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00)
200화. 엘릴의 전장 (4)
아이작의 말에 오월의 검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뻔뻔하기는. 내가 너의 비밀을 교단에 폭로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대가가 부족한가?]솔직히 그 말대로였다.
아이작은 이 사안으로 오월의 검과 협상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빛의 법전 교단에 아이작에 대한 파문과 척살을 명령하면 아이작은 영원히 백제국에게 쫓기는 신세가 될 테니까.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오월의 검에게는 다른 대안도 없었다. 게다가 어째선지 그녀는 천사의 힘만으로는 칼루리엔을 상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다시 생각 해보겠다는 아이작의 말은 블러핑이었지만, 오월의 검에게는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이작은 이 기회를 통해 확답을 받고자 했다.
“그럼 이번 일의 대가로 영원히 입 다물어주는 겁니까? 제가 계속 빛의 법전 안에 기생해도 상관없는 겁니까?”
[너는 이미 빛의 법전의 질서를 따르고, 이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등대지기께서는 네가 쓸모 있다고 판단하셨다. 어쩌면 우리가 동맹 하나를 더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오월의 검뿐만 아니라 등대지기 루앗딘의 판단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하물며 동맹이라니. 아이작은 자신이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이라는 것을 들키더라도 백제국의 일원으로 받아줄지도 모른다는 암시에 기대감이 생겼다.
“빛의 법전은 혼돈을 부정하지 않나요?”
심지어 아이작이 만났던 해방주교 알 두아자드는 이름 없는 혼돈이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빛의 법전과 협조해 그 자리를 칼센으로 다시 채우려고 했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빛의 법전은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에 속한 존재들을 목격하면 즉시 죽이고 불태우는 것이 원칙이다.
거기에 대한 오월의 검의 대답은 심플했다.
[나는 수없이 많은 혼돈의 권속들을 마주했고, 도륙해왔다.]그녀는 불꽃으로 이루어진 눈꺼풀을 깜빡이며 말했다.
[네가 특별대우를 받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네가 특별하기 때문이다.]오월의 검의 대답은 알기 쉽고 납득할 만했다. 그가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들 가운데 특별하다는 것은 명백했으니까.
아이작은 세계의 멸망을 바라지도, 꿈틀거리는 촉수로 제물을 바치라며 울부짖지도 않는다.
그런 괴물들에 비하면 아이작은 오월의 검이 납득할 수 있는 대상일지도 모른다.
‘아니, 하지만 어떻게 보자면 쓸모 있는 동안만 그렇다는 뜻이지. 결국 칼받이에 고기 방패로 쓰겠다는 뜻이니.’
자신이 이용하다가 버리는 것은 상관없지만, 이용당하기만 하다가 버림받는 것은 질색이다. 대계를 위해서라면 자기네 교단의 신도들조차 속여먹는 것이 천사와 신들이다. 다른 신앙의 교도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오월의 검을 너무 믿지 마라.’
문득 칼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율리히가 엘릴 왕국에서 보여 주었던 소박하고 얼빠진 모습들은 아이작의 경계심을 풀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천사다. 인간이 이해 못 할 이유로 그를 언제든 저버릴 수 있었다.
결국 아이작은 일단 따르되, 경계를 거두지는 않기로 했다.
어떤 신앙이든 그 정도 거리감이 적당했다.
[하지만 너는 계산적인 성격이니 보상이 없다면 동기부여가 되지 않겠지. 어차피 강적과 싸워야 하니 미리 보상을 주도록 하마.]오월의 검은 눈을 번뜩이더니 자신의 깃털 같은 불꽃을 하나 뽑아 떨어뜨렸다. 불꽃은 하늘거리며 내려오다가 자연스럽게 루앗딘 열쇠에 부딪힌 순간 저절로 스며들었다. 아이작은 루앗딘 열쇠를 꺼내 불꽃을 피워올려 보았다.
그러자 붉게 타오르던 루앗딘 열쇠가 한층 더 밝은 백색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강화된 루앗딘 열쇠(S+)] [심판의 검이 본래의 허물을 벗고 원래의 형태를 찾은 검. 빛과 열기로 감춰지고 갇혀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열쇠다. 천상의 열기에 천사의 깃털로 다듬어져 더 강해졌다. 검을 든 자에게 영구적인 온기와 활력을 더해준다. 상급 봉인 해제, 냉기 저항.] [이 정도면 쓸만한 보상이 되겠지. 그만 투덜거리고 일이나 해라.]아이작은 반색하며 받아들였다.
역시 오월의 검은 좋은 놈일지도?
***
그러나 좋은 보상에는 까다로운 조건이 따르는 법.
초반의 기세와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엘릴의 천국을 돌파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대체 왜 엘릴의 천국에 트롤이 득시글거리는 건데?!”
헤사벨이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사납고 거대한 트롤들이 통나무를 휘두르거나 던지면서 아이작 일행을 습격했다. 트롤은 붉은 성배의 귀여움을 받는 짐승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엘릴의 천국에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하지만 에델레드의 생각에는 달랐다. 훅, 쾅! 에델레드가 날아오는 통나무를 칼드부흐로 일격에 박살 낸 뒤 말했다.
“트롤은 기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냥감입니다! 튼튼하고, 강하고, 무엇보다 붉은 성배의 권속이지요. 트롤을 사냥하는 것은 엘릴 왕국에서 한 명의 기사로 거듭났다고 해도 좋은 증명입니다!”
그러니까 전리품 내지는 레벨업용 몬스터 같은 개념으로 풀어놓았다는 뜻이다.
엘릴의 놀이터…… 아니, 전장에서 만족하면서 싸울 수 있도록.
문제가 있다면 거기 풀어놓은 몬스터들의 수준이 ‘어차피 죽어도 내일 되살아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여기서 죽으면 끝장인 아이작 일행은 치열하게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심지어 검기를 터득한 아이작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천국행 티켓이 보장된 엘릴의 소드마스터들을 위한 몬스터들도 마련되어 있었으니까.
“구오오오오!”
아이작은 머리 위에 몇 개의 두개골을 중심으로 손가락뼈가 얼기설기 얽혀 있는 왕관을 쓴 거대한 덩치의 트롤을 상대하고 있었다. 다만 그 ‘거대하다’라는 점이 상식을 초월했는데, 다른 트롤의 세배는 될 덩치에 트롤들의 이빨과 턱뼈가 가득 박혀있는 거대한 몽둥이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아이작이 임시로 ‘트롤 치위생사’라고 이름 붙인 그놈이 몽둥이를 휘두를 때마다 주변의 아름드리나무가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가고 땅에는 구덩이가 생겼다.
에델레드가 먼저 칼드부흐로 싸우면서 힘겨루기를 벌였지만, 놈은 놀랍게도, 진짜로 놀랍게도, 검술을 사용할 줄 알았다. 심지어 칼드부흐 때문에 몽둥이가 상하자 에델레드가 제힘을 주체 못 하고 자빠지게 만들었다.
“이건 대체 뭐 하는 놈이야?”
[트롤왕 데베부르게다. 엘릴이 죽인 고대신 중 하나지. 거인과 트롤의 혼혈인데, 자연숭배의 수혜를 받았지. 엘릴이 마음에 들어 해서 그 시체에 기사 작위까지 수여했다더군.]오월의 검은 끼어드는 대신 설명충 역할을 자처했다. 트롤왕인지 뭔지가 휘둘러대는 몽둥이에는 검기인지 뭔지 알 수 없지만 아이작의 검기만큼이나 살벌한 기운이 서리기까지 했다.
헤사벨이 놈의 정신을 조종해보려고도 하고, 피가 묻은 화살을 몇 대나 박아 넣었지만 놈은 괴물 같은 재생력으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에델레드와 싸울 때에는 손목이 날아갔는데도 눈 깜짝하니 벌써 재생한 상태였다.
어느 순간 아이작은 트롤왕의 아래쪽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트롤왕이 아이작을 그대로 내려쳐서 곤죽으로 만들기 딱 좋은 각도였다. 하지만 트롤왕은 현명하게도 그런 아이작의 낚시질에 낚이지 않고 재빨리 물러나 상황을 관망하려 했다. 정확히 아이작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아이작의 검이 기묘하게 움직였다.
트롤왕은 물러나려던 발걸음이 무언가에 휘어잡혀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균형이 뒤쪽으로 쏠려있던 트롤왕은 그대로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이작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트롤왕의 사타구니를 베어 올렸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목을 베었을 위치였지만 키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는 유감스러운 위치였다.
트롤왕이 기괴한 괴성을 내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이내 목구멍에 루앗딘 열쇠가 박히면서 잠잠해졌다. 루앗딘 열쇠에서 피어오른 백색의 불꽃이 괴물 같은 놈의 재생력도 소용없게 만들었다.
아이작은 트롤왕이 비로소 낙엽이 되어 흩어지자 진땀을 닦아 냈다. 겨우 트롤 따위에게 검기며 검술이며 다 동원해야 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고대신이라지만 트롤이 이 정도면 천사는 대체…….’
아이작을 식은땀 나게 만드는 점은 가면 갈수록 점점 어려운 괴물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 궁극적인 도달점에 드래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점입가경이다.
“오월의 검, 그냥 어떻게 좀…… 뿅 하고 날아가거나 순간이동은 할 수 없습니까?”
아문달라스는 미르미아에서 그렇게 슉슉 시공간을 바꿔 끼우던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걸렸다. 물론 아이작은 그게 가능했다면 진작에 오월의 검이 했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은 그냥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여긴 엘릴의 우르반수스다. 내가 개입할 수는 없지. 각자의 영역이 있는 법이니.]“그러면 손이라도 보태시지요?”
[그럼 내가 트롤들을 상대할 테니 네가 잠시 뒤에 천사들을 상대할 건가?]“……좀 더 노력해보겠습니다!”
아이작은 차라리 칼루리엔이 직접 쳐들어오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왜 칼루리엔이 먼저 쳐들어오지 않는 거지?’
현실에서는 힘이 제한되니 등장이 더딘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우르반수스에 진입한 뒤로 오월의 검은 되레 초조함을 덜었고,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던 칼루리엔은 등장을 미적거리고 있었다.
‘영토가 침략당했는데도 방관할 만큼 엘릴의 천사들은 관대한가?’
그건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외적의 침입에 가장 지랄맞게 날 세우는 것이 엘릴이다. 그럼에도 방관하고 이런 자잘한 괴물들만 보내고 있다면 이유는 한가지.
아이작 일행보다 더 위협적인 무언가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작은 아련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대체 무엇과 맞서고 무엇과 대적하게 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트롤왕에 의해 초토화된 숲의 고목들 사이로 호수의 윤슬이 아름답게 부서지고 있었고, 그 호수에는…….
아이작의 몸이 굳었다.
[아이작, 호수 풍경 따위 구경할 시간 따위 없다. 서둘러라.]그가 멈춰있자 오월의 검이 채근했다.
“아, 예. 예에…….”
아이작은 뻣뻣하게 대답하며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음에도 분명 호수 위에 서 있던 한 여인의 시선은 여전히 그를 뚫어져라 향하고 있었다.
***
천국에도 밤은 찾아온다.
정확히는 모든 것을 재정렬하고 정돈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었다. 불타고 남은 재는 다시 나무가 되고, 흩어진 향기는 다시 본연의 형태로 돌아가며, 죽은 자들이 되살아나는 시간이었다. 다시 풍요로워지고, 다시 승리하며, 다시 패배하기 위한 자리로.
오월의 검은 이동 중단을 선언하고 휴식을 권했다. 휴식 시간 보장이라는 인권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모든 게 원래대로 복구되는 시간이라는 것은 원래 없던 것이 있으면 없던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라는 뜻이다. 세상에 없던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면 이 모닥불 주변을 벗어나지 마라 .]그녀는 일행이 휴식 장소로 잡은 과수원 한복판에 제법 커다란 모닥불을 피웠다. 백색의 불꽃은 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장작 삼아 불타올랐다. 아이작은 그 불꽃이 파수자의 등대와 같은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칼드부흐를 든 채로 싸우는 것을 반복했기 때문에 에델레드는 금방 곯아떨어졌다.
헤사벨은 밤이 되자 더 눈이 말똥말똥해졌지만 재정렬되는 시간에 돌아다닐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오월의 검은 그 커다란 눈을 감았지만 잠을 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작은 모처럼 시간이 생기자 오월의 검을 살펴보았다.
처음 봤을 때에는 저 말도 안 되는 모습에 경외와 공포를 동시에 느꼈는데, 결국 그 땅딸막한 율리히 아르테라는 것을 떠올리자 갭 때문에 묘한 친밀감이 생겼다. 아이작은 어디서 생긴 용기인지 평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오월의 검께서는 왜 고양이를 두려워하시죠?”
오월의 검 주변을 공전하던 검이 멈췄다. 아이작의 경험상 저것은 당황 내지는 집중을 뜻한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아이작을 응시했다. 아이작은 오월의 검이 아무 말도 안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녀는 선선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너도 알아두는 게 좋겠군. 이제 슬슬 너도 세상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알게 됐을 테니.]“부드럽다는 말씀은……?”
아이작은 의외의 단어에 의아해했다.
세상이 부드럽다니? 그에게 이 세상은 거칠고 난폭하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아이작은 그 단면에 여러 번 상처 입고 죽을 뻔했다.
하지만 오월의 검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어렸을 때부터 키우던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세트라는 이름의 작고 부드러운 고양이였지. 그때만 해도 나는 고양이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몰랐다. 그저 사랑스러운 존재라고만 생각했지.]오월의 검은 고양이에 대한 애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며 말을 이어 갔다.
[나는 계속 고양이를 사랑했다. 기실 내가 애정을 주는 존재는 고양이밖에 없었지. 그러나 내 적들 또한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게 아끼는 고양이가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