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91)
191화. 죽음을 이끌고 (1)
“아이작!!”
에델레드가 경악하며 달려왔다.
결투를 지켜보던 게오르크 군의 기사들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달려왔다. 아이작은 리안나를 안아 올려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에델레드는 창백한 표정으로 아이작에게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하십시오. 폐하.”
아이작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결투는 신성한 것입니다. 직접 싸움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면 결투에서 ‘군중’의 응원이나 야유는 엘릴께서 간접적으로 행사하시는 변수로 간주됩니다. 먼저 끼어든 것은 폐하였고, 거기에 정신이 팔린 것은 리안나입니다.”
아이작은 빠르게 쏘아붙여 에델레드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에델레드가 이렇다 할 항변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게오르크 군의 기사들이 달려왔다.
게오르크 군의 기사 중 하나가 복잡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성배기사님.”
아이작은 그 기사가 리안나 다음으로 엘리온 성채를 책임지는 직책의 기사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승부에 대한 승복을 선언했다는 것도.
“이름이?”
“라바드 게오르크, 엘리온 성채의 백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아이작은 그의 외모와 나이대를 보아 리안나의 동생쯤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충분히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리안나를 맡겼다. 그들 역시 수많은 부상자들을 돌본 경험이 있었기에, 리안나의 상태가 위중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릴께서 우연히 제게 변덕을 부리셨을 뿐입니다.”
아이작은 천연덕스럽게 겸손을 표했다. 게오르크 군 기사마저 결투의 결과에 순순히 승복하자 에델레드는 더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아이작은 에델레드를 달래듯이 속삭였다.
“페하께서 무슨 달콤한 말을 속삭인다 한들 리안나는 귓등으로도 안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당황하게 하는 데는 성공하셨으니, 이정도 부상으로 끝낼 수 있었지요. 사실상 폐하께서 리안나를 살리신 겁니다.”
에델레드의 표정이 다시 복잡해졌다.
그렇다 한들 이번 결투는 그의 마음속에 오래 남을 것이다. 하지만 천사의 말마따나, 세상이 그렇게 말랑말랑하지는 않다. 더군다나 리안나처럼 완성된 존재라면 더더욱.
리안나가 깨어나더라도 아이작과 똑같은 말을 하리라는 것을 깨달은 에델레드는 결국 따지기를 포기했다.
이미 정해진 결투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었다.
“멋대로 끼어들어 미안하오, 성배기사.”
“아닙니다. 하지만 덕분에 계획대로 된 것 같군요.”
“계획?”
아이작은 업혀 가는 리안나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유혈과 폭력은 사랑을 만들어내는 법이거든요. 피폐하고 마음 약해진 상태에서 에델레드 페하의 고백을 받았으니 오래 기억에 남을 겁니다.”
물론 아이작의 처음 계획은 갈등과 분쟁을 조장하다가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사건을 만들어 화해 무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불사교단의 개입으로 돌고 돌아오긴 했지만 에델레드의 공백 공격으로 극적인 사건을 만들 수 있었다.
모두 에델레드 덕분이다.
아이작의 말에 에델레드의 얼굴이 벌게졌다.
“나는 그런 계획에 찬성한 적 없…….”
“쉿. 얼마나 진심이었는가는 상관없지요. 어쨌든 지금 이보다 더 나은 결과를 뽑아낼 수도 없을 겁니다. 일단 서둘러 성지로 가도록 하지요.”
아이작은 엘리온 성채를 돌아보며 말했다. 알데온 군이 빌론을 충분히 오래 잡아 두길 바랐지만, 빌론이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그리 오래 잡아 두진 못할 것이다.
에델레드는 이제부터 진짜 목적지가 코앞이라는 것을 알고 다른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여기서부터는 나와 성배기사만 방문하도록 하겠다. 나머지는 이곳을 지키도록.”
“예.”
***
엘리온 성채에 남아 있던 기사들은 황망한 표정으로 리안나를 치료했다. 이미 기초적인 응급조치는 아이작이 전부 한 덕분에 그들이 할 것이라곤 리안나의 쾌유를 비는 기도밖에 없었다.
물론 그 기도는 정말로 효과가 있는 치유 기적이었지만.
바로 어제까지 막아서던 에델레드와 아이작을 이대로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들도 생각이 복잡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리안나가 성배기사 아이작과 결투한 결과였다. 그 누가 승복하지 않겠는가.
승부 직전에 에델레드가 굉장히 신경 쓰이는 말을 하긴 했지만, 이는 당사자들이 알아서 할 문제였다.
라바드는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장군님을 방으로 옮겨라. 상처를 씻을 물을 준비하고…….”
그때 정문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진득한 피비린내가 확 밀려 들어왔다.
두두두두…… 묵직한 소리와 함께 피투성이가 된 기사들이 다 죽어 가는 말들과 함께 들어왔다. 라바드는 너덜너덜해진 피투성이 깃대를 보고 그들이 게오르크 기병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은 영광스러운 전투를 마치고 왔다기보다 지옥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듯한 몰골이었다.
그때 한 기사가 찌그러진 투구를 벗어 던졌다.
“빌론 숙부님? 돌아오셨습니까?”
빌론의 충혈된 눈이 라바드를 응시했다.
라바드는 빌론을 비롯해 기병대 거의 전부가 이상한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떤 수라장을 헤쳐나왔는지는 몰라도 전부 피와 살점에 지독하게 젖은 상태인 데다, 팔다리 어딘가가 떨어져 나가고, 심지어 몸에 창이나 칼, 화살 따위를 잔뜩 꽂은 기사들마저도 보였다. 살아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리안나가 죽었나?”
쇠를 긁는 듯한 빌론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라바드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급히 가로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성배기사와 결투를 했습니다. 리안나 장군님께서 패배하셨기 때문에 승복하고 성지 엘리온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빌론은 라바드의 말에 침묵하다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곤 성큼성큼 리안나를 향해 다가갔다. 라바드는 어째선지 몰라도 빌론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고도 다른 기사들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린 건지 급히 다가왔다.
“숙부님, 죄송하지만 리안나 장군님께서는 요양이 필요하신 상태라…….”
그러나 빌론은 성큼 다가와 라바드의 얼굴을 콱 움켜쥐고 내동댕이쳤다. 즉시 여기저기서 칼 뽑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게오르크 기병대의 기사들도 칼을 뽑아 들었다.
“멈춰! 멈춰라!”
라바드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면서도 내분이 일어나지 않도록 서둘러 수습했다. 그러나 빌론은 상잔이 벌어져도 신경조차 쓰지 않겠다는 듯, 리안나에게 가까이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리안나.”
리안나의 상처는 깊었다. 쉽게 눈을 뜰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리안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면서 열렸다.
그녀의 눈에 일순간 반가움이 담겼다.
“숙부님…… 살아 돌아오셨군요.”
“리안나, 나와 계약하자.”
다짜고짜 나온 빌론의 말에 리안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시선이 빌론을 넘어, 그의 뒤에 있는 피투성이 기사들로 향했다.
그녀는 한눈에 그들 중 멀쩡하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기사들이 몇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절망했다.
대체 이 자는 얼마나 많은 엘릴 기사들을 타락시켰단 말인가?
“숙부, 당신은 대체…….”
“지금이라도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다, 리안나! 네 아비를 죽인 왕에게 능욕당하고, 이교도와의 결투에서 패배하고, 성지를 침탈당한 성지수호자로 남을 셈이냐!”
빌론은 준엄하게 꾸짖듯 리안나에게 소리쳤다.
리안나는 입을 다물었다. 빌론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녀에게 부여된 역할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자신은 최선을 다했지만, 상대는 강했다. 오히려 품위를 지키지 못한 것은 자신이었다.
“아버지는 자살하신 겁니다. 숙부님.”
리안나는 안쓰럽다는 듯 빌론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명예롭지 못한 명령을 거부할 용기가 없어서 명예를 버리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용서를 구할 용기가 없어서 자살하셨지요. 애초에 아버지께서 잃으신 것은 명예가 아니라 용기였습니다.”
빌론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감히……!”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숙부님도 이미 게오르크 일족에게 명예 따윈 없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가 없으신 것처럼 보이는군요.”
리안나는 주먹으로 빌론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빡. 코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빌론의 몸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리안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배를 움켜쥐었다. 아이작에게 찔린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있었다.
움직일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었다.
진작에 했어야만 했던 일.
“너 같은 꼰대새끼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일이 있었지.”
리안나는 다시 일어나려는 빌론의 얼굴을 또 한 번 후려갈겼다.
빡, 퍽! 배가 관통당한 중상자가 건장한 기사를 두들겨 패는 광경, 그것도 가주라고는 해도 일족의 어른을 두들겨 패는 광경을 기사들은 넋 놓고 지켜보았다. 리안나가 얼마나 전통을 중시하고 어른들을 극진하게 모셨는지 알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훅, 후욱, 후욱.”
리안나는 식은땀을 비 오듯 쏟아 내며 쓰러진 빌론을 내려다보았다. 지쳤다기보다는 상처가 너무 커서 더 이상 주먹을 휘두를 수 없는 것에 가까웠다. 그제야 라바드가 급히 달려와 리안나를 말렸다. 빌론이 아니라 리안나가 걱정되어서였다.
“장군님. 빌론 게오르크는 따로 구금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일단 요양을…….”
“그래…….”
리안나가 힘없이 대답하며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그 순간, 그녀는 가슴 쪽에서 격한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물끄러미 자신의 가슴에 꽂힌 단검과 그 단검을 손에 쥔 빌론을 바라보았다.
라바드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암살이다!”
기사들의 성난 고함을 들으며, 리안나는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숙부님. 여명군에서 너무 안 좋은 것들을 배워오신 듯합니다…….”
“미안하다. 리안나.”
빌론은 단검을 비틀어 꺾으며 그녀의 상처를 더욱 크게 벌렸다. 라바드가 소리를 지르며 칼을 뽑아 빌론을 향해 내려치려 했다. 그러나 어느새 달려온 기병대원 한 명이 그의 가슴을 걷어차 쓰러뜨렸다. 기병대원들이 창칼로 잔류병들을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이미 죽음을 넘어온 기병대원들을 당해 낼 수 있는 기사들은 없었다.
“너라면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빌론은 허물어지는 리안나를 받아내며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은 설득할 시간이 없구나. 지금은 네 칼과 소드마스터가 필요하니까.”
***
리안나의 몸이 완전히 허물어져 바닥에 널브러졌다.
소드마스터이자 게오르크 반군의 수장이었던 자의 허망한 죽음이었다. 빌론은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토록 이런 상황만큼은 피하기 위해서 애써 왔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 해서라도 알데온 왕가의 씨를 말려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들이 의미 없게 되어 버린다.
“빌론 님, 잔류병들 제압이 완료되었습니다.”
“음. 쓸데없는 사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라.”
“예.”
빌론은 이제 사실상 배교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여전히 자신이 엘릴 신도라고 믿었다. 기만에 불과할지 몰라도, 설령 언데드가 되어도 그는 그렇게 믿을 것이다. 그에게 신앙이란 천국이 아니라 지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철학이었다.
그의 계획을 위해서는 더 많은 시체가 있으면 유리하겠지만, 어제까지 어깨를 나란히 하던 자들한테서 쓸데없이 피를 볼 생각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에델레드뿐이다.
빌론은 곁에 놓여있던 리안나의 검, 성검 루미아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루미아드를 손에 들자마자 끔찍한 냉기가 빌론의 몸을 엄습했다. 칼드부흐가 왕에게 주어지는 칼이듯, 루미아드는 성지수호자에게 주어지는 칼이었다.
빌론에겐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루미아드가 뿜어내는 냉기를 견딜 힘은 있었다.
빠드드득. 빌론이 낀 검은 장갑이 기묘한 빛을 내뿜으며 루미아드의 냉기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여명군 원정에서 얻은 성물 중 하나였다. 빌론은 장갑이 루미아드가 뿜어내는 냉기를 저항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움켜쥐려 했다.
그 순간, 갑작스럽게 루미아드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거대한 얼음이 순식간에 자신의 손과 팔을 집어삼키자 빌론은 당황하며 내려쳤다. 그러나 얼음은 깨지기는커녕 흠집도 나지 않았다.
‘얼음? 아니, 수정이다!’
그걸 보던 모두가 경악에 빠진 사이, 수정은 순식간에 리안나의 몸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빌론은 루미아드가 자신을 공격한 게 아니라 리안나를 보호하기 위해 힘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했다.
그리고 리안나가 눈을 떴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성채 안에 있던 모든 기사들이 짓눌리는 듯한 힘을 느꼈다. 가장 가까이서 그 기세를 마주한 빌론은 숨조차 쉬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무릎 꿇었다.
리안나의 눈동자는 신비로운 깊은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빌론은 본능적으로 눈앞의 상대가 리안나가 아닌 천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천사 중 누군가가 리안나의 몸에 임한 것이다.
“벌써 여기까지 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