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84)
184화. 엘리온 전투 (3)
율리히는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기사를 응시했다.
보자마자 남다른 기세와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천사로서의 힘은 전혀 쓰고 있지 않았다. 아이작의 부탁 때문에 받아들인 일이지만 검사로서, 검술 스승으로서, 엘릴의 기사들과 검을 겨룰 기회가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런 기회를 천상의 힘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상대가 소드마스터라면.
‘자, 너는 어떻게 나를 즐겁게 해줄 거니?’
율리히는 리안나가 먼저 어떤 수를 보일지 기대하며 기다렸다. 실망시키기 전까지는 공격 기회를 양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리안나는 약간 기묘한 자세로 말을 타고 다가왔다. 칼은 축 늘어뜨리고 품속에는 무언가를 안은 듯한 모양새.
그 순간 율리히는 리안나가 품속에 뭘 안고 있는지 발견했다.
야옹.
쾅. 그 순간 율리히가 튕겨 나가듯 뛰어올랐고, 그녀가 타고 있던 말은 그 힘에 풀썩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율리히는 거의 성벽 높이만큼 뛰어올랐다가 굉음과 함께 땅에 착지했다. 그녀의 모습에 알데온 군과 게오르크 군 모두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리안나는 품속의 고양이의 턱을 긁어 주며 다가왔다. 고양이는 그릉거리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오월의 검께서 왜 이 먼 곳까지 와서 장난질이십니까?”
그녀는 미소 지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율리히는 선명하게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얼굴로 쏘아붙였다.
“내가 오월의 검이란 걸 어떻게 알았지?!”
“숨기실 생각이었습니까? 그럼 이름을 바꾸는 정성이라도 보이셨어야지요. 게다가 검술부터가 빛의 법전 성기사단의 정석 그 자체인데.”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대화한 탓에 양쪽 군대는 잘 듣지 못했지만, 아이작은 들을 수 있었다. 아이작도 리안나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했다.
율리히는 리안나의 말을 무시하고 쏘아붙였다.
“싸움터에 고양이를 데리고 오다니!”
“율리히 님이 이 가엾은 것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결투 상대는 제가 아니라 이 고양입니다. ‘야옹 기사’라고 해두죠. 이얏호응.”
리안나가 ‘야옹 기사’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율리히는 씨근거리다가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고양이에 무슨 트라우마가 있는지는 몰라도 리안나는 그 약점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았다.
혹은 엘릴의 천사 중 누군가가 속삭여 줬거나.
아이작은 천사의 개입 가능성을 더 높게 평가했다.
“율리히 님, 교체입니다!”
어느 쪽이든 이 전쟁이 천사들의 싸움이 되기 전에 수습해야 했다. 아이작은 급히 말을 타고 앞으로 달려 나왔다. 율리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튕겨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아이작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리안나가 소리높여 외쳤다.
“알데온 군은 외국인 이교도들 엉덩이 뒤에만 숨어 있는가? 알데온 가문 아래 모인 기사 중 진짜 기사다운 기사는 한 명도 없는 모양이구나! 언제부터 엘릴의 전장터가 용병들의 도박장이 되었지?”
***
즉각 알데온 기사들 사이에서 노여움에 찬 원성이 터져 나왔다.
알데온 군 사이사이에서 산발적으로 기사들이 뛰쳐나왔다.
“나다! 나 카르바너 중보병대장 달튼이 내가 널 상대하겠다!”
“힐스너 기사단의 포효를 들어라!”
“알데온 기사단, 레이나 힐드! 결투를 신청한다!”
아이작은 고함 소리를 들으며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귀족 기사들은 둘째치고 정작 말려야 할 알데온 기사단까지도 저 난리에 합류하면 어쩌란 말인가.
모르스 기드온은 포기한 듯 초탈한 표정이었다.
아이작은 모르스의 전략이 글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자신이 나갔어야 했다.
‘……천사가 고양이 때문에 도망칠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냐고!’
하지만 그 역시도 곧 초탈해질 수밖에 없었다.
여긴 엘릴 왕국이다. 여기서 이상한 사람은 아이작이다. 그 역시도 여기가 엘릴 왕국이라는 것을 알고 모르스의 전략을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리안나는 뛰쳐나오는 기사들을 보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한 명씩 상대할 필요도 없는 것들이군. 한꺼번에 와라.”
기사들이 노성을 터뜨리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가장 앞에 아이작이 있긴 했지만, 곧 이곳이 난장판이 될 것은 분명했다. 아이작은 리안나가 이 합공을 어떻게 상대할지 생각했으나 그녀는 곧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바로 몸을 돌려 성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도망가는 듯한 모습에 알데온 기사들은 더욱 눈에 불꽃을 튀기며 달려갔다. 그들 눈에 소드마스터를 꺾은 검사라는 명예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아이작은 그 모습에 기겁하며 외쳤다.
“잠깐, 이 머저리들아! 네놈들 눈에는 리안나만 보이고 성은 안 보이냐?!”
당연히 보였다. 그러니까 더더욱 성에 들어가기 전에 따라잡아야 한다는 것이 기사들의 논리였다. 엘리온 성채의 성문이 다시 열렸다. 그러나 리안나는 그 안으로 뛰어들기 직전 방향을 급하게 꺾더니, 품에 안고 있던 고양이를 성벽 위로 던졌다. 고양이는 수십 미터 위를 훌쩍 뛰어 안전하게 안착했다.
리안나는 그대로 방향을 돌려 달려오는 기사들을 향해 마주 달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 성채 안에서 엘리온 기사단의 기사들이 일제히 뛰쳐나왔다. 알데온 군의 기사들은 마주 달려오는 기사들을 보고도 당황하기는커녕 더 크게 포효했다.
“엘릴! 엘릴! 엘릴!”
아이작은 이를 악물고 더 빨리 말을 달렸다.
쾅. 쇠가 찢어지는 굉음들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제일 먼저 부딪친 것은 아이작과 리안나의 칼이었다. 피곤한 듯 축 처진 리안나의 눈매가 가늘게 웃고 있었다.
“그쪽도 장난 아니죠?”
쾅. 루미아드가 뿜어내는 냉기에 달아올랐던 루앗딘 열쇠의 단면이 거뭇하게 식었다. 같은 성물이라도 격은 루미아드 쪽이 더 높았다.
어쨌든 엘릴이 손에 들고 쓰던 무기니.
“싸워라! 엘릴께서 이 전장을 주관하신다!”
등 뒤에서 모르스가 목 터지라 지휘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틈인지 알데온 군의 병사와 기사들 거의 전부가 일제히 돌격해 게오르크 군과 충돌하고 있었다. 앞서 나갔던 기사들 바로 뒤를 쫓아왔던 것이다. 수많은 병사들이 일제히 충돌하면서 엄청난 압력에 쇠가 찢어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작은 모르스의 전략이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르스는 엘리온 성채에서 게오르크 군을 끌어내고 싶어 했다. 과정은 엉망진창이었지만 어쨌든 성공했다. 리안나와 함께 싸우기 위해 게오르크 군이 엘리온 성채 밖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아니, 리안나는 받아 줄 수밖에 없었다. 성채 안에 쌓인 분노와 울분은 이미 임계치였기 때문에, 이렇게 율리히가 도발하지 않았다면 자기들이 먼저 뛰쳐나갔을 판이었다.
결국 판은 깔렸고 전투는 벌어졌다.
모두가 원하던 대로.
콰드드드득!
아이작은 칼날이 맞닿을 때마다 얼어붙을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쳐냈다. 다행히 리안나는 루미아드의 능력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녀의 냉기는 피아를 가리지 않는다. 이 수많은 병사들이 난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성검의 냉기는 오히려 아군 피해를 키울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건 아이작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살기 넘치는 검기는 스치는 것만으로도 할퀴고 물어뜯는 듯한 흔적을 남긴다. 둘은 결국 적당한 수준으로 자제하는 수밖에 없었다.
리안나의 목을 따는 것보다 리안나를 이 자리에 붙들어 놓는 데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히 아이작의 신경은 전장 전역으로 번졌다.
어지러울 정도의 난전.
발목이 찰랑거릴 정도의 핏물.
귀가 아플 정도로 터져 나오는 엘릴 기도문들.
“머리를 내놔라!”
멀리서 말 위에 올라탄 레이나 힐드가 게오르크 기사의 목을 찔러대는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 그녀의 옆구리를 창으로 쑤셔대고 있는데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상대의 목은 이미 부러진 것 같았다.
“여덟, 아홉!”
다른 한쪽에서는 델프릭 힐드가 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병사의 키가 손바닥 하나만큼 낮아졌다. 이런 난전에서는 지휘도 소용없다. 상대편도 지휘할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오로지 증오와 폭력의 분출만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내 형제의 불명예를 씻을 핏물을 내놔라!”
빌론 게오르크가 포효하며 창을 휘둘렀다.
무시무시한 완력으로 휘두른 창끝에는 기사의 머리통과 허리 아래가 남지 않은 병사가 꽂혀있었다. 빌론의 몸통에도 창이 두 개나 꽂혀 있었지만, 그는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았다. 창을 들어 올리자 핏물이 그의 머리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정말 핏물로 목욕을 하는 것 같았다.
엘릴의 영광을 칭송하는 찬송가가 드높게 울려 퍼졌다.
그 찬송가에 비명이 반주하듯 섞였다.
비명 때문에 신음과 흐느낌이 묻혔다.
그보다 더 아래에는 시체들의 침묵이 있었다.
아이작은 아무도 듣지 않는 그 고요함에 귀를 기울였다.
엘릴 왕국의 멸망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
어떤 의미에서는 계획적, 어떤 의미에서는 우발적으로 벌어진 회전은 오후가 되어서야 끝났다.
후방에서 게오르크 기병대가 기동하는 모습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들은 모르스가 퇴각 명령을 내리면서였다. 덕분에 일단은 게오르크 군의 판정승이 되긴 했지만, 피해 자체는 비등했다.
‘아니지. 사실상 알데온 군의 승리지.’
게오르크 군은 성채를 끼고 싸웠으면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서 알데온 군에 피해를 강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안나가 뛰쳐나와 전투가 벌어진 탓에 게오르크 군은 예상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이는 전략의 승리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과연 게오르크 군도 그렇게 생각할지 의문이었다.
“게오르크 자식들, 잘 싸우던데요! 역시 명불허전이네요!”
막사의 병상에 드러누운 레이나가 호쾌하게 팔을 흔들며 말했다. 복부가 뚫려서 내장까지 삐져나왔지만, 멧돼지 같은 체력과 기적의 힘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 자신이 기적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있을 수 있었던 행운이었다. 상당수 병사와 기사들은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병상의 환자들도 레이나와 비슷한 텐션이었다. 아이작은 병상을 돌아다니며 치료를 돕거나 사기를 돋우며 병사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게오르크 늑대 이빨이 날카롭다더니 사실이군요. 제 팔까지 뜯어갈 정도라니.”
팔꿈치 아래가 떨어져 나간 병사가 호쾌하게 말했다.
“비열한 반역자라고만 들었는데 오늘 보니 엘릴 신도다운 깡이 있더군요. 성벽 밖으로 뛰쳐나와서 칼을 휘둘러댈 줄이야! 미친놈들 같아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왼쪽 눈과 두개골이 파열되어 얼굴 전체를 붕대로 칭칭 감다시피 한 기사가 말했다. 조금만 칼끝이 잘 들었으면 두개골이 아니라 머리가 반토막 났을 텐데도.
아이작은 이런 반응들이 고통과 두려움을 잊기 위한 위장인가 했지만, 곧 진심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여기만이 아니라 엘리온 성채의 병상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전쟁광 바보천치들은 싸우면서 친해지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아이작은 애새끼도 아니고,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출렁거렸지만 간신히 삼키고 묵묵히 치료에만 전념했다. 칼라일 성해포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약간의 포장과 거짓말과 눈속임이 들어가야 했지만, 헤사벨도 치료에 큰 도움이 되었다. 육신의 쾌락을 관장하는 붉은 성배의 기적은 치료에도 유용했다.
어느 정도 환자 수습이 끝나고 아이작이 막사 밖으로 나왔을 때, 에델레드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아이작은 그가 오늘의 전장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싶어서 함께 걸었다.
“어때요, 선생님. 싸우면서 친해지는 애새끼들 같지 않습니까?”
제일 먼저 그가 꺼낸 말에 아이작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군요.”
하지만 싸우기 전보다 오히려 게오르크 군에 대해 호의적인 말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두려움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오히려 상대방을 칭찬하고 포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이작이 생각하기엔 조금 달라 보였다.
“저도 오늘 보고 느꼈습니다. 이 천치들에게 필요했던 건 대화의 장이 아니라 해소를 위한 폭발구였을지도 모른다고요.”
에델레드는 오늘의 전투가 벌어진 엘리온 성채 앞쪽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리안나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일부러 성채 밖으로 병사들을 빼낸 겁니다. 너희가 상대하는 자들이 욕심 가득한 돼지들이 아니라 피와 살점을 가진 같은 엘릴 신앙인 동포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아이작은 피곤에 찌든 리안나의 얼굴과 그녀가 했던 말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곧 결론을 내렸다.
“아니…… 그냥 내버려 두면 자기들끼리 치고받을 게 분명하니까 그런 거 같습니다만.”
“……뭐, 아무래도 그 가능성이 제일 높긴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