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80)
180화. 안개 속의 악마 (2)
그럴 의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패자의 취급은 승자가 결정하는 법이다. 십부장의 질문엔 은연중에 이 전투를 아이작의 승리라고 단정하는 태도가 담겨 있었다.
“성배기사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승리였을 테니까 당연한 일이오. 매복을 예측한 것도 성배기사 아니었소?”
“그렇긴 하지만 저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소드마스터가 강력하고, 일반 병사들로 대처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무적의 존재는 아니다. 상급 검술을 사용할 줄 아는 기사가 열 명만 달려들어도 쩔쩔매게 될 것이다. 사기가 꺾이지 않고 합격이나 차륜전을 잘 펼칠 수 있었다면 위험한 건 아이작 쪽이었을 테고.
사실 아이작은 소드마스터의 진짜 실용적인 활용처는 전장보다 암살에 있다고 생각했다. 극도로 단련된 감각은 적을 피해 가기 쉽고, 추종을 불허하는 신체 능력은 같은 소드마스터가 아니고선 대처조차 불가능하다.
엘릴이 암살을 비겁한 짓이라며 금지한 이유는 어쩌면 소드마스터들의 폭주를 막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작의 말에 에델레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승리가 부담스럽소?”
“아뇨. 승리보다는 이 전투 자체가 꺼림칙합니다.”
아이작의 말에 에델레드는 더 의아한 표정을 했다.
모르스는 본대가 공격당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었다. 그건 아이작도 마찬가지였다. 허를 찌르는 공격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기병대의 거의 절반을 소모하는 공격까지는 하지 않을 거라고 보았다.
아이작이 혼자 있을 때 공격당했다면 그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3만여 명이 움직이는 본대. 게오르크 군이 바보가 아니라면, 이런 과감한 도박수를 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거 안 좋은데.’
만약 아이작의 걱정이 사실이라면 알데온 군이 성지 엘리온으로 접근하면 할수록 엘릴 왕국의 존속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아이작이 갑자기 일어서 움직이자 에델레드가 뒤따라 붙었다.
“어디 가시오?”
“음, 확인해봐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아이작은 아까 시신을 어떻게 수습할지 묻던 십부장을 찾아갔다. 그는 매장될 시신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십부장에게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지시를 내렸다.
십부장은 몇 번이나 그 지시가 진심인지 확인했지만 아이작은 반복해서 지시했다.
이 사소한 지시가 정답을 알려 줄 것이다.
***
아이작의 활약으로 인해 게오르크 기병대의 전력이 확 줄어들자 적들은 전략을 바꿨다. 예상대로 선봉보다 앞서나가면서 엘릴 성채로 합류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선봉대는 의기양양하게 나아갔지만 계속해서 의기양양할 수는 없었다.
“……우물을 메우고 식량 창고를 불태웠다고?”
“예. 주민들도 이미 다 소개(疏開)한 것 같습니다.”
선봉을 맡은 모르스는 중간 보급을 생각했던 마을이 텅 비어 있자 망연자실한 얼굴로 묻더니 둘러보기 시작했다. 선봉은 게오르크 기병대보다 먼저 엘리온 성채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보급물자라곤 각자 소지한 보존식이 전부였다. 필요한 군량은 게오르크 영지 안에서 구매하거나 징집할 생각이었는데, 첫 마을부터 폐허를 맞이한 것이다.
“게오르크 기병대가 벌인 짓 같나? 놈들이 벌써 우리를 앞서가고 있나?”
“글쎄요. 흔적을 보아하니 적어도 이틀 전의 것으로 보입니다. 게오르크 기병대가 우리보다 이틀이나 앞서나가고 있을 리는 없으니…….”
“리안나가 요새 밖으로 나와서 정리한 모양이군.”
모르스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다시 군을 이동시키면서 정찰병을 풀었다. 돌아온 대답은 예상대로 인근 마을 역시 마찬가지로 폐허가 된 상태라는 보고였다. 다소 먼 거리에 떨어진 마을은 무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크게 우회해야 했다. 그러면 일부러 서둘러 선봉을 이끈 의미가 없었다.
“아니, 마을을 불태우고 우물을 메우다니. 리안나가 미쳤나? 전쟁 하루 이틀 할 거야?”
모르스는 텅텅 빈 마을을 세 번째로 마주하면서 화를 냈다. 물론 먼 거리를 원정 오는 적들을 상대로 청야 작전을 펼치는 것은 흔한 전술이다. 하지만 전쟁을 최근에 시작한 것도 아니고, 긴 내전 속에 서로 그들은 몇 번이나 치고받았다. 엘리온을 향한 원정조차도 처음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마을을 불태우고 우물을 메웠으면 지금쯤 엘릴 왕국에는 남아나는 마을이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점령군이 바뀔 때마다 협력하는 민간인들을 눈감아 주는 것도 ‘관대한 기사로서의 아량’이었다.
그런데 지금 게오르크 군이 벌이는 일은 뒷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짓이었다. 마치 이번 전쟁이 마지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델프릭!”
폐가를 뒤지던 델프릭과 레이나가 재투성이가 된 채로 나오자 모르스가 불러 세웠다. 재와 진흙으로 엉망이 된 두 기사의 모습은 알데온 군의 전체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꽤 울적했다.
“지금 보급 상황이 어떻게 되나?”
“아슬아슬한데요. 식수는 아직 비 때문에 크게 문제가 없는데, 식량이 부족해서.”
“그렇게 부족한가?”
“뭐, 장군님께서 이틀 만에 게오르크 군을 항복시키실 수 있다면야 문제는 없겠지요…….”
대개 공성전이란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짧으면 반년에서 길게는 몇 년까지도 봐야 하는 일이었다. 물론 그렇게 긴 전쟁은커녕 한 달 이상 싸울 생각조차 없었던 모르스는 선봉 전략이 글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
모르스는 어리석은 전략을 고집부리다가 병력을 말아먹는 대신, 실수를 인정하고 싹싹 빌어서 용서받는 방법을 선택했다. 폭군이었던 선왕 시절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법이었다.
“에델레드 폐하, 소신의 부족함으로 작전이 실패했음을 사죄드립니다. 저는 즉시 위임받은 총사령관직을 내려놓고 일반병으로 복무하며 죄를 갚겠습니다.”
하루 뒤, 에델레드는 선봉대를 끌고 돌아온 모르스를 쓴웃음 지으며 반겨주 었다. 물론 모르스의 사죄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선봉대의 첫 번째 목적은 영지에서 분탕 치는 게오르크 기병대를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그건 이미 성공했고, 두 번째 목적은 하루라도 빨리 엘리온 성채를 포위하는 포위망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보급이 안 되는 시점에서 실패한 것이다. 누구도 게오르크 군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올 것을 예상 못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모르스는 현명한 판단을 한 것이었다.
“일어나시오. 모르스 장군. 그대가 아니라면 내가 누구에게 병력을 믿고 맡기겠소?”
“크나큰 은혜에 그저 감사드립니다.”
한바탕 연극이 끝나고 그들은 대처방안을 논의했다. 델프릭은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보았다.
“폐허에 시신이 안 보이더군요. 보통 마을을 불태운다고 하면 화를 내거나 반항하는 주민들이 나오기 마련인데, 급하게 불을 지르고 떠났는데도 시신이 없었습니다. 주민 협조가 잘되고 있다는 뜻이지요.”
에델레드는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그럼 엘리온 성채에 병사들이 예상보다 많을 수도 있겠군.”
“징집병이지만, 그나마 아군이 유리하던 게 수적 우위였으니 좀 아슬아슬하긴 하겠습니다.”
흩어진 귀족들이 다시 합류한다면 모르겠지만, 확실히 게오르크 영지 안의 주민들이 모여 협력하고 있다면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알데온 군이 이기더라도 솔트아인에서처럼 대학살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었다.
회의에 참가한 레이나가 다른 병사와 기사들을 대표해 말을 얹었다.
“비가 길어지고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전염병이 돌진 않지만 제대로 씻고 말릴 수도 없으니 시간문제예요. 뭣보다 비와 안개 때문에 다들 신경이 곤두섰어요.”
“신경이 곤두섰다고?”
“네. 안개를 틈타서 어슬렁거리는 게오르크 늑대 놈들을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구요.”
공격하지는 않고 일부러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알데온 군의 신경을 건드리기 위함이다. 이미 본대를 공격했다가 큰 손실을 봤으니, 야금야금 기를 깎아 먹는 전술로 전환한 듯했다. 알데온 군이 원정군인 데다 장마까지 겹쳐서 제법 유효한 전술이었다.
레이나가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성물을 반납하겠다는데 어떻게 앞을 막을 수 있는 거죠? 그걸 지지하는 사람들은 뭐고? 게오르크 늑대들은 자기들이 제일가는 신도인 척 고고한 척은 다 하더니, 참으로 역겹습니다!”
레이나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성물 반납이 핑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짜 목적은 반역자 토벌이었으니까.
전령의 목이 잘려서 돌아온 순간 성물 반납 건은 의미가 사라졌다.
“서두르는 것 외에는 문제를 해결할만한 뾰족한 수가 안 보이는군.”
모르스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게오르크 기병대가 초기에 뛰쳐나와 엘릴 왕국을 휘저었던 것도 알데온 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었나 싶어졌다. 모르스는 지금 게오르크 군을 지휘하는 자가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전쟁은 퍼즐 놀이가 아닙니다.”
모두의 시선이 아이작에게로 향했다.
아이작은 오랫동안 지론으로 품고 있던 생각을 알데온 군에게도 적용하기로 했다.
“적들이 문제를 제시한다고 해결하려고 애쓸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직접 적들의 문제가 되어야지요.”
***
솨아아아아아.
산발적으로 쏟아지는 봄비가 게오르크 영지의 울창한 숲의 나뭇잎들을 두들겼다. 빗방울이 굵지는 않았지만, 아침저녁으로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는 병사들의 신경을 건드리기 충분했다. 그건 알데온 군만큼이나 게오르크 군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곧 멧돼지들이 온다. 서둘러라!”
게오르크 군의 기사는 병사들을 시켜 길목을 차단할 나무를 또 한 그루 쓰러뜨렸다. 이제 스무 그루째. 이제 이걸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뜨려 길목을 차단하면 수송 마차를 운용하는 알데온 군은 한참 지체하든가 우회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우회할 길목은 강물의 방향을 바꿔 침수시켜 둔 상태였다.
“젠장. 따뜻한 수프 한 그릇 하고 싶군.”
게오르크 기사는 바이저를 올리고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벌써 사흘째 푹 젖은 속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들은 곧 엘리온 성채로 돌아가 따뜻한 침대와 불을 쬘 것이라는 점이었다. 반면 알데온 멧돼지들은 계속 이 비를 맞으면서 벌벌 떨 것이다.
그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최대한 지연전을 펼쳐야 했다.
“자, 이제 나무들을 떨어뜨려…….”
게오르크 기사는 병사들에게 지시를 하려다가 언덕 아래서 걸어오는 사람을 발견하고 멈췄다. 아직 알데온 군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안개비 때문에 길을 잃은 병사인가 싶었던 기사는 화를 내며 다가갔다.
“임마! 얼쩡거리다가 나무에 깔리고 싶지 않으면 당장 꺼져!”
“아, 예. 죄송합니다.”
병사는 머쓱한 듯 옆으로 비켜섰다. 게오르크 기사는 별생각 없이 넘어가려다가 문득 주변에 인기척이 많아진 것을 느꼈다. 언덕 아래에서 올라온 병사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안개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 기사는 황급히 검을 뽑아 들었다.
“습격이다!”
“아, 빨리도 알아채네.”
언덕 아래에서 머쓱해하며 물러섰던 병사가 순식간에 뛰어 올라왔다. 게오르크 기사는 그 빠른 속도에 기겁하며 칼을 뽑아 방어 자세를 취했다.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쾅! 델프릭 힐드가 휘두른 검은 단숨에 게오르크 기사의 검과 투구, 머리통까지 한 번에 박살 내며 가슴까지 파고들었다. 적을 일도양단할 기세로 휘두르는 알데온 검술의 진수였다.
또 다른 게오르크 기사가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알데온 돼지새끼들!”
“게오르크 개새끼들!”
레이나가 똑같이 받아치면서 칼로 내리찍었다. 기사는 그대로 진흙탕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졌다. 기습의 효과는 톡톡했다. 안개비 때문에 누가 기사인지 병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게오르크 기사들은 알데온 기사의 강력한 일격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기사들을 정리하자 병사들은 순식간에 항복했다. ‘높으신 분들’의 싸움에 목숨까지 걸고 싶어 하는 징집병들은 별로 없었다. 델프릭은 간단히 항복을 접수하고 후발 부대로 보냈다.
비슷한 일들이 게오르크 영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작은 병력을 집중해서 행진시키는 대신, 산발적으로 부대를 나눠서 넓은 그물망처럼 넓게 전선을 형성했다. 하나의 부대로 뭉쳐서 강력한 힘으로 적을 분쇄하거나 대규모 회전을 벌이는 이전의 전투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이전까지 방해가 되던 안개비는 그들의 모습을 적당히 가려주었고, 게오르크 군의 허점을 찌르기에 충분했다.
수적 우위에서 압도적으로 밀린 게오르크 군은 이전처럼 ‘자신들의 땅’이라는 이점을 살릴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잘 조직된 게오르크 군이 밀도가 낮아진 군의 틈새를 찔러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그들은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마주했다. 바로 저 안개 너머 병사들이 사실 어제 징집된 농민인지, 아니면 바다 건너에서 천사를 도살하다 온 괴물 성기사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약해 보이는 병사 몇 명을 급습했다가 게오르크 기사들이 전멸하는 사태가 몇 번 벌어지면서 게오르크 군 내부에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안개비 속에 악마가 숨어 있다는 소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