랑을 마치고 돌아온 것은 바로 형인 비오 게오르크의 죽음 때문이었다.
돌아온 빌론은 가문 내 여러 의견을 잠재우고, 리안나를 깍듯이 가주로 대접했다. 그녀가 소드마스터여서이기도 했지만, 알데온 왕가에 대한 복수심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빌론은 리안나를 바라보다가 장작을 실은 나룻배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 의식도 실패한 모양이군요.”
“으음, 네. 성배기사가 엘릴께서 침묵을 깰 때가 됐다고 하기에 기대했는데, 별다른 말씀은 없으시더군요.”
“그 이교도 외국인이 뭘 알겠습니까? 그냥 되는대로 내뱉은 말이겠지요.”
지난 일주일 동안 리안나는 엘릴에게 신탁을 청원하는 의식을 진행해 왔다. 배 위에서 화장하는 거짓 장례를 치르고,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성지 엘리온 주변의 호수를 표류하며 기도를 올렸다. 죽음을 흉내 내는 임사 체험을 통해 사후세계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치를 수 있는 의식 가운데 희생 의식을 제외한 최대한 극진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원래 소드마스터 정도 되면 이 정도로 극진한 의식을 치르지 않아도 엘릴의 신탁을 받을 수 있었지만, 엘릴이 침묵한 지 100년이 넘었다. 아직도 침묵이 깨지기는 요원해 보였다.
이번에도 엘릴은 대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천사께서도 말씀이 없으셨습니까?”
“호수의 귀부인과 마법사 칼루리엔께서 찾아오셨어요. 알데온 왕이 분열 예식을 찾은 것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두 분 다 적당히 하고 돌아가라고 타이르시더군요.”
분열 예식을 찾은 건이라면 엘릴이든 천사든 뭔가 다른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전에 실패했던 무수한 의식들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별다른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리안나는 문득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칼루리엔께선 성지 엘리온이 위협받고 있으니 단단히 지키라는 당부도 함께 하시더군요. 원래 하던 일 그대로인데 뭔가 다른 징조가 있는 걸까요?”
리안나의 말에 기사들 사이에서 술렁이는 기색이 번졌다. 무거운 돌덩이처럼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던 빌론의 얼굴이 흔들렸다. 리안나는 그들 사이에서 번지는 분위기를 보고 뭔가 다른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가 의식을 치르는 사이에 뭔가 일이 생긴 모양이군요.”
“찬탈자 알데온이 전령을 보내왔습니다. 평화협상을 제안하더군요.”
리안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요?”
“알데온은 엘릴 왕국의 귀족들을 전부 통합하고, 솔트아인의 미망인마저도 어찌했는지 굴복시켰습니다. 그것도 외세 이교도의 힘까지 빌어서요! 이젠 우리밖에 안 남았는데 이 와중에 평화 제의를 한다는 게 무슨 의도겠습니까?”
“그럼 대화도 하지 않고 쫓아냈나요?”
“전령의 목을 잘라 보냈습니다. 모욕하려는 의도가 뻔하니 굳이 눈을 더럽힐 필요도 없지요.”
리안나는 잠깐 침묵에 빠졌다.
“전령의 목을 잘라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리안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두 세력 사이에서 대화나 협상 따윈 이뤄지기 힘들 것이라는 뜻이다.
싸움이 닥쳐온다면 피할 생각이 없지만, 관대함을 보이는 것도 기사의 미덕이다.
빌론은 그 길마저 차단해 버린 것이다.
“제가 게오르크 가문의 가주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언제부터 숙부님께서 마음대로 외교를 처리하고 있던 거죠?”
“가주님께서는 의식을 진행하고 계셨기에 일족 회의를 열어 결정 내렸습니다.”
빌론 자신뿐만이 아니라 게오르크 일족 장로들의 결정이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리안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르신을 공경하고 기사도 전통을 숭배하는 그녀로선 혈족들의 압박을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최대한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호수 위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드는 사이 어른이란 작자들은 전령의 목이나 치고 있다니. 당장이라도 호통치고 싶은 충동이 들끓어 올랐다.
그때 빌론이 리안나를 설득하듯 말했다.
“생각해보십시오. 리안나 가주님. 명천사 칼루리엔께서 성지 엘리온이 위협받고 있으니 지키라는 당부를 왜 굳이 하셨겠습니까? 지금 엘리온을 위협하는 자들은 알데온 군뿐입니다.”
천사의 이름이 언급되자 리안나는 흠칫했다. 일족의 어른들 결정도 공경하는 리안나에게 천사의 말은 반드시 수행해야 할 정언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괜히 평화 분위기를 조성했다가 투쟁 의식이 나약한 징집병들이 동요하기라도 하면 저희가 곤란해집니다. 어쩌면 이를 노리고 평화협상 운운했는지도 모르지요.”
빌론은 복수심으로 살벌하게 타오르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엘릴의 가호 아래, 저희 일족이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을 때입니다.”
리안나는 바보가 아니다.
빌론의 이 잔인한 짓거리에는 형제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이 개입됐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치졸한 화풀이를 방금 전에 들은 천사의 명령에 끼워 맞춰 포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리안나에게 그 말을 반박할 만한 논리는 없었다.
빌론의 말대로 성지 엘리온을 위협할 만한 상대는 당장 분열 예식을 반납하겠노라며 군대를 꾸린 알데온뿐이었으니까.
“알겠어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피를 흘리는 결정은 제가 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리안나는 공기 중에 떠도는 피비린내를 맡았다.
침묵하는 엘릴이 바로 그녀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아…… 아빠가 내전만은 최대한 피하라고 했는데.’
엘릴은 침묵하고, 천사들은 방관하는 사이, 그들의 신도들은 서로의 피를 탐하고 있다.
이 와중에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복잡하지 않았다.
최대한 많은 적을 죽이는 것.
충직한 엘릴의 신도답게, 그녀는 이미 시작된 전쟁을 굳이 회피하진 않기로 했다.
***
“폐하!”
원정을 위한 준비를 하던 에델레드에게 갑작스럽게 소식이 전해져왔다. 성지 엘리온에서 은거하던 게오르크 군이 갑작스럽게 엘릴 왕국 곳곳을 공격한다는 소식이었다.
“뭐라고? 갑자기 이제 와서?”
“수십에서 수백 단위로 이루어진 기사들이 나뉘어 왕국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접경지에서 대기하던 알데온 기사단이 급히 반격을 시도해 봤지만, 너무 빠르게 빠져서…….”
전령의 소식에 동요한 것은 자신의 영지를 비우고 떠나온 귀족들이었다. 당장 성지 엘리온과 가까운 곳에 있는 귀족들일수록 동요가 커졌다. 심지어 게오르크 군이 타격하는 영지들이 접경지의 영지를 돌파해 중앙부까지 돌파한다는 소식을 전령이 전하자 귀족들은 더욱 당황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지원을 보내드리려면 우선 저희 영지를 다독여야 할 것 같습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폐하, 저희도 상황을 수습하는 대로 곧…….”
귀족들은 황망한 표정으로 양해를 구하며 알데온을 떠났다. 피해 지역 인근의 귀족들도 아직 공격당하지 않았지만, 대비를 위해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왕에 충성하는 기사들이라 해도 자신의 가족, 친척, 영지민들이 공격당하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 에델레드 역시 그들을 강제로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이 돌아가 봤자, 게오르크 기사들은 이미 철수하거나 돌파한 상황일 것이다. 아이작은 게오르크 군이 머리를 잘 썼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격전 비슷한 전술을 쓰는 건가. 당연히 성지 엘리온의 요새에서 결전을 치를 줄 알았더니.’
점령을 하지도, 영지를 초토화하지도 않았다. 그저 체류 중이던 병사들을 공격하거나 저택에 불을 지르고, 가볍게 약탈해 갔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아이작과 에델레드는 졸지에 한 방 얻어맞은 셈이었다.
게오르크 군은 소수의 기사만으로 알데온에 똘똘 뭉쳐 있던 귀족들 상당수를 흩어 놓는 데 성공했다. 애초에 분열 예식이 드러났다는 소식에도 꼼짝도 않고 있었던 것이 이 순간을 위해 방심을 유도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우리가 게오르크 군보다 나은 것이 그나마 수적 우위였는데, 이번 공격으로 1/3은 빠져나갔군.”
에델레드는 뭉텅이로 빠져나간 기사와 병사들의 전력을 헤아리며 중얼거렸다. 수가 급변한 이상 전략도 병참도 지휘체계도 새롭게 구성해야 했다. 여전히 병사와 기사 수 자체는 게오르크 군보다 많았지만, 질적인 부분까지 따지면 우세하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이정도 기사가 빠져나왔으면 성지 엘리온은 비어있을 거요. 지금이라도 급히 군을 움직여 엘리온을 공격하는 건 어떻소?”
“죄송합니다. 폐하. 엘리온 주변은 이미 봄장마가 시작됐습니다. 저희가 아무리 빨리 간다 해도 복귀하는 게오르크 군의 기병대보다 빠르지는 못할 겁니다.”
모르스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뭣보다 반역수괴 리안나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없습니다. 엘리온 성채를 지키고 있을 확률이 높겠지요. 그러면 공략에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오래 지체되면 영지들을 타격하고 복귀하는 게오르크 군에게 포위당할 수도 있습니다.”
“각개격파하는 방법은?”
“지금은 그게 최선으로 보입니다. 저렇게 빠르게 기동하고 있으니 보급이 수월할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봄이니까요.”
봄에는 겨우내 비축한 식량이 떨어지는 시기기 때문에 약탈할 만한 것이 많이 없다. 모르스는 그 점을 지적하며 지도의 몇 군데를 짚었다.
“우선 왕국에 뿌려진 게오르크 기사들을 사냥하는 것부터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전력을 스스로 흩뿌리다니, 어리석은 짓을 하는 거지요.”
물론 이 자리에서 리안나가 진짜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얻어맞은 불쾌함을 덜어내기 위한 허세였다. 아직 그들은 리안나의 수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이작은 도망친 쥐새끼들을 쫓느라 졸졸 끌려다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엘리온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아이작의 말에 회의실에 있던 기사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성배기사님, 말씀드렸지만 그렇게 되면 포위당할 가능성이…….”
“그 말은 적들이 우리 뒤를 따라서 헐레벌떡 쫓아온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적들 뒤를 쫓느라 힘을 빼는 것보다 적들이 우리 뒤를 쫓느라 힘을 빼는 게 낫습니다. 그리고 포위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그때야말로 엘릴 왕국의 기사들이 일어설 때지요.”
“그게 무슨…… 아아! 이번에 영지로 복귀한 기사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알데온 군이 엘리온 성채에서 리안나와 게오르크 군에게 앞뒤로 포위당한다고 그걸로 끝은 아니다. 영지가 공격당한 것 때문에 분노한 기사들이 게오르크 기병대의 뒤꽁무니를 이를 갈며 쫓아오고 있을 테니까.
얻어맞고 가만히 있으면 엘릴 기사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포위당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게오르크 군입니다. 우리가 상대의 계책에 질질 끌려다니는 거야말로 게오르크 군이 바라는 바죠.”
이중 샌드위치 같은 꼴이다.
아이작의 말에 회의실의 기사들 모두가 납득했다. 하지만 그들이 완전히 납득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리안나 게오르크가 우리를 공격하면 전열이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제가 대응하면 됩니다.”
아이작은 담담히 대답했다.
시드리크와 싸워 본 것은 아이작에게 적절한 예방 주사가 되었다. 예상 외로 선전하긴 했지만, 리안나가 시드리크보다 월등히 강하지 않다면 충분히 맞설 자신이 있었다.
최소한 큰 피해 없이 버티기는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성지 엘리온 주변에는 아이작이 안배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에델레드와 다른 엘릴 기사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때가 되면 게오르크 군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아이작은 지도 위 멧돼지 모양의 말을 성지 엘리온 가까이로 옮겼다.
그 바로 앞에는 늑대 모양의 말이 놓여있었다.
“피해를 최대한 줄이는 길은 엘리온을 최대한 빨리 점령하는 것뿐입니다. 리안나가 나와준다면 더 좋지요. 적은 오직 리안나의 카리스마 하나에 의지하는 집단이니 그녀만 잡는다면 모든 승부가 결정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