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
2화. 살아남은 아이
흑발의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불타오르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빛의 법전’ 문양이 새겨진 새하얀 성갑이 그가 상당히 높은 고위층 성기사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 전체가 불타고 일반인들이 학살당하는 와중에도 그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냉혹하게 입을 열었다.
“동쪽에 탈출로가 있소. 슬슬 그쪽으로 여자와 아이들이 도망치고 있을 테니 거기로 병사들을 보내시오.”
그러자 곁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던 데스나이트가 잠시 멈칫하더니, 음색을 바꿨다. 바이올린을 켜는 소리가 화재의 소음을 뚫고 울려 퍼지자 해골 병사들 일부가 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스나이트는 바이올린을 켜며 말했다.
“진작에 말하지 그랬나?”
“이 마을에 탈출로는 내가 아는 것만도 10개는 넘소. 확실하게 하려면 우리 움직임을 알지 못하게 해야지. 상황도 봐야 하고.”
데스나이트는 남자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듯했다. 하지만 백제국 최전방을 지키던 밀리샤르 성기사단의 단장 칼센 밀터는 데스나이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칼센 밀터.
백제국의 성기사들 사이에서는 칼의 성자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성기사였다. 죽은 뒤 천사의 반열에 오를 것은 당연했고, 어쩌면 신으로부터 이름을 부여받는 ‘명천사의 위계’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배교를 결정했다.
그가 본색을 드러냈을 때 같은 기사단원들은 물론, 그를 받아들이기로 한 불사교단조차도 믿기 힘들어했다.
그러자 칼센은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기사단원들을 모조리 가져다 바쳤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흑제국으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받아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이걸로 재앙의 씨앗이 될 그릇들은 모두 사라졌겠군.”
데스나이트가 중얼거렸다.
그들이 공격한 마을은 백제국 안에서도 비밀스럽게 숨겨진 장소 중 하나였다. 이 마을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배교 행위로 낙인이 찍힐 일인데, 결국 칼센에 의해 드러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왜 이곳이 그렇게 숨겨지고 있는지는 칼센은 물론 교단 상층부조차 알지 못했다. 보호하는 것도 파괴하는 것도 그저 신들의 은밀한 명령에 의해 수행될 뿐.
“동쪽은 마무리되었네. 이제 슬슬 직접 둘러보는 것은 어떤가?”
데스나이트는 칼센을 향해 도발하듯 물었다.
칼센 덕분에 마을을 지키는 첨탑도, 방어벽도 모두 무력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배교가 이루어지는 동안 칼센이 직접 사람을 향해 칼을 휘두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의 기사단원들을 함정에 빠뜨려 포로로 잡거나 해골 병사들로 하여금 죽이고, 마을을 공격할 때에도 벽과 첨탑을 무너뜨린 것이 전부였다.
데스나이트의 말은 이제 슬슬 직접 손에 피를 묻힐 때가 되지 않았냐는 질문이었다.
칼센은 표정 없이 불타는 마을을 응시하다가 말을 움직였다. 훈련된 전마는 불꽃에도 아랑곳 않고 폐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헉, 허억!”
아이작은 힘겹게 달려가고 있었다. 어딜 가나 해골 병사들이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아무리 난이도가 정신 나간 게임이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이작은 어지러운 와중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살아남은 것은 우연과 행운이 겹친 결과였다. 연약한 네필림이 아니었더라도 지금 이 상황은 뚫고 나가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게임에서는 HP가 바닥나기 전까지는 피 좀 흘렸다고 지치거나 어지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아이작이 딛고 있는 이 세계가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발걸음을 딛는 것조차 버거워지고 있었다.
그때 아이작은 해골 병사들의 움직임이 기묘하다는 것을 느꼈다. 해골 병사들은 아이작을 공격하는 대신 구석진 곳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아이작은 어느새 무너진 벽 귀퉁이에 몰려 있었다.
그리고 해골 병사들 사이로 누군가 나타났다.
아이작은 그를 보자마자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칼센 밀터.
대륙 8대 강자이자 백제국의 칼끝, 해골 분쇄기라고도 불리는 검의 성자.
오늘 이후 지난 100년 이래 최악의 배교자라고 불리게 되는 밀리샤르 성기사단의 단장, 칼센 밀터가 눈앞에 있었다. 네임리스 카오스 세계관에서는 진영에 따라 최종보스급으로 불리는 존재였다.
‘해골 병사 하나도 버거운데 저걸 여기서?’
아이작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러나 덕분에 지금이 무슨 시점인지 깨달았다.
네임리스 카오스의 보스인 ‘배교자 칼센 밀터’가 타락하는 바로 그 순간인 것이다.
거대한 중갑에 새파란 안광, 바이올린을 든 데스나이트가 곁에 있음에도 칼센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아이작은 칼센을 본 순간 세계가 응축되는 기분을 느꼈다.
‘도망 못 가.’
게임 속에서 묘사된 분위기 그대로였다. 플레이어의 캐릭터들은 칼센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정신력이 낮아지고 울렁이는 효과를 받는다. 칼센은 그만큼 강력한 존재감으로 아이작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때 데스나이트 쪽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공기가 떨리면서 나오는 소리였다.
“애송이인데 뭐 어떤가? 자네가 데려가서 배교자 한 명을 더 늘리는 것도 괜찮겠군. 아직 어린아이니 우리 가르침을 따르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러나 칼센은 아이작을 바라보다가 묵묵히 검을 뽑아 들었다.
“아니, 잠깐. 칼센. 내 말 못 들었나? 애라니까. 죽일 필요 없어.”
“저걸 죽이려고 여기까지 온 거요.”
칼센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낀 듯 중얼거렸다. 지금이 바로 그의 계획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신도들을 학살한 것이나 전우들을 배반한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이 눈앞의 아이를 죽이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칼센은 그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생각이었다.
칼센은 데스나이트를 지나쳐 성큼성큼 아이작을 향해 다가왔다.
아이작이 칼센의 눈동자를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의 눈동자에선 어떤 감정이나 회의감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칼을 휘두르는 칼센의 모습에서도 한 치의 망설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냈지만 검날은 그대로 그의 가슴팍을 베어 내렸다.
가슴팍에서 선혈이 솟구쳐 나왔다.
‘죽는다.’
아이작은 공허한 고독감을 느꼈다.
이 세계에서 그는 오롯이 혼자였다.
이 세계에는 그를 기억해 줄 가족이나 친구, 지인도 없었다. 심지어 죽은 뒤 사후세계를 설명해 줄 종교마저 없었다. 그는 ‘이삭’이었을 때도 종교를 가져 본 적 없었지만,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조차 신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이 찾아오자 아이작은 고독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다못해 곁을 지켜 줄 존재라도 있었다면…….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그 순간 그의 가슴이 폭발했다.
선혈과 함께 폭발하듯 솟구쳐나온 것은 거대한 촉수 다발이었다.
마치 부풀어 오른 풍선에 칼을 갖다 댄 것처럼 거대한 촉수의 무리가 범람하며 터져 나왔다. 거대한 촉수는 단숨에 눈앞에 있던 칼센부터 단숨에 집어삼켰다.
칼센은 반사적으로 칼을 들어 올렸으나, 이미 그때에는 그의 온몸이 조각조각 나서 씹혀 들어가고 있었다. 두개골이 두터운 어금니에 박살 나는 순간까지도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어─.”
데스나이트가 뭔가 이변을 알아차리고 얼빠진 소리를 냈지만 움직임은 너무 늦었다.
촉수의 무리는 칼센으로 멈추지 않고 주변에 있던 해골 병사들 무리까지 휩쓸었다. 해골 병사들은 순식간에 뭉개지고 부서지며 파도에 휩쓸린 모래 알갱이처럼 흩어졌다. 뒤늦게 데스나이트가 말을 돌린 순간 붉은 촉수가 그의 위를 스쳐 지나갔다.
해골 말이 하반신만 남은 데스나이트를 달고 맹렬하게 뛰었다. 하반신은 덜그럭거리다 말 위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촉수는 사방을 휩쓸어 버린 뒤, 입안에 털어 넣은 것들을 우적우적 씹어 삼켰다.
콰드드드득. 콰득, 우득, 우드득.
철이건, 뼈건, 살점이건 상관없이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분쇄되었다. 촉수는 이내 다 씹어 삼킨 듯 입맛을 다시더니 서서히 아이작의 가슴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변은 갑작스러운 정적에 휩싸였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아이작 한 명뿐이었다.
아이작은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그가 겪은 일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칼센이 벤 흔적대로 흉터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를 놀리듯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칼센 밀터(EX)’를 포식하였습니다.] [‘죽은 신의 내장’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신체 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신앙 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파수자의 등대(EX)을 습득하였습니다.] [오류. 캐릭터에 비해 포식 대상의 레벨이 과도하게 높아 소화가 지연됩니다.] [‘혼돈의 대리인’ 재사용 대기 시간 30일]아이작은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꿈이나 착각이길 바랐다.
“끄윽.”
하지만 어째선지 먹은 것도 없는데 트림이 나왔다.
그리고 이내 맹렬한 졸음이 그를 기습해 왔다. 아이작은 가라앉는 눈꺼풀을 버티지 못해 이내 풀썩 쓰러졌다.
***
따각.
새벽이 밝아 올 무렵, 한 남자가 마을 폐허 앞에 도착했다. 그는 사색이 되어 다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타다남은 폐허와 그 위로 싸늘하게 가라앉은 이슬뿐이었다.
‘빌어먹을.’
가장 먼저 도착한 남자, 게벨은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서둘러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큰 습격이었음에도 아직도 도착한 경비대나 성기사단은 없었다. 인근 수도원에 거주하는 게벨만이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서 밤새 말을 달리고서야 도착한 것이었다.
지금쯤 영지의 경비대원들과 근방 성기사단도 죄다 몰려오고 있을 테지만, 그들이 보게 될 것은 시체와 폐허뿐이었다. 게벨은 지원이 이렇게나 늦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무능한 교단 사제 놈들!’
칼센 밀터의 배교 때문이었다.
교단은 칼센의 배교 조짐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성자이자 영웅이었던 칼센이 배교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신도들에게 큰 충격과 동요를 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일을 조용히 처리하려고 머뭇거리는 사이, 칼센은 보란 듯이 백제국 한가운데까지 들어와 마을을 침략했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교단은 각지의 수도원과 성당, 성기사단에 알려 대응을 지시했지만 모든 것이 늦은 뒤였다.
게벨이 걷는 길에는 온통 폐허뿐이었다.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지. 불사교단이 침략한 자리에는 살아있건 죽었건 시체가 남지 않으니까…….’
둘 다 결국 언데드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생존자들을 찾기 위해 서둘러 움직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게벨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피 냄새와 함께 널브러진 잔해와 시신들이 보였다.
‘시체가 남아 있다고?’
게벨은 당혹감을 느꼈다. 불사교단은 대개 뼈 한 조각도 아낌없이 살뜰하게 쓸어 간다. 뼈가 그들의 자원이자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시신을 남기는 경우는 하나뿐이다.
황급히 도망가야만 할 때.
게벨은 주변 곳곳에 병장기와 시신, 그리고 불사교단의 해골 병사들의 잔해가 널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건 무슨…….”
벽이며 땅이며, 마치 거대한 낫으로 긁어 놓은 것처럼 패여 있었다. 심지어 해골 병사들의 잔해 역시 이빨로 물어뜯은 것처럼 듬성듬성 잔해가 흩뿌려져 있었다. 대체 무엇이 이런 흔적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칼센? 아니면 천사라도 나타났던 건가?’
어쩌면 천사가 성지를 지키기 위해 현신했을지도 모른다. 게벨은 일말의 희망을 품고 주변을 황급히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에 걸리는 것은 먼지투성이 돌조각과 차갑게 식은 시체들뿐이었다.
게벨은 어쩌면 천사가 보호가 아닌 응징을 위해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곳에 있는 것은 시체뿐일 것이다.
후두두둑.
그때 게벨의 손끝에 걸린 돌무더기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게벨은 그 무더기 속에서 파묻혀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아이의 안색은 창백했다. 게벨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잠시 얼어붙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아이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아직 숨은 쉬고 있었다. 이마와 가슴팍에 상처가 있긴 했지만 오래된 흉터인 듯 아물어 있었다.
게벨은 본능적으로 이 아이가 살아남은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리고 불사교단의 갑작스러운 후퇴와 분명히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그러나 동시에, 게벨은 같은 이유로 아이의 존재를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불사교단의 후퇴가 이 아이 때문이라면 교단은 이 아이를 또 다른 칼센으로 키울 것이다.’
게벨은 자신의 망토를 벗어 아이를 숨기듯 얼굴을 가렸다.
그는 아이를 안아 든 채 멍하니 안개가 가득한 폐허를 돌아보았다. 아이를 어떻게 안전하게 숨길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자신이 몸을 의탁하고 있는 수도원이 떠올랐다.
수도원은 이미 많은 고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그곳이라면 이 아이를 숨기기에 적합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