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85)
185화. 엘리온 전투 (4)
리안나는 화해를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아이작은 그것만큼은 확신했다. 화해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이렇게 행동할 수가 없다.
이대로 양측이 죽도록 치고받다가 둘 다 기진맥진한다면 그때 가서야 화해를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이들은 서로 부딪치는 걸로 서로의 분노를 마모시키고 있으니까.
이게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도 엘릴 왕국이 멸망하지 않고 형태를 보존해 온 방식이고, 지구의 역사에서도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다.
리안나는 그 전통을 잘 따르는 것뿐이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희생 없이 평화를 이루고 싶어하는 에델레드가 이례적인 거지.’
그리고 지금 흐름으로 보건대 결국 리안나의 의도대로 갈 가능성이 높았다. 리안나도 에델레드도 평화를 원하지만, 수백 년 전통과 윗대들, 사회와 전통의 압박을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로잘린드 부인의 용서와 화해가 숭고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선생님 생각하시기에는 어떻습니까? 결국 이대로 이 땅에 수천 명도 넘는 국민들의 피를 제물로 바쳐야 전쟁이 끝날까요?”
에델레드는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아이작은 그의 심정은 이해했지만, 한층 더 암울한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리안나가 그리는 미래대로 굴러간다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수한 피가 흐르겠지만, 양쪽 다 결국 한 쪽을 전멸시켜서 끝내겠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솔트아인 때와는 달리 게오르크 일족은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겠다는 게 전부고, 알데온 왕가는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타협의 여지가 있었다.
“제 생각을 물으시는 거라면.”
아이작은 가볍게 운을 뗀 뒤 입을 열었다.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안 좋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안 좋아진다고? 양측이 기진맥진할 정도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 있단 말입니까?”
“폐하께서는 그 끝에 화해가 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간과하신 것이 있습니다. 이 전쟁을 치르고도 여전히 최악의 사이로 남을 가능성이죠. 여명군 때문입니다.”
“여명군…….”
에델레드는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게오르크 일족에 협력하는 귀족들 중에는 여명군 참전을 꺼리는 자들이 있다. 아이작은 그것이 고립주의를 주장하는 천사의 소행일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건 아이작만 알고 있는 것이지만, 엘릴의 신탁이 내려오지 않게 막고 있는 것도 그 천사였다.
아이작의 목적은 성지 엘리온으로 가서 의식을 치르고 엘릴과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 위험이 따르는 일이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 일을 마치기 전까지는 에델레드에게 여명군 참전을 강요할 수 없었다. 아무리 쌈박질을 즐기는 엘릴 교도라 해도 여명군은 바다 건너의 일, 낯선 이교도끼리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아이작이 엘릴 교단 시나리오를 해결하기 전까지 여명군 참전은 요원한 일이다.
“……여명군 참전을 꺼리는 자들이 있다고 듣긴 했습니다. 사실 제 신하들 중에서도 회의적인 자들이 있더군요.”
에델레드는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그렇지. 그러면 여명군 참전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한다면 어떻…… 아니,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군요. 음.”
에델레드는 아이작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어서 깜빡했지만 아이작은 결국 바다 건너 빛의 법전의 신도이자 게르토니아 제국 황제의 명령을 받아 파견된 사절이다. 그리고 아이작의 목적은 하나다.
에델레드를 도와 왕권을 수복하고 여명군 참전을 이끌어 내는 것.
여기서 에델레드가 여명군 참전을 거부해 버리면 아이작이 이곳에서 피땀 흘려 가며 싸울 이유가 없어진다.
아이작은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너무 깊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우리가 리안나의 생각대로 따라갈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아, 그렇지요? 역시 선생님입니다.”
사실 에델레드의 왕권을 인정받는 것도, 여명군 참전을 결정하는 것도 엘릴의 신탁을 받으면 모두 해결될 문제다. 엘릴이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는 문제기 때문에 성지 엘리온까지 갈 수 있다면 어려울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작이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사실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사실 이 전쟁에 다른 세력이 개입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게오르크 군과 전투를 시작한 이후부터 쭉 증거를 수집 중인데, 아무래도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군요.”
“다른 세력? 누구 말입니까?”
“지금 이 전쟁의 이면엔 게오르크 군보다 더 위협적인 적이 숨어 있거든요.”
아이작은 일부러 대답해 주는 대신 빙빙 돌려 말했다. 그걸 고민하는 것도 에델레드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에델레드는 왕이 된 이상 시야를 국내 말고도 좀 더 넓혀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작은 시선을 돌려 호수 건너편 성지 엘리온을 응시했다.
“성지 엘리온은 지금도 위협받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수복해야 해요.”
***
아이작의 예상대로 엘리온 성채 내부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화끈한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게오르크 군의 기사들은 방금 전투의 여운을 떠들면서 각자의 전공을 자랑했다. 전투 시작 때 율리히에게 모욕당했던 일들은 모두 깨끗하게 잊은 모습이었다.
“알데온 놈들, 싸우다가 허겁지겁 도망치는 꼴 봤나? 먼 곳까지 걸어와서 도망칠 거면 뭐하러 왔는지!”
“으하하! 그래도 도시에 눌러사는 샌님들인 줄 알았는데 힘 좀 쓰던데! 알데온 기사들이랑 힘겨루기를 하지 말라더니 왜 그런지 알겠더라니까!”
“이렇게 격하게 한바탕한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군. 거의 5년쯤 되지 않았나? 오랜만에 가슴 뛰는 전투를 해본 느낌인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목소리들 때문에 성채 전체가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아니, 실제로 수많은 기사들이 모여 자웅을 겨루는 전쟁은 일종의 축제라고 할 만했다. 기습과 매복, 전략을 통해 적을 몰아넣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역시 엘릴 신도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대규모 회전이다.
이번에는 공성전이어서 화끈한 회전은 안 나올 줄 알았는데 리안나가 의외의 명령을 내린 덕분에 한바탕 맞싸움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축제 같은 분위기 속에서도 침체된 공기가 감도는 공간이 있었다.
기사들이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무시하는 중환자 병동이었다.
이곳이야말로 가장 격렬하게 전투를 치른 자들이 모이는 공간이었지만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전공을 세웠는지, 얼마나 강한 적을 상대했는지 떠들 수 없었다. 엘릴의 기적으로도 치료가 어려운 상태의 환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바닥에 가득 누워 있는 환자들 대부분은 병사들이었다. 기사들은 가장 격렬한 전장에서 빨리 죽거나 혹은 중환자 병동에 눕느니 동료들의 손을 빌려 자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징집병에 불과한 병사들은 어떻게 해서든 살고 싶어 했다.
신음과 흐느낌으로 가득한 병동에서 사제 몇 명만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축성하거나, 치료하거나, 혹은 시신을 염하는 의식을 치러 주었다.
빌론 게오르크는 그곳에서 가만히 한 기사의 손을 잡아 주고 있었다. 병사들로 가득한 침상 가운데 거의 유일한 기사는 턱이 완전히 뭉개지는 부상을 입었다. 어떻게 목숨은 붙어 있었지만 오늘을 넘기기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무리해서 뛰어들지 말라고 했잖느냐.”
빌론은 가만히 자신의 아들, 베오울 게오르크를 향해 중얼거렸다. 베오울은 뭐라고 웅얼거렸지만 피와 가래가 섞여 끓는 소리가 날 뿐이었다.
빌론은 자신의 아들을 이렇게 만든 상대를 원망하지 않았다. 전장에서는 온갖 일이 벌어지고 무슨 일을 당하든 그것은 엘릴의 뜻이다. 뒤통수를 맞든, 일 대 다수로 싸우든, 시체에 걸려 넘어지든.
빌론 역시 같은 운으로 몇 번이나 살아남고 몇 번이나 적을 죽여 왔기에 적을 원망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원망스러운 점이 있다면 일격에 아들을 죽이지 않고 살아서 고통받게 했다는 점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 동료나 친구들이 목숨을 끊어 주지만, 빌론은 중환자 병동으로 데려왔다.
“아직도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빌론은 베오울의 손을 꼭 잡은 채 물었다. 베오울은 아버지의 말에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피에 젖은 뺨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점점 붉어졌다.
빌론은 이미 수없이 본 모습이었다. 죽음조차 두렵지 않다며 호기롭게 나갔던 젊은 기사들이 정작 엘릴의 전장을 눈앞에 두고 겁에 질리는 모습.
죽음을 앞둔 기사들도 치욕스러워하고, 동료들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때문에 차라리 일찍 목숨을 끊어 주는 것이 배려이자 용기였다.
그의 아들 역시도 늘 영광스러운 전사를 부르짖었지만, 지금에서야 그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베오울은 살고 싶어 했다. 사후세계에서의 영광이 아닌 이 땅에서 영광을 누리고 싶어 했다.
“걱정 마라, 아들아.”
빌론은 몸을 숙여 베오울의 이마에 이마를 맞댔다. 잠시 뒤,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살피던 사제 한 명이 다가와 빌론에게 물었다.
“의식을 진행할까요?”
“부탁합니다.”
사제는 베오울 옆으로 다가와 성유를 흩뿌리고 향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의식이 끝난 뒤 죽은 병사들 대부분은 매장될 것이고, 격이 높은 귀족의 자제들은 화장을 치를 것이다.
하지만 베오울은 그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을 것이다.
빌론은 음울한 눈으로 다시 명예를 되찾을 전장에 대해 생각했다.
***
이후로도 비슷한 전투가 몇 번 더 반복되었다.
알데온 군의 도발과 결투 신청, 게오르크 군의 조롱과 싸움. 그들은 마치 짜고 치는 연극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 피를 흘리고 전의를 불태웠다.
아이작은 이 싸움이 리안나에 의해 정교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실 수성 측인 게오르크 군이 거의 일방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에 양측이 피를 흘린다는 사실 자체가 리안나의 배려였다. 그렇다고 게오르크 군의 손해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전황 자체는 게오르크 군의 판정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데다, 전투 후 요새로 물러날 수 있는 게오르크 군의 사기가 더 높았다.
‘애초에 악감정은 게오르크 군이 더 강했지. 이런 식으로 일족의 자존감을 충족시키고 분노를 마모시키려는 계획일 수도 있겠군.’
아이작은 전황을 분석하며 생각했다. 리안나의 생각에 끌려가는 것이 언짢기는 했지만 이게 엘릴 왕국의 ‘전통적인’ 갈등 해소법이라면 이 정도는 감안해야 했다.
‘엘릴 왕국만의 싸움이라면 그렇겠지만…….’
문제는 이 싸움이 기사들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알데온 왕가의 엘릴 통일은 여명군 참전을 뜻하며, 여명군 참전은 엘릴 왕국이 이전의 고립을 깨고 다른 신앙들과 이해관계에 얽힌다는 뜻이다. 발트제메르 황제가 아이작을 파견했던 것처럼, 다른 이익집단의 개입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아이작은 리안나가 그것까지 감안하고 있을지 의문이었다.
“우익! 우익이 뚫린다!”
모르스가 쉰 목소리로 포효하며 병력을 이동시켰다. 후방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긴급히 균열을 메웠다. 에델레드는 긴장한 안색으로 싸움이 벌어지는 전장을 주시했다. 왕으로서 그의 역할은 사기진작용 토템뿐만 아니라, 적을 위협하는 용도도 있었다.
어느 한쪽이라도 심한 피해가 날 경우 에델레드가 칼드부흐를 들고 참전할 수도 있다는 압박감은 리안나의 참전조차도 자제시켰다. 덕분에 회전은 온전히 인간만의 싸움이 되어 있었다. 몇 번 기적적인 업적이나 위업을 달성하는 기사들도 있었지만, 전황 자체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모르스 장군님, 게오르크 기병대가…….”
“또? 이 빌어먹을 놈들…….”
모르스는 부관의 보고를 듣고 욕설을 중얼거렸다. 알데온 군이 번번이 판정패를 당하는 이유는 후방에서 자꾸 교란 중인 게오르크 기병대 때문이었다.
놈들은 공격을 가하지도 않고 모습을 간간이 드러내며 신경을 건드릴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모르스는 같은 수에 몇 번이나 당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모르스와 델프릭이 눈을 마주쳤다.
“엘릴이여, 영원하라!”
델프릭이 갑자기 크게 포효함과 동시에 알데온 군의 공세가 갑작스럽게 기세를 올렸다. 슬슬 전장이 소강상태가 되어 가던 데다, 이번에도 알데온 군이 점진적으로 후퇴할 것이라 점쳤던 게오르크 군은 갑작스러운 공세에 휘청거렸다. 델프릭과 레이나를 선두로, 내일이 없을 것처럼 맹렬하게 공세를 밀어붙이자 알데온 군 좌익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제야 게오르크 기병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전히 전방에만 집중하는 알데온 군은 빈틈투성이였다. 기병대가 두들기는 순간 순식간에 전열이 와해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게 바로 모르스가, 그리고 아이작이 바라던 바였다.
두두두두두! 게오르크 기병대가 지금만을 기다렸다는 듯 알데온 군 후방을 향해 돌진해온 순간, 후방의 숲속에서 갑작스럽게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갔다. 게오르크 기병대 몇몇은 그 모습을 보고 기이한 기시감을 느꼈다.
아이작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똑같은 수에 또 당하는군.”
쾅! 아이작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선두의 기병대장의 목을 베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