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83)
183화. 엘리온 전투 (2)
최종협상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남은 것은 전쟁뿐이었다.
아무도 협상이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의례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실망하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에델레드를 빼고.
하지만 전쟁을 지휘할 책임이 있는 왕이 침울해져선 안 될 일이다.
“최대한 전쟁을 빨리 끝내봅시다.”
에델레드의 말은 허황한 것이 아니라 양측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함이었다. 단기 결전은 게오르크 반군도 원하는 바였다. 결과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러나 단기 결전을 치르기에 공성전은 최악이다. 보통 공성전은 수비 측에 비해 공격 측의 병력이 3배는 더 필요하다. 그나마도 시체로 산을 쌓아 올려서 공략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다행히 엘릴 신도들에게는 그 나름대로 전통적이고 합리적인 공략 방법이 있었다.
“결투라구요?”
“그렇소.”
모르스가 제안한 공성 방법은 ‘결투’였다.
각 군 대표가 매일 한 명씩 나와 자웅을 겨뤄 보자는 것이다.
패배자는 수모와 상처를 끌어안고, 승리자는 영광과 명예를 갖는다. 적의 사기를 꺾으면서 실력자들을 제거할 수도 있는 일석이조의 방법이었다! 심지어 대단한 검객들이 나서서 결투를 치르게 되면, 그 결과만으로 승패를 결정짓는 경우도 있었다.
‘엘릴 왕국이니까 가능한 일이군.’
엘릴 신도가 아닌 사람들 귀에는 미친 소리로밖에 안 들리겠지만 이곳은 엘릴 왕국이다. 결투를 무시하거나 거절하면 그 자체로 병사들의 사기가 박살 날 것이다. 결투를 받아들이긴 받아들일 텐데, 이 전략에는 중요한 전제가 걸려있었다.
아군이 이겨야 한다는 것.
“음. 게오르크 군은 평균적으로 기사들의 실력이 높다고 들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만큼 승리를 안겨줄 기사가 많습니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이작은 모르스가 이상한 소리를 하기는 해도 아군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병력이 귀한 것을 아는 장군은 좋은 장군이다.
하지만 정말 냉정한 발언에 힐드 남매가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특히 레이나가.
“실례군요. 모르스 장군! 선임 기사 대표로서 용납할 수 없는 발언입니다! 제가 오늘 당장 대표로 결투를 나가겠습니다!”
“앉아 있게, 레이나. 자네는 안돼.”
모르스의 말은 그녀의 자존심을 더욱 건드릴 뿐이었다. 레이나가 머리카락 달린 멧돼지로 돌변하기 직전, 모르스는 정말 의외의 말을 꺼냈다.
“이 결투는 반드시 이겨야 해. 하지만 절대로 정정당당하게 이겨서는 안 되고 비열한 수를 쓰면 더 좋겠군. 그다음 상대방에게 굴욕을 주고 수치심을 느끼게 해야 하네. 할 수 있겠나?”
레이나는 말문이 막힌 표정이었다.
반드시 이기라고? 가능과 불가능을 떠나서 레이나는 일단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다른 건? 정정당당하게 싸운 상대에게 비열한 수단까지 동원해서 이기고 굴욕까지 어떻게 준단 말인가. 백번 양보해서 자신이 비열한 방법으로 이겼다면 상대방의 용기와 성실함에 찬사를 던져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때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제가 나가야 한다는 말이군요.”
모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릴 기사들은 할 수 없다. 이것은 숭고한 결투니까. 하지만 아이작은 할 수 있다. 그는 비열한 수를 써서라도 승리하려고 하는 빛의 법전 신도니까.
아이작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기사들을 위해 설명을 보태기로 했다.
“비열한 방법을 쓰고, 결투 상대에게 굴욕을 주면 적들은 사기가 꺾이기보다 분노할 겁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성에 틀어박혀 있기보다 즉시 나가서 회전을 치르자고 아우성이겠죠. 지휘관이 바보가 아닌 이상 성을 버리고 적과 맞부딪칠 이유가 없겠지만…….”
여긴 엘릴 왕국이다.
자존심 빼면 시체고, 자존심 때문에 시체가 되는 사람들의 나라.
이 나라에서 자존심을 버리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아이작뿐이라고 모르스는 말하고 있었다.
뭣보다 알데온 기사가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비열한 싸움은 적뿐만이 아니라 아군의 사기에도 영향을 주니까. 그러나 아이작은 이교도에 외국인이다. 알데온 군의 수치를 모면해 줄 좋은 핑계였다.
아이작은 모르스가 이런 전략을 내놓았다는 것에 놀랐다. 어느 정도 엘릴 신도가 명예에 미친 빡대가리 멍청이라는 객관화가 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전략이었으니까.
“조금 다른 신앙인들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이 담긴 거 같군요.”
아이작은 약간 항의하듯 말했다.
엘릴 신도들은 전부 정의롭고 숭고하고 빛의 법전 신도들은 죄다 비열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실용주의자 같은가? 심지어 아이작은 진정한 빛의 법전 신도조차 아니었다.
이 작전은 아이작의 명성에 결국 누가 될 것이다.
모르스는 아이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할 수 없습니까?”
“물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아이작은 필요하면 얼마든지 비열해질 수 있는 실용주의자였다. 아까운 병력이 성벽에 부딪혀서 대가리가 깨지는 것보다는 자신이 좀 치사하다고 욕먹는 쪽이 나았다.
다만 아이작은 더 실용적인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
아이작은 엘리온 성채 앞에 선 대전사를 바라보았다.
아이작의 지명, 혹은 협박, 혹은 애원 끝에 나선 사람이었다. 대전사로 나선 자는 갑옷이 걸리적거리는지 자꾸 매만졌지만 벗어던지지는 않았다. 이 역시 아이작의 협박과 애원 덕분이었다.
대전사는 엘리온 성채 앞에서 소리치지도 도발하지도 않았지만, 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두 잘 알고 있었다. 큰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종종 치러지는 의식이기도 했으니까.
화살이 닿는 거리까지 접근했음에도 대전사를 도발하거나 공격을 지시하는 외침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이작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건 비열한 짓이니까.
게오르크 기사들은 곧 대전사가 결투를 신청할 것임을 깨닫고 긴장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느끼며, 대전사는 목을 가다듬었다. 아이작의 반 애원, 반 협박이 담긴 말대로, ‘밥값’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게오르크의 늑대들아. 그 토굴 속에 처박혀 뭘 하고 있느냐? 자기들끼리 흘레붙느라 정신없는 모양이지?”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에 엘리온 성채 위에서 동요가 번져 나갔다. 목소리에 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도발이었다. 예상치 못한 도발에 병사들은 얼떨떨해하다가 이내 내쏟듯이 노성을 토해 냈다. 하지만 대전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을 향해 이런저런 모욕을 내뱉었다.
무수한 욕설과 소음 가운데서, 대전사의 목소리는 단 한 사람의 것인데도 사람들의 귀에 쏙쏙 박혔다.
“게오르크 일족이란 게 무엇이냐? 그러고 보니 혈통을 지키기 위해 근친상간도 마다하지 않는 개족보 가문이라는 말이 있더군. 사실인가? 리안나 게오르크의 짝은 누구로 점지되어 있지?”
“이 돼지 새끼가! 문을 열어라!”
도발은 놀라울 정도로 쉽게 통했다. 성벽 너머에서 말리는 기색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내 성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튕겨 나오듯 중무장한 기사 한 명이 뛰쳐나왔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엘릴 놈들은 섬이 아니라 대륙에 있었으면 이미 진작에 멸종했을 거야.’
두두두두! 빠르게 대전사 근처까지 다가온 기사는 분노를 억누르며 소리쳤다.
“나는 성지수호자인 게오르크 일족의 일원이자 빌론 게오르크의 아들, 트롤 살해자, 깃발 수집자, 베오울 게오르크다! 너는 누구냐!”
긴 호칭에 아이작은 기시감을 느꼈다.
때로는 저런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딱 한 마디의 말이 더 많은 울림과 의미를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하면서.
“그래. 나는 율리히다.”
“율리히? 처음 듣는 이름인데…….”
베오울이라고 밝힌 기사는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율리히가 타고 있던 말을 몰아 들이닥쳤다. 순식간에 접근한 율리히의 모습에 베오울이 기겁하면서 칼을 들어 올렸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율리히의 칼날이 아닌 전마의 커다란 말발굽이었다.
쾅. 말은 단숨에 베오울을 말에서 떨어뜨린 뒤 짓밟았다.
콰득. 심하게 찌그러진 투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놀란 말이 날뛰면서 안장에 발이 엉킨 베오울을 질질 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위망을 빠져나가지는 못하고 성채 앞 진흙탕을 빙글빙글 돌 뿐이었다. 그때까지 베오울은 속절없이 끌려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칼 한 번도 뽑지 않고 상대방을 밟아버린 율리히는 다시 엘리온 성채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머리에 쓰고 있던 투구를 성가시다는 듯 바닥에 집어 던졌다.
“다음에 나올 놈은 칼 정도는 뽑을 수 있게 해주면 좋겠군. 지금부터 한 명을 꺾을 때마다 갑옷을 한 개씩 벗겠다. 부디 내가 발가벗고 싸우는 상황만은 나오지 않길 바란다.”
***
반나절 전.
“결투? 내가 왜 그런 걸 해야 하지?”
“오월의 검께서 제가 내리실 임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중간에 조금 도와주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 그렇지. 그런데 그게 왜? 나는 오월의 검이 아니니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지금 율리히 님은 알데온 군의 식량을 축내고 계시잖습니까. 저는 빛의 법전 신도이니 제게 기부받는 것은 이해받으실 수 있겠지만, 엘릴 신도의 식량을 대가 없이 축내는 것은 괜찮은 일일까요?”
율리히는 습기를 먹어 물렁물렁해진 비스킷을 씹으며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이작의 말이 합리적인지 아닌지 가늠하고 있었다.
물론 천사인 오월의 검은 일방적으로 신도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엘릴 신도들에게라면? 엘릴 신도들은 그녀를 보살필 이유도 기부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율리히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건 내가 엘릴 신도들로부터 정정당당하게 약탈한 것이다.”
“……약탈보다는 그, 그냥 성실하게 밥값을 치르면 어떨까요. 혹시 대가라는 개념에 대해 아십니까? 돈이라든가.”
“물론 돈에 대해 알고 있지. 나는 없지만 저기 지나가는 저놈은 가지고 있을 것 같군. 가져올까?”
아이작은 율리히가 지나가는 귀족을 때려눕히고 돈주머니를 빼앗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보다는 결투를 통해 대가를 치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감히 빛의 법전을 배신한 엘릴 신도들을 때려눕히고 모욕하고 빚까지 갚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민간인인 율리히가 군영에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와 군량을 축낼 수 있는 이유는 ‘아이작의 동행인’이라는 명분 때문이었다. 아무도 그녀의 신분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 정체를 안다면 기겁할 것이다.
그러니 밥값을 해야 한다는 아이작의 말은 일견 타당하게 들렸다.
‘천사에게 고작 기사 몇 명을 쓰러뜨려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오월의 검이라면 저 성벽을 무너뜨리고 그 안에 있는 생명체들의 허리 위쪽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해달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면 반드시, 무조건, 예외 없이 엘릴 쪽에서도 천사가 나타날 테니까. 그러면 비슷한 재앙이 알데온 군에도 일어난다.
대전쟁이 아니면 천사가 어지간해선 지상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특히 내전이라면 더더욱이 천사가 자신들 편을 들어주리란 보장이 없다.
아이작이 필요한 것은 율리히의 ‘적당한 수준의 실력’과 익명성이었다. 아무도 율리히가 누군지 모르니 명예도, 긍지도 없는 싸움에 던져 주기 좋았다. 율리히가 리안나를 꺾어 준다면 좋겠지만 그쯤 되면 저쪽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챌 것이다.
율리히는 군인들이 먹는 저급 와인을 홀짝이고 오늘 취사병이 낚아 온 연어구이를 뜯어 먹었다. 적당히 배를 채운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사랑받는 건 거북해하면서 또 미움받는 건 싫은 모양이지?”
“예?”
“좋아. 알겠다. 네 임무도 멀지 않았으니 대가를 미리 치른다 생각하고 받아주마. 다른 신앙과의 거래는 공정해야지.”
율리히는 호수 너머 비치는 성지 엘리온을 응시하며 말했다.
***
율리히는 어느새 다섯 명째 기사를 쓰러뜨렸다. 이번엔 한 짝의 장갑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제 그녀는 갑옷 안에 받쳐입는 누비옷만을 걸치고 있었다. 게오르크 군에게 ‘너희 따위에게는 갑옷도 필요 없다’는 수모를 주기 위해 하는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냥 갑옷이 불편해서 핑계 대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정말 발가벗고 싸우지는 않겠지.’
가급적이면 정말 발가벗기 전에는 말릴 생각이긴 했지만, 게오르크 군도 그 꼴을 보기 전에는 뛰쳐나오거나 결투를 거부하겠지 싶었다.
전자라면 원하던 바고, 후자라면 사기가 바닥을 칠 것이다.
쓰러진 기사를 게오르크 군 병사가 수습해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사이, 문이 열리며 또 한 명의 기사가 나타났다. 투구를 눌러쓴 상태였지만 익숙한 갑옷을 보고 누군지 바로 알아보았다.
‘리안나?’
총대장이 결투에 뛰어들다니? 율리히는 들고 있던 검을 고쳐잡았다.
그녀가 리안나를 꺾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쯤 되면 엘릴의 천사들도 자신들의 최고 성기사가 무슨 수모를 겪는지 알아차릴 수도 있다.
아이작이 율리히를 다시 불러들이려던 순간, 안개 속에서 예상치 못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양이 울음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