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93)
193화. 죽음을 이끌고 (3)
아이작은 성지 엘리온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 보았다. 말을 타고 달릴 수 없는 길이었기 때문에 걷고 있었지만, 발목까지 물이 찰랑거리는 곳에서 빠르게 걷기란 쉽지 않았다.
‘슬슬 가까워지긴 했지만…….’
멀어 보이기만 하던 성지 엘리온의 실루엣은 꽤 가까워진 상태였다. 뾰족한 창들이 장벽을 이루고 둘러싼 듯한 저 절벽 너머에 엘릴의 시신이 안치된 장소가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경고의 메시지가 분명한 속삭임이 계속해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이미 엘리온 성채 쪽에서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성채에 거뭇하게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는 불사교단의 흔적이 분명했다.
‘결국 본색을 드러낸 모양이군.’
그렇다면 놈들도 죽을 각오, 아니, 부서질 각오로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역전할 기회라고는 이제 성지 엘리온에만 있을 테니까.
“서두르지요. 불사교단 놈들이 이제 막 나가는 듯합니다.”
“예? 하지만 알데온 군이 그들을 붙잡아두고 있을 거라고…….”
“공포도 없고 죽을 일도 없고 부상도 개의치 않는 놈들이 작정하고 탈출하면 아무도 못 막지요. 알데온 군이 오더라도 저곳은 전장입니다. 시체가 잔뜩 쌓여있겠지요.”
아이작의 말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깨닫고 에델레드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아이작의 말대로라면 알데온 군은 이미 언데드 군세와 싸우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불사교단 놈들을 다 정리하고 성지로 가도 늦지 않을 텐데!”
“저희가 성지로 가야 하는 건 불사교단들을 처치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불사교단이 성지에 침입하는 것을 일찌감치 막기 위해서죠.”
엘리온 성채의 언데드를 다 제거해도 불사교단이 성지에 침입하면 다 끝장이다. 아이작이 불사교단의 성지 침입이 얼마나 위험한지 설명하려 했을 때, 그는 저 멀리서 달려오는 군세를 발견했다.
새하얀 냉기가 파도처럼 퍼져 나감과 동시에 호수 표면 위로 빙하로 된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위로 수백 명의 기병대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냉기로 이루어진 다리는 적당히 거칠어 미끄러지지도 않았다.
그 선두에 빌론 게오르크가 있었다. 아이작은 먼 거리에서도 루미아드를 든 그를 알아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빠르군. 심지어 루미아드까지.’
리안나를 죽이지 않고선 빼앗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빌론이 작정했다는 사실에 아이작은 착잡함을 느꼈다. 반면 에델레드는 달려오는 기병대를 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가, 굳은 표정으로 칼드부흐를 꽉 움켜쥐었다.
“루미아드……?”
아이작은 그런 그의 앞을 손으로 막았다.
“칼드부흐를 쓰는 것은 자제하십시오. 폐하.”
“예? 하지만 저라도 보탬이 되어야…….”
“이상합니다. 불사교단이 이렇게 대놓고 성지를 향해 침범하는데 천사들의 개입이 없습니다. 일부러 방치하고 있거나 유도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작은 여전히 엘릴의 천사 중 누군가가 게오르크 반군을 조종했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천사가 여전히 자신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불사교단을 움직여서라도 자신을 저지하려 들 것이다. 그렇다면 천사의 힘을 쓰는 칼드부흐는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있었다.
“성배기사!!”
빌론의 분노에 찬 포효가 호수 표면을 타고 들려왔다. 아이작은 루앗딘 열쇠를 꺼내 들었다. 에델레드 역시 칼드부흐의 힘을 끌어 쓰지 않는 선에서 힘을 보태기로 했다. 믿음직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실제로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었다.
‘천사들이 지켜보는 성지에서, 어린애를 옆에 끼고 수백 명의 엘릴 출신 언데드 기사들을 상대하기? 난이도가 좀 정신 나갔는데. 혼돈? 내가 여기서 죽길 바라지 않으면 뭔가 좀 해보지?’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은 당신이 ‘타락자 빌론 게오르크’를 처단하길 원합니다.] [혼돈의 포상이 당신을 기다립니다.]직접 돕는 대신 동기 부여를 해 주는 건가. 아이작은 피식 웃었다.
“까짓거 해보지 뭐.”
***
아이작은 달려오는 빌론을 정면에서 응시했다. 기병대가 말발굽으로 다리를 두들기는 진동에 고요하던 호수 표면이 떨려 왔다. 빌론은 루미아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의 폭풍을 거침없이 흩뿌리며 달려왔다.
자신은 물론, 주변에 있는 기병들조차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불사교단의 언데드들은 냉기에 영향을 받지 않지.’
죽은 자의 기운 때문인지 몰라도 그들은 이미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다. 덕분에 엘릴의 성물을 불사교단의 언데드가 휘둘러댄다는 아이러니가 성립 가능했다.
‘하긴, 나도 루앗딘 열쇠를 써먹고 있으니.’
아이작은 루앗딘 열쇠를 높게 들어 올리고, 검기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파르르르르! 루앗딘 열쇠의 불꽃이 짙은 보랏빛의 기이한 기운으로 꿈틀거렸다. 마치 기이한 의식을 치르는 듯 춤을 추며 일렁이는 움직임이었다.
아이작은 최대한 집중하며, 알데온 기사들이 하던 상급 검술을 흉내 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오직 현재 눈앞의 적을 죽이겠다는 기세뿐.
루앗딘 열쇠를 쥔 아이작의 손에서 쇠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는 벼락같이 성지 엘리온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내려쳤다.
순간, 소리가 사라졌다.
소리 대신 강력한 파동이 먼저 호수 전체에 퍼져나갔다. 물결이 맹렬하게 밀려나면서 일순간 하얗게 표백된 수면 아래의 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뒤늦게 굉음이 터져 나왔다.
엘릴 왕국과 엘릴의 묘역을 잇는 다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성지이며 성물이다. 아이작의 공격 따위로는 무너지지 않았다. 아마 어떤 기적을 쏟아부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충격이 그냥 사라지지는 않는다.
결과는 다리 전체를 뒤흔드는 맹렬한 진동이었다.
콰드드드드! 빌론이 만들어낸 빙판의 도로가 진동에 휩쓸려 부서지거나 떨어져 나갔다. 고작 얼음 발판 위를 수백 명의 기병대가 달릴 수 있었던 이유는 견고한 다리가 지지대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다리가 그 도로를 떨쳐버리고 있었다.
얼음이 부서지자 언데드 기사들은 기겁하며 멈춰 서려 했다. 하지만 대응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빌론 장군!”
수많은 언데드 기사들은 그 일격만으로 휘청거리다가 수면 아래로 떨어졌다.
무거운 갑옷을 입은 그들은 떠오를 기회조차 없이 그대로 돌멩이처럼 호수 아래로 가라앉았다. 중심부는 거의 수백 미터는 되는 호수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그들이 기어 나오려면 한세월이 걸릴 것이다.
‘물론 엘리온 호수의 그 악명높은 안개와 시커먼 물 밑에서 나갈 길을 찾을 수 있다면 말이지…….’
“이놈!”
아쉽게도 빌론은 아이작의 일격으로 다리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다급히 주변에 냉기를 흩뿌려 빙판을 보수했지만, 이미 절반에 가까운 언데드 기사들이 고스란히 호수에 빠진 뒤였다.
누구보다 엘리온 호수의 악명높은 안개와 깊이에 대해 잘 아는 빌론이었다. 그는 아이작의 일격에 수많은 전우들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사교단에 영혼을 팔아 언데드가 된 대가를 누릴 기회조차 없이.
“죽여버리겠다!”
“천사들도 실패했는데 네깟 게 할 수 있을까.”
아이작은 빌론의 기합을 비웃으며 칼을 들어 올렸다.
***
수면을 빠르게 가르고 달려온 빌론은 난폭하게 아이작을 향해 돌격했다.
빌론이 몰고 온 전마는 그 무게만으로도 강력한 흉기였다. 그러나 아이작은 살기등등한 엘릴 출신 언데드와 정면승부를 벌일 생각 따윈 없었다.
충돌이 지척에 가까워진 순간, 이미 바닥에 흩뿌린 저 너머의 색채가 전마의 발목을 콱 휘어잡았다. 붙잡아 끌어당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예상치 못한 데서 넘어지게 만들 정도는 되었다. 전마가 휘청거리다 나자빠지자마자 빌론은 속도 그대로 튕겨 나갔다.
빌론이 꼴사납게 다리 위를 엉망진창 굴렀다.
아이작은 빌론이 일어날 틈을 주지 않고 잽싸게 덮쳤다.
‘저놈은 더 이상 엘릴 신도도 아니니, 정정당당한 승부 따위는 개나 줘도 되겠지.’
쾅! 살기등등한 아이작의 검이 빌론을 내리찍었다. 빌론은 가까스로 검을 들어 아이작의 공격을 막아냈다. 평범한 검이었다면 아이작의 검기에 그대로 쪼개지며 목까지 떨어졌겠지만, 빌론이 든 검은 성검 루미아드였다.
쩌저저적! 폭발하듯 냉기가 터져 나왔다. 아이작은 발까지 얼어붙기 전에 일단 뒤로 물러났다. 한 번에 끝내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이 정도면 확실한 기선제압이 되었을 것이다.
몸을 굴려 일어선 빌론의 몸에서 얼음 가루가 파편이 되어 흩날렸다. 언데드가 되어 버린 놈은 낙하 충격으로 숨을 못 쉬거나 고통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빌론은 분개하며 소리쳤다.
“이교도 놈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아니, 인제 와서? 그리고 너도 이제 엘릴 신도는 아니잖아.”
아이작은 어이가 없었지만, 원래 나쁜 놈들은 자신의 이중적인 면모를 모른 척하는 법이라며 넘겼다.
사실 아이작도 이중적이라는 점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으니.
빌론은 아이작의 비아냥에 분개하며 다시 칼을 들어 휘둘렀다.
쉭, 스걱! 루미아드의 검날이 터져나가듯 빛나며 아이작의 목숨을 노리는 기세를 흩뿌렸다. 아이작은 리안나와 싸울 때 그랬던 것처럼 혼돈의 눈으로 어떤 공격이 진짜인지를 알아보고 단숨에 파훼했다. 그러나 빌론은 지치지 않고 연달아 공격을 퍼부었다.
언데드의 무서운 점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언데드는 지치지도, 부상으로 인한 부담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중에서도 빌론은 사망보험의 보상으로 거의 데스나이트에 준하는 언데드가 된 것 같았다.
불사교단의 기적을 배우지 못했을 뿐이지 생전에 이미 엘릴 기사로서 최고급의 기량을 갖췄다는 점에서 데스나이트보다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공격을 맞부딪치며 빌론의 수준을 파악했다.
‘지금까지 본 기사들 중에는 최고 수준이지만, 소드마스터에 이를 정도는 아니야.’
그 말은 빌론 같은 기사가 다섯 명은 있어야 아이작을 이길 수 있을 것이란 뜻이기도 했다. 지금 그가 버티는 것은 순전히 루미아드 덕분이었다.
아이작은 기회를 봐서 루미아드를 걷어내는 동시에, 그의 목을 향해 칼을 찔렀다.
콰득! 그러나 아이작의 공격은 빌론의 왼손에 막혔다. 아이작은 빌론이 검기를 불어넣은 루앗딘 열쇠를 손으로 잡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내 아이작은 빌론이 양손에 끼고 있는 장갑이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 이교의 성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좋은 거 끼고 다니네?”
그러나 이미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빌론은 아이작의 말을 비아냥으로 듣고 이를 갈며 노려보았다.
“빌론 장군님!”
그때 혼란을 수습한 언데드 기사들이 싸움에 끼어들었다. 아이작은 일단 다시 칼을 거두고 물러났다. 주변은 빌론 때문에 제법 넓은 빙판이 만들어진 상태였지만 아까 그 참상을 보고도 넓게 퍼져 있을 수는 없었다. 덕분에 다리 위에서 동시에 아이작과 맞설 수 있는 인원은 기껏 해봐야 세 명 정도였다.
‘완전히 엘릴 신도뿐인 언데드들이라 다행이군.’
만약 저들이 불사교단의 기적을 다룰 줄 알아 망령이나 팬텀스티드 따위를 소환할 수 있는 진짜 데스나이트들이었다면 곤혹스러운 것은 아이작이었을 것이다.
허공을 날아다니며 합공을 가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그들은 엘릴의 축복을 기대하기 힘든, 그냥 잘 싸우고 잘 안 죽는 기사들에 불과했다.
이런 좁은 다리 위에서라면 아이작이 일방적으로 유리했다.
하지만 그저 맞설 만한 구도가 만들어졌을 뿐, 저들을 다 정리해 버릴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빌론이 루미아드를 가진 이상 엘리온에 들어올 수 있겠지. 반납 의식을 치를 때 놈이 방해하기라도 하면 다 망한다. 여기서 처리해야 해.’
아이작은 그들의 기세를 슬쩍 살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엘릴을 섬기고 영광된 전투를 쫓던 기사들. 하지만 지금은 추레하고 부패한 언데드가 되어서 오직 복수 하나에만 매달리고 있다. 자괴감이 들지 않을까?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천사들의 농간에 넘어가 명예도, 긍지도, 친구도, 전우도, 혈족도 팔아먹고. 그렇게 하고도 할 수 있는 게 고작 그 정도뿐인가?”
빠드득. 빌론은 분노로 눈을 불태우며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이작은 놀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오호, 그렇게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한때야. 곧 얼굴이 썩으면 표정을 만들 근육도 없어지고 눈알도 빠지거든. 당연히 머리카락도.”
“닥쳐라!”
‘싸우기만 하던 기사라 그런가 어휘력이 부족하군.’
아이작은 내심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그의 반응을 재차 유도했다.
“왜? 그렇게 되는 게 무섭나, 빌론? 그러면 죽을 자리를 잘 알아봤어야지. 죽는 게 무서워서 평생 섬겨오던 신을 막판에 저버리고 달아나면 네가 평생 해온 일은 뭐가 되냐!”
아이작의 일갈에 기사들은 움찔했다.
그들 역시 불사교단의 언데드가 되었다는 사실에 동요하지 않는 자들은 없었다. 아이작은 그들 대부분이 ‘언데드가 되라’고 적극적으로 종용받았다면 오히려 반발하고 죽을 때까지 싸웠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사망보험은 그 성격이 다르다.
그들은 약간의 찜찜함만을 가지고 살면서 가입 해지를 미뤘을 것이고 어느 순간 어어, 하면서 죽어 버렸을 것이다. 그리곤 내심 ‘자신은 일부러 배교한 것이 아니다’라는 핑계를 마음에 품고 싸웠을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기 위해.
그리고 그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빌론의 말에 복종했을 것이다.
사망보험의 무서운 점이 바로 그 점이었다.
적극적으로 언데드가 되라고 하면 거부할 사람들도 소극적으로 방치하다가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