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95)
195화. 불멸의 끝 (1)
쾅! 쾅! 작살을 한 번 내리꽂을 때마다 좀비 군세에 굵직한 균열이 생겨났다. 저 작살은 인간을 상대하기 위한 게 아니라 거대한 고래나 씨서펜트 같은 바다 괴물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무기다. 최근에는 익사자 왕을 사냥하는 데 쓰기도 했었고.
로잘린드가 배 난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모르스를 내려다보았다.
“모르스 장군, 꽤 난처한 상황에 처했던 모양인데.”
모르스는 로잘린드에게 ‘반갑다’는 감정을 느낄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에 할 말을 잊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로잘린드는 비죽이 웃으면서 선원들에게 지시했다.
“뭍놈들이 소금 의회의 힘에 오줌을 지린 모양이다!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어줘라!”
“옙!”
소금 의회 선원들은 호탕하게 대답하며 작살 포격과 화살로 좀비들을 공격했다. 거대한 배는 그 자체로 움직이는 성이나 다름없다. 좀비들은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는 소금 의회의 배들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리 위에는 소수의 언데드 기사들이 아직 있었지만, 곧 밀어닥친 알데온 기사들에 의해 박살이 나 버렸다. 언데드 기사들이 잘근잘근 다져져 복구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로잘린드는 배 옆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로잘린드 부인,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소…….”
알데온 기사단과 엘리온 기사단, 모두 로잘린드의 배에 올라타자 모르스가 감사를 표했다. 그 역시 선왕 알프레드의 부하 중 하나였기에 솔트아인에서 벌어진 학살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잘린드에게 구원받다니, 뭐라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로잘린드는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흥. 감사는 말로 할 게 아니라 잊지 않으면 될 일이오.”
“적어도 나는 내가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소. 내 부하들과 이 자리의 기사들 모두 잊지 않을 거요.”
죽다 살아난 델프릭과 레이나도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라바드만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호수까지 오는 길을 찾으셨습니까? 어지간한 수로들은 차단당하거나 험해서 힘들었을 텐데…….”
성지 엘리온을 둘러싼 호수에도 당연히 바다로 이어지는 강이 있다. 하지만 전쟁에 대비한 게오르크 군은 일찌감치 그 강물을 타고 배가 거슬러 오르지 못하게 방책들을 설치했다.
로잘린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 장난감들? 내가 해적, 아니 의적질을 하던 시절에 비하면 우스울 뿐이지. 산을 타고 옮기면 그만이니까.”
“……배를 끌고 산을 탔다구요?”
라바드는 배의 규모를 다시 살펴보고 되물었다. 십수 명이 탈 수 있는 얇은 배라면 모를까 이건 전함이라고 불러야 할 크기였다. 그러나 리안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한 목적과 의지, 방법만 안다면 못 할 일은 없지. 특히 소금 의회 선원들이 성배기사와 관련된 일이라고 하자 죽을힘을 다해 돕더군.”
리안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씩 웃었다.
“게다가 나는 이미 성지 엘리온으로 올 수 있는 가장 쉬운 길목을 꿰뚫고 있었거든.”
“예? 어째서…….”
라바드의 질문에 로잘린드는 입술을 비틀어 올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모르스는 더 캐묻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로잘린드는 복수에 미쳐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성지를 어떻게 해 보려는 계획까지도 세웠을 것이다.
“무서운 이야기는 모르는 편이 좋을 거야. 젊은 기사. 그나저나 우리 귀여운 성배기사는 어디 있지?”
모르스는 그제야 성지 엘리온 방향을 가리켰다.
“성지! 성지 엘리온으로 에델레드 폐하와 함께 향했습니다! 빌론 게오르크가 따라붙었으니 서둘러야 합니다!”
“보채지 말라고. 모르스 장군. 빌론에게는 나도 할 말이 있으니까…….”
***
안개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대한 함선이었다. 솔트아인의 깃발을 나부끼며 달려온 배는 맹렬한 속도로 그대로 모르스가 서 있던 다리를 들이받았다.
쾅! 배에 짓이겨질 뻔한 모르스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빌론이 언데드 소드마스터라 한들 돌다리와 저 커다란 배 사이에 끼고도 무사하긴 힘들 것이다.
“빌론!”
선두 위에 선 로잘린드가 회백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그 나이에 맞지 않는 우렁찬 포효를 토해 냈다. 엘릴 신도들에게 큰 목소리는 기본소양인 듯했다.
“빌론 게오르크! 나다! 로잘린드 솔트아인이다!”
“로잘린드? 빌어먹을, 네가 어떻게…….”
빌론은 솔트아인의 배가 대체 어떻게 호수까지 넘어왔는지 이해 못 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호수의 안개를 뚫고 이렇게 성지 가까이 왔는지도.
하지만 눈앞의 배는 분명히 존재했고, 로잘린드는 겁도 없이 난간 위에 서서 빌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로잘린드! 물러나!”
아이작은 어째 빌론과 로잘린드가 서로를 잘 안다는 느낌을 받았다.
보통 사람들은 로잘린드 부인이라고 깍듯이 경칭을 붙이곤 했으니까.
로잘린드는 모두가 잘 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테오를 선택한 뒤 네가 여명군에 자원입대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빌론! 하지만 그렇다고 나라를 말아먹을 생각까지는 하지 말았어야지! 세상의 반이 여자인데!”
“대체 몇 년 전 얘기를 아직도 울궈먹는 거야! 나는 이미 결혼해서 다 큰 애까지 있어, 이 미친년아!”
빌론은 분통이 터진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아이작은 언데드 소드마스터와 미망인 해적 선장의 비화를 듣고 약간 아연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저만큼 늙은 사람들끼리라면 서로 인연이 엮이고 엮일 일도 많았겠다고 생각했다.
로잘린드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빌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잘 산다길래 기분 좋았다. 그런데 왜 이 염병을 떠는 거야?”
“그야 내 형의 복수를 위해서지!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닌…….”
“누가 누구 앞에서 누구에 대한 복수를 말하는 거지?”
로잘린드의 서늘한 말에 빌론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선수에 늘어진 밧줄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다.
수백 명의 언데드 기사와 이제 막 검기를 각성한 언데드 소드마스터 앞에 맨몸으로 나서는 그녀의 모습에 기사들과 아이작, 모두가 경악했다. 놀라지 않는 것은 그녀를 오랫동안 봐 온 선원들뿐이었다.
갑자기 수십 년 전 과거의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엘릴 기사들을 상대로 해적질을 하던 여걸과 그 앞에 맞선 기사.
로잘린드 부인은 비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다시 지껄여봐라, 빌론. 지금 누구 앞에서 복수를 입에 담는 거지?”
“나는…….”
“비오 게오르크를 위한 복수를 말하는 게 맞나?”
빌론은 입을 꽉 다물었다.
비오 게오르크는 선왕 알프레드의 명령을 받아 솔트아인을 파괴한 당사자였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은 명령을 내린 선왕에게 있다. 하지만 그 명령을 거부하던가 하다못해 소극적인 저항이라도 할 수 있었던 비오 게오르크는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완수했다.
그에게는 솔트아인 학살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책임이 있다.
학살의 결과로 비오 게오르크는 죄책감에 휩싸인 채 식음을 전폐하여 목숨을 끊었다. 빌론은 그 사실에 대해 알데온 왕가에 항의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로잘린드 앞에서 복수를 외칠 수는 없었다.
“가장 큰 복수의 권리는 내게 있다, 빌론. 이의 있나?”
“…….”
빌론은 앓듯이 으르렁거릴 뿐 대답하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아이작과 에델레드를 죽이고 엘릴을 언데드로 부활시켜 왕국을 멸망시킬 듯 떠들던 기세는 로잘린드 앞에서 펼 수 없었다.
그의 모든 명분이 로잘린드 앞에서 무력해졌다.
“내 앞에서는 게오르크 일족조차도 죄인에 불과하다. 이의 있나?”
“…….”
물론 빌론은 단칼에 로잘린드를 죽여 버리고 하던 일을 다시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빌론의 형은 자신의 과오를 씻기 위해 자결했다. 그런데 자신이 로잘린드 부인을 죽이는 것은 형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전히 그에게는 명분이 가장 중요했다.
복수만이 그를 움직이는 동력이었으므로.
“그러면 너도 복수에 동참했어야지!”
마침내 빌론이 억눌렸던 분노를 폭발시키듯 소리쳤다.
“너라면 알데온 왕가를 향한 복수에 동참할 줄 알았다! 테오, 그 유약한 평화주의자만 아니었다면! 하지만 분명 너도 나만큼이나 알데온 왕가의 씨를 말려버리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빌론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주변의 기사들은 저릿저릿한 기운마저 느꼈다. 소드마스터가 진심으로 분노할 때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주변인들의 피부에 상처를 낼만큼 날카로웠다.
로잘린드는 그 앞에서 담담히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맞아. 그랬지.”
“그런데 왜! 테오 솔트아인이 죽었다기에 마침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제야 평화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정의는 어디서 구해야 하는가?
분노에 차 있던 로잘린드가 허공에 외치던 소리였다.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 기도였다.
그렇게 헤매던 로잘린드는 마침내 정의를 만났다. 그녀는 품속에서 자신이 만난 정의를 꺼내 들었다.
빌론은 갑자기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든 로잘린드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뭐냐? 그걸 가지고 뭘 어쩌려고?”
단검으로 소드마스터를 찌르는 것도 우습지만, 찔러 봤자 언데드인 빌론은 그걸 꽂은 채로 영원히 살수도 있다.
그러나 로잘린드는 평온하게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떨어뜨렸다.
“게오르크.”
“뭐?”
“솔트아인은 너희들을 용서한다. 그러니 이제 그만 너희들도 너희들을 용서해라.”
***
용서.
빌론은 로잘린드의 말이 자신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감정 어딘가를 건드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말은 빌론의 몸을 후벼팠던 그 어떤 병장기보다도 날카롭고 아프게 파고들어 왔다.
그제야 빌론은 자신의 진짜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느끼고 있었던 감정은 알데온 왕가에 대한 복수심이 아니라, 형이 저지른 수치스러운 학살에 대한 죄책감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원인 제공자인 알데온 왕가에게 책임을 묻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자살하신 겁니다. 숙부님.’
빌론은 리안나가 했던 말을 뒤늦게서야 이해했다.
‘아버지는 명예롭지 못한 명령을 거부할 용기가 없어서 명예를 버리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용서를 구할 용기가 없어서 자살하셨지요. 애초에 아버지께서 잃으신 것은 명예가 아니라 용기였습니다.’
용서를 구할 용기.
빌론이 명예를 되찾고 싶었다면 내전을 일으킬 것이 아니라 솔트아인에 먼저 용서를 구했어야 했다. 그것이 너무나 기사답지 못하고 충분히 명예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외면했을 뿐.
결국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용서받는다는 수치를 당하고 말았다.
“무슨 용서를, 나는 그런 걸 구한 적도, 없…… 헉.”
억지로 로잘린드의 말을 부정하려던 빌론은 입을 틀어막았다.
빌론의 호흡이 갑자기 격해지기 시작했다.
언데드가 된 몸은 더 이상 심장이 뛰지도 숨을 쉬지도 않는다. 그런데 어째선지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과,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광란이 찾아들었다. 빌론은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숨이 들어오질 않았다.
그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바닥에 엎드린 빌론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통곡을 토해 냈다.
‘그럼 나는 이때까지 무엇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족들이 죽었는가. 얼마나 많은 부하들이 전장에 내몰렸는가.
물론 그의 일족들 역시 내전에 적극적으로 찬성했고, 그의 부하들 역시 전장에서 전공을 올릴 기회에 들떠 있었다.
이 내전은 빌론 혼자 진행한 것도 아니고, 빌론이 없었다고 일어나지 않았을 일도 아니다.
그러나 빌론은 순전히 자신이 저지른 일만으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리안나, 그 어린아이는 이미 스스로 깨우치고 있었는데!’
그저 어른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존경하고 순순히 받아들이던 아이.
그러나 리안나만이 온전한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했었다. 주변 어른들의 폭주에 휩쓸리지 않고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세계를.
그녀는 이미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반강요에 가주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리안나의 가슴을 찔러 버렸다.
이 무슨 추잡한 짓인가.
명예는 이제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빌론은 허공에 대고 비명 지르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눈앞에 떨어진 로잘린드의 단검을 발견했다. 이거다. 로잘린드의 정의가 바로 이것이다.
빌론은 허겁지겁 단검을 주워 스스로의 목을 겨냥했다. 이제 방법은 형의 뒤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푹.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단숨에 단검이 목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통증도, 죽음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빌론은 불사의 공포를 깨달았다.
이제 그는 어디서도 명예를 찾을 수 없었다.
이 세상 자체가 그에게 내려진 영원한 형벌이자 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