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97)
197화. 엘릴의 전장 (1)
‘영혼 포식? 이건 뭐…….’
아이작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기도 전에 너울거리는 그의 검기가 더욱 거세게 타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촉수 대신 검기가 주변을 맴도는 영혼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타락자 빌론 게오르크’를 포식하였습니다.] [‘죽은 신의 내장’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불사의 의지(임시)’ 특전을 습득하였습니다.] [죽음에 가까운 치명상을 입더라도 짧은 시간 동안 영혼을 육신에 붙들어둡니다.] [임시 특전은 소화될 때까지 축복이 유지됩니다.]상당히 좋은 특전이었다.
언데드의 영혼을 포식해서 얻은 특전이라기보단 아득바득 이어왔던 빌론의 생애 때문에 주어진 특전인 것 같았다. 당장 즉사에 가까운 치명상을 입더라도 이 특전이 있다면 버티거나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제 검기로도 포식이 가능해지는 건가? 아니, 그것도 영혼을?’
촉수로 직접 포식하는 것은 위험도가 높았지만 검기라면 들킬 염려가 없었다. 하지만 보아하니 검기로는 영혼만이 포식 가능한 것 같았고, 효율도 낮아 보였다. 통째로 먹어 치운다기보다 영혼의 힘 일부를 뜯어가는 수준에 가까웠다. 제대로 포식하려면 역시 육신을 먹어 치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이작.”
그때 율리히는 자신의 경로를 가로막는 창칼들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아이작을 향해 다가왔다. 아이작은 그녀가 한치의 의기양양함이라도 보이길 바랐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보이는 표정은 약간의 초조함뿐이었다.
“서두르는 게 좋겠다. 귀부인과 마법사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율리히는 언데드 기사들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성큼성큼 엘리온을 향해 걸어갔다. 에델레드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했지만, 아이작이 뭔가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아이작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폐하!”
당혹감에 찬 로잘린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명을 요구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이작도 에델레드도 미처 설명할 틈이 없었다.
“나중에 설명해주겠소, 로잘린드 부인! 일단 자리를 지켜주시오!”
천사의 개입은 자연재해 같은 것이다. 거기에 원인과 결과를 따져 물어도 평범한 인간은 짐작조차 어려운 장대한 대계에 의한 것이라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 불합리함에 당황하고 분노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 세계는 그런 세계니까.
언데드 기사들은 그 뒤에 그대로 남겨졌다.
영혼마저 빠져나간 그들의 육신은 따로 처리하지 않는 한 영원히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성지를 수호하는 석상들처럼.
***
성지 엘리온으로 다가갈수록 안개는 점점 짙어졌고 앞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쯤이면 도착했다 싶을 정도까지 걷자, 율리히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대체 이 빌어먹을 것은 언제 나오는 거야?”
그러자 아이작이 에델레드에게 말했다.
“폐하, 칼드부흐를 들어 올려 주십시오.”
에델레드가 시키는 대로 칼드부흐를 들어 올리자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던 길이 열렸다. 그제야 안개 너머에서 엘릴의 묘역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전혀 보이지 않던 계단이었다.
율리히는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고 율리히가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초조했던지 어지간해서는 인간들 일에 개입하지 않는 그녀가 불사교단의 사제를 냅다 베어 버릴 정도로.
아무리 천사가 이 세상에 압도적이고 일방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이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대체 뭐가 명천사를 초조하게 만드는 거지?’
아이작은 자신이 오월의 검에게 임무의 수행을 명 받을 때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질문을 다시 하기로 했다.
“오월의 검, 이제 말씀하셨던 성지 엘리온에 도달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뭔지 말씀해 주십시오.”
곁에 있던 에델레드가 오월의 검이라는 말에 경악하며 바라보았다. 율리히는 힐긋 에델레드를 보았다가, 다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흠, 그래. 엘릴의 왕도 들어두는 게 좋겠지. 관련 없는 이야기는 아니니.”
그녀는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며 말했다.
“아이작, 너는 크리스탈 전장으로 가야 한다.”
“……엘릴의 우르반수스 말입니까? 어떻게요?”
보통 사후세계로 가라는 말은 죽으라는 뜻이다. 아이작은 살아서 넘나든 경계긴 했지만, 이는 사후세계를 넘나들 수 있는 소금 의회의 기적 덕분이었다.
하지만 엘릴 신앙에도 그런 종류의 기적이 있는지는 몰랐다. 다행히 임무를 위해 한 몸 희생하라는 뜻은 아닌 것 같았다.
“성지에서는 할 수 있다. 우르반수스와 현실의 경계가 얕은 곳이니까…….”
율리히는 잠시 멈춰 서서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어딘가 복잡했다.
“그곳에서 명천사 칼루리엔을 처단해야 한다.”
명천사 칼루리엔.
‘마법사’라는 이름을 받았지만, 이미 살아생전에 칼루리엔이라는 이름이 너무나 유명해 마법사 칼루리엔이라고 더 많이 언급되는 천사였다. 가장 먼저 엘릴에게 이름을 받은, 엘릴 신앙의 루앗딘 같은 존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칼루리엔을 처단하라구요?”
뒷산에 사는 사악한 산적을 토벌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아이작은 천사가 직접 상대해도 모자랄 일을 자신에게 맡긴다는 것에 경악했다.
심지어 첫 번째 명천사인 칼루리엔이 공격당하면 다른 천사들은 가만히 있겠는가. 천사며 신도들이며, 어쩌면 엘릴까지도 나설지도 모른다. 그냥 엘릴 신앙 전체를 상대하라는 뜻 아닌가?
‘혹시 이거 견제인가? 나더러 엘릴의 전장에 나가서 죽으라는?’
하지만 그런 거라면 오월의 검이 직접 칼을 휘둘러도 충분한 일이다. 왜 이렇게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과정을 거쳐서 엘릴의 우르반수스에 접근시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에델레드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외쳤다.
“오월의 검! 오월의 검이라면, 빛의 법전의 명천사 아니십니까? 그런데 칼루리엔을 처단하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비록 엘릴께서 빛의 법전 교단과 갈라서기는 하셨으나, 엘릴께서는 여전히 빛의 법전의 가치와 질서를 따르십니다!”
에델레드의 말은 사실이었다.
엘릴은 빛의 법전이 대륙에 단단히 자리를 잡게 만든 대제국의 기틀을 세웠으나, 동시에 엘릴 분파를 일으켜 그 대제국을 절반으로 쪼개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릴은 결코 빛의 법전을 상대로 침략 전쟁을 일으키거나 학살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신의 지위를 얻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이 빛의 법전의 가치를 따른다고 주장했으며, 빛의 법전의 질서를 왜곡하는 교단과 갈라섰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때문에 여전히 백제국이라는 거대한 질서의 동맹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율리히는 에델레드를 차분히 응시하며 말했다.
“엘릴의 왕. 내가 엘릴의 목을 치라고 했나? 내가 말한 것은 칼루리엔이다.”
에델레드의 눈이 흔들렸다.
아이작이 재빠르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엘릴 신앙을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칼루리엔만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군요.”
여전히 정신 나간 목표지만 처음 난이도가 너무 높게 제시된 덕분에 상대적으로 쉬워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에델레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칼루리엔께서 빛의 법전에 뭔가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
“아니. 빛의 법전에는 안 했지.”
율리히는 차분히 대답했다.
“대신 엘릴에게 잘못을 저질렀지. 칼루리엔은 엘릴을 감금하고 그 입을 틀어막고 있다. 그리고 다른 천사도 그걸 소극적으로 돕고 있고.”
율리히의 놀라운 폭로에 에델레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엘릴이 침묵하던 이유가 칼루리엔 때문이었단 말인가?
놀라기는 아이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분열 예식을 반납하면 엘릴과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게임에선 엘릴이 구속되어있다는 인상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일단 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군. 칼루리엔이 현실에 개입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쳐들어가야 하니까.”
***
계단 끝에 오르자 갑작스럽게 가을의 풍경이 나타났다.
바스락거리는 진홍색 낙엽들과 잔잔한 바람이 거대한 석창의 장벽 내부를 휘감고 있었다. 잔잔한 정원의 냄새가 풍겨왔다. 정원 중심에는 상수리나무 한 그루가 높게 솟아 있었고, 주변에는 동백꽃이 간간이 피어서 그 상수리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작은 상수리나무 아래를 보면서 숨을 죽였다.
한 남자가 빈 칼집을 품에 안은 채 잠든 듯이 상수리나무에 기대 있었다.
장신에 창백한 얼굴, 단정하게 땋은 머리카락, 그리고 지금은 이 세계에서 사라진 엘프임을 보여 주는 긴 귀.
비에 젖은 버드나무 같은 인상의 이 남자가 바로 엘릴이었다.
도저히 ‘패왕’이나 ‘대장군’이라는 호칭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가슴에 갈라진 흔적과 그 텅 빈 내부가 엘릴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럴듯한 신전이나 상징, 관리하는 사제 하나 없음에도 신성력으로 충만한 이 공간이 그가 엘릴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곳이 엘릴께서 승천하신…… 곳이군요. 그분이 마지막 숨을 내뱉었을 때 주변에 있던 계절이 멈추고 주변에 있던 모든 수목들도 그대로 늙지도 죽지도 않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엘릴께서 다시 돌아오셨을 때, 주변이 바뀐 것에 놀라지 않고 그저 잠시 잠들다 일어난 것처럼 느끼실 수 있도록.”
에델레드는 이 성스러운 땅에 들어온 것이 감격스러운 듯 목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건 좀 이상한데요.”
그때 갑자기 헤사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그녀가 뒤따라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에델레드만이 기겁할 뿐, 아이작과 율리히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에서 치를 의식을 위해 데려온 것이 헤사벨이었다.
“에델레드 폐하의 말씀을 들어 보면 엘릴이 승천한 것은 가을인데, 이 주변의 동백꽃은 계절에 맞지 않는 꽃인데요. 동백은 봄꽃이니까요.”
“그, 그거야 밖은 봄이니까…….”
“그럼 계절이 시간을 멈췄다는 이야기는 뭐가 되나요?”
“헤사벨, 폐하를 괴롭히지 마라.”
붉은 성배의 신도였던 몸으로서 엘릴의 전설에 흠집 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 풍경에 무슨 의미가 있든 나중에 알아보면 된다.
그때 율리히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에델레드는 그 모습을 보고 안절부절못했다. 이 성스러운 엘릴의 묘역에 다른 신앙의 천사를 들인 셈이 되었으니, 그녀가 뭔가 부적절한 짓이라도 할까 봐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성스러운 자리에서 정작 엘릴 신도는 에델레드 한 명뿐이군.’
심지어 중복되는 신앙도 없다. 물론 헤사벨은 전향하긴 했지만.
하지만 아이작은 꼬리 밟힌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델레드의 시선을 뿌리치지 못하고 율리히를 소극적으로 제지했다.
“오월의 검, 칼루리엔이 대체 왜 엘릴의 입을 틀어막고 있다는 겁니까?”
율리히는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닥치고 말을 듣게 만들지 말지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다행히 합리적인 성격이었다.
그녀는 시선을 에델레드에게 돌리고 물었다.
“엘릴의 왕. 칼루리엔에 대해 뭘 알고 있지?”
“그…… 엘릴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자 조력자였으며, 그분이 패왕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조언해주고, 마침내 그가 신이 되기로 결심했을 때 방법을 알려주신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신비로운 예언과 마법으로 엘릴을 도우셨다구요.”
“잘 알고 있군. 하지만 칼루리엔이 원래 뭐였는지는 모르는 모양이지?”
“윈터콜의 탑에 살고 있던 은둔자 아닙니까?”
엘릴 왕국 최북단, 거친 풍랑과 바다, 바위밖에 없는 그 땅에 높은 탑이 있다. 지금은 무너진 폐허에 불과했지만 칼루리엔이 살았던 은신처로도 유명했다.
“칼루리엔은 원래 바칼루리엔이라는 이름의 드래곤이다. 엘릴의 왕국에서 숭배받던 드래곤이지. 바칼루리엔은 엘릴에게 패배한 뒤, 그의 종복을 자처하며 도움을 주었지.”
아이작은 헛웃음을 지었다.
드래곤을 굴복시킨 뒤 부하로 들였다고? 판타지 소설에 나올법한 로망 아닌가. 하긴 생각해 보면 엘릴의 행보 그 자체가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감이다.
“다른 드래곤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바칼루리엔은 원래 고대신으로 숭배받던 존재다. 당연히 신이 되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었지. 그 비밀을 넘긴 대가로 천사가 되었고.”
율리히는 비웃음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드래곤들은 그 강력한 힘과 외형만으로도 신앙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어디서든 강력한 권세를 자랑했지만, 고대신의 파멸과 함께 대부분이 사라졌다.
하지만 약삭빠른 자들은 어디에나 있다.
몇몇 드래곤들은 신적인 존재가 되는 대신 신적인 존재의 부하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들이 가진 비의와 힘, 능력은 천사로서 업적을 세우기에 충분했으니까. 칼루리엔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면…… 칼루리엔이 엘릴의 힘을 탐내 그를 찍어누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 한다는 것입니까?”
에델레드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엘릴이 힘과 용기, 명예를 상징한다면 칼루리엔은 지혜와 지식을 상징할 정도로 중요한 존재였다. 게다가 그 첫 번째 명천사가 감히 신에 반역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당혹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율리히의 대답은 단순했다.
“몰라.”
“예?”
“모른다고. 나는 칼루리엔이 왜 백 년 넘게 엘릴의 입을 닥치게 만들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다만 등대지기께서 그 사실이 마음에 안 드니 이것을 정정하라 하셨다. 그게 아이작, 네게 내려진 임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