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0)
20화. 역병신(疫病神) (2)
“역병? 역병에 걸렸다고?”
“그렇대. 게벨 님께서 금줄을 치시는 걸 봤어.”
수도원에 들어온 이단심문관이 역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금방 알려졌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게벨이 출입을 막기 위해 금줄을 치고 있었고, 예브하르도 역병 치료를 위한 기도회를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역병 치료를 위해 기도회를 준비한다는 게 현대인이 듣기에는 개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당연한 일이었고, 심지어 가장 유효한 치료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도원에 역병을 퍼뜨린 상대는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 기도문이 과연 통할지는 의문이었다.
예브하르도 이 사실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사혈 치료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도사들도 저 나름대로 역병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했다. 그 대비책이라는 것이 마른 허브를 얼굴에 문지른다든가 닭발을 줄에 묶어서 목에 건다든가 하는 행위였지만.
사실 이런 행위 중 태반은 빛의 법전과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신심 깊은 수도사라 할지라도 은연중에 미신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한 가지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머리가 다 죽었다고?”
“예.”
이솔데에게 사혈 치료를 하던 예브하르는 당황했다. 지난 며칠 동안 1차로 피를 빼내고, 2차로 다시 또 치료하려고 했는데 거머리가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수도원 지하에는 이런 경우를 대비한 치료용 거머리를 수조에서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거머리는 이미 모두 사라지고, 대신 검은색 물만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촉수가 다 먹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아이작은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사혈을 마신 거머리를 통 안에 넣으니까 밤사이 전부 녹아서 사라졌더군요. 아마 역병 때문 아닐까요? 늑대나 곰도 걸린 병이었으니, 거머리도 걸리지 말란 법은 없잖습니까.”
놀랍게도 이 핑계는 통했다. 이 시대 생물학적 상식으로는 거머리는 동물보다 액체에 가까운 무언가였던 것이다. 사실 물통에 든 것은 촉수가 대부분을 먹고 역병을 흡수한 거머리 몇 마리를 갈아서 만든 찌꺼기였다.
[‘거머리’를 포식하였습니다.] [‘포식’ 특전으로 흡혈 효율이 상승합니다.] [체력 회복 능력이 소폭 상승합니다.]원치 않았던, 기대도 하지 않았던 포식 특전을 얻기는 했지만 거머리는 빨리 소화되기 때문에 크게 도움 될 것 같지 않았다.
예브하르는 거머리가 모두 죽었다는 말에 끙 앓는 소리를 냈다.
“한겨울에 거머리를 구하러 가기는 어렵고…… 직접 피를 뽑아야 하나?”
‘아니, 이 사람들이 정말.’
아이작은 예브하르가 야매 의료 지식으로 정신 나간 짓을 하기 전에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수도원장님, 제가 약간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예브하르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네가 말이냐?”
“예. 사실 제가 예전에 이국의 의서들을 좀 본 적 있습니다. 기본적인 간호와 잡일은 저와 게벨 님이 할 테니, 수도사님들과 원장님은 번잡스러운 것에 신경 쓰시는 대신 기도회에 열중해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간단한 역할 분담이다.
수도사들이 치료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방해만 된다. 하지만 기도회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니 기도회에만 열중하면 된다.
아이작은 ‘잡일’에 해당하는 방역과 치료에 열중할 생각이었다.
예브하르는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의 진단을 받는 것보다는 성자의 손을 한번 잡는 것이 더 치료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시대였다. 그리고 기적이 존재하는 이 시대에는 딱히 그런 믿음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미 역병은 수도사들 사이로도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감염되지 않도록 격리되어 있었고, 심지어 게벨에게도 역병의 증상이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솔데를 업고 온 아이작은 역병은커녕 기침 한번 없었다.
아이작의 지식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신의 가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예브하르는 아이작의 행동을 승낙해 주었다.
“좋다. 우리는 기도에 열중할 테니 믿고 맡기마.”
***
아이작은 바로 방역 조치부터 들어갔다.
우선 나름 밀접 접촉자라고 할 수 있는 게벨은 자신의 방에 격리시켰다. 실제로 게벨에게도 역병의 전조증상이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조치였다. 그리고 역병의 핵심 근원지인 이솔데의 옷가지는 모아서 모조리 태워 버렸다.
이단심문관의 옷을 태운다는 것을 수도사들이 염려하자 아이작은 담담히 설명했다.
“역병을 불로 정화하는 조치입니다.”
그럴듯한 말에 수도사들도 납득했다. 다른 역병의 여지가 있는 물건들도 모두 태웠다.
다행인 점은 수도사들이 고작 16살에 불과한 아이작의 말을 잘 따라주었다는 점이었다.
아이작이 하는 행동에는 나름 근거가 있었고, 막연하지만 전통적인 미신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역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는 건 아니군.’
격리를 시키는 것만 봐도 최소한 역병이 발생하면 그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개념은 있었던 것이다.
아이작은 추가로 식사 때마다 손을 씻도록 만들고, 수도사들의 로브가 코까지 가릴 수 있도록 조치했다. 마스크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침이 사방팔방 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기도회 장소를 분리해달라고?”
“예.”
아이작은 거기다 한술 더 떠서 기도회에까지 참견했다. 다들 한자리에 모여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역병 증상이 생긴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을 나눠서 기도회를 진행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환자와 보호자가 함께 치유 능력이 있다는 성인의 동상을 찾아, 온 나라를 순례 다니는 것이 상식인 시대다.
때문에 아이작은 기도 장소를 분리해 달라는 부탁에 수도사들이 거부감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24시간 가까이 기도가 이루어지는 예배당을 격리수용시설로 만들 생각이었다.
“기도회가 굳이 비좁은 골방 안에서만 이루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빛의 법전의 이치를 따르려면 건강한 사람들은 태양볕 아래 더 선명한 목소리를 냄이 옳습니다.”
빛의 법전 교단의 상징은 태양. 그런데 빛의 법전에게 탄원하면서 골방 안에서 기도를 웅얼거리는 것이 맞는 일이겠느냐?
아이작은 그렇게 힐난하는 어조로 말했다.
제멋대로인 해석이었지만, 예브하르는 그 말 또한 옳게 여겼다.
“좋다. 그렇게 하마.”
다행히 예브하르를 비롯한 수도사들은 순순히 그의 말을 따라주었다.
이솔데와 가장 가까이 접촉하고도 증상이 없다는 점과 아이작 본인이 가진 특유의 신비한 매력 때문이기도 했다.
여기에 이미 아이작과 신뢰가 쌓인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부탁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제발 이 방법이 통해야 할 텐데.’
사실 이미 역병이 퍼진 상황에서 수도원은 거대한 격리병동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지품을 태우거나 격리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증상에 따라 환자를 구분하고 청결에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다행히 아이작의 조치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아이작이 방역 조치를 취하기 전까지만 해도 수도사들 사이에서 역병이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움직이자 새로운 감염자 수도 줄어들고, 증세가 악화되는 것도 느려지고 있었다.
‘일시적일 뿐이야.’
예브하르의 기도회가 효과를 발휘한다면 역병을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전에 죽거나 심한 후유증을 앓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원을 제거해야만 했다.
***
이솔데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이솔데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환부는 여전히 수포와 곯아 가는 상처들로 가득했다. 절단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쇠약해진 상태에서 하기에는 어려운 방법이었다.
그나마 그녀가 버티고 있는 것은 치료 기도회 덕분이었다.
기도회는 확실히 이솔데의 치유력을 북돋고 있었다. 다만 역병을 낫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작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사혈 치료를 막는 것뿐, 나머지는 기도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건 안 좋아.’
게벨과 다른 수도사들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다. 기도회는 감염으로 죽는 것은 막아주고 있지만, 감염 자체는 막아주지 못한다. 아이작이 하고 있는 방역 조치도 일시적일 뿐, 피로가 길어지면 다시 역병이 번질 수 있었다.
점점 역병에 걸린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기도회도 제대로 힘을 못 쓸 것이다.
‘그 전에 빛의 법전이 힘을 써서 팍팍 치료되면 좋겠지만.’
마법이며 신이며 기적이 있는 세상인데 어련할까. 문제는 그렇게 정화되기까지 환자들, 특히 이솔데라는 저 이단심문관이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란 점이다.
기적에 기대할 수는 없었다.
아이작이 해야 할 일은 기도가 아니라 행동이었다.
아이작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촉수를 꺼냈다. 스멀스멀 촉수가 이솔데의 몸 위로 기어 올라갔다.
‘기분이 이상하군.’
뭔가 못할 짓을 저지르고 있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촉수는 이솔데의 환부를 훑기 시작했다. 썩은 부위와 곯아 가는 상처, 수포들을 수많은 이빨들이 빠르게 도려내어 집어삼켰다. 몸에 해가 되는 부분만 제거하는 방법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은 먹지 않기로 했던 아이작이지만, 이것은 미묘한 경계에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거머리 사혈 치료 같은 거지?’
아이작은 그렇게나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거머리 사혈치료를 자신이 하고 있다는 생각에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솔데는 역병에 감염된 부위가 떨어져 나갈 때마다 움찔움찔 떨었다.
잠시 뒤, 이솔데의 상처 부위에서는 선홍빛 피가 흘렀지만 감염된 부위는 사라졌다. 치료용 알콜이나 소독제를 구할 수는 없으니 이게 최선의 조치였다.
아이작은 거기서 한 번 더, 거머리의 포식 특전을 발휘했다.
[‘포식’ 특전으로 흡혈 효율이 상승합니다.] [체력 회복 능력이 소폭 상승합니다.]촉수가 울컥울컥 체액을 토해내며 이솔데의 상처 부위를 덮었다. 이솔데의 피와 살을 삼켜서 만든 것들이었다. 일시적인 조치였지만 회복 능력이 깃든 체액이 상처를 덮자, 환부가 아물었다.
‘이 정도면 간호는 할 만큼 한 것 같군.’
아이작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이것은 고작 방어에 불과하다.
빛의 법전이 곧 크게 한 방 날려 줄지도 모르지만, 아이작은 신이 복수해 줄 것이라고 믿고 얌전히 있을 생각 따윈 없었다.
“슬슬 성과가 있어야 할 텐데.”
아이작은 중얼거리며 방 구석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쥐 한 마리가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저 너머의 기생충’에 감염되어 뇌가 마비된 쥐였다. 아이작은 거기에 ‘혼돈의 자손’ 특전을 발동시켰다.
[혼돈의 자손 / ‘저 너머의 기생충’ 특전이 있어야 합니다. 기생충이 숙주를 즉시 잡아먹고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혼돈의 자손’으로 변태합니다.]아이작이 능력을 발휘한 순간, 쥐가 빠르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내 쥐는 퍽 소리를 내며 물풍선처럼 터져 버렸다.
참혹한 잔해 속에서 겉과 속이 뒤집히듯 무언가가 기어 나왔다.
그것은 쥐의 가죽과 뼈, 살점, 체액들을 모조리 빨아들이면서 서서히 형태를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에는 쥐를 닮아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사방으로 요동치는 촉수가 어설프게 쥐의 형태를 흉내 내고 있었다.
이것이 혼돈의 자손이었다.
[주인님.]짧고 투박한 메시지가 아이작에게 전달되었다. 혼돈의 자손이 보낸 메시지였다. 쥐라는 동물을 매개로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혼돈의 자손들은 모두 이렇게 짧고 간단한 단어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아이작은 혼돈의 자손에게 이솔데의 살점을 나눠주었다.
“이 역병의 근원지를 찾아. 분명 이 산 어딘가에서 시작됐을 거다. 우릴 엿먹이려는 놈이 누군지 알아야지.”
혼돈의 자손은 촉수를 꿈틀거리다가 아이작이 내민 살점을 휙 낚아챘다. 녀석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입으로 살점을 삼키고는 쥐구멍 속으로 달려갔다.
아이작은 역병이 시작된 이래로 꾸준히 취해 왔던 이 조치의 성과가 슬슬 나타나길 기대했다.
***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그날 밤.
[주인님.]아이작은 문득 들려온 메시지에 눈을 떴다.
[역병. 시작. 찾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