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01)
201화. 엘릴의 전장 (5)
아이작은 혹시 붉은 성배가 그 고양이를 빼돌려 인질로라도 삼았나 생각했다.
어처구니없고 치졸한 짓이지만 붉은 성배가 할 법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월의 검이 상대하던 적, 초창기 불사교단의 언데드들이 저지른 일은 더욱 어처구니없는 짓이었다.
[나와 대적하던 언데드들은 내가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아무 고양이나 방패에 묶어서 나와 맞서기 시작했다. 나는 그 고양이를 베지 않고서는 놈들을 죽일 수 없게 되었지.]“…….”
아이작은 살짝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말도 못 하는 짐승을 방패로 쓰다니, 분명 천인공노할 짓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당시 전쟁 영웅이자 명천사 후보자였던 율리히 아르테를 꺾기에 충분했을지 의문이었다.
오히려 아이작은 당시 불사교단의 언데드들이 얼마나 궁지에 몰려 있었는지를 알 것만 같았다.
전성기의 율리히는 진정 그러한 존재였으리라.
“설마 그거 때문에 진 건 아니겠죠?”
[그랬으면 나는 천사가 되지 못했겠지. 나는 수백 마리의 고양이와 언데드 놈들을 전부 척살하고 정화했다. 뼈도 추릴 수 없도록. 내 생전 최고의 전과를 올린 날이었다.]매우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아이작은 오월의 검이 고양이를 두려워하는 이유를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율리히가 말을 이었다.
[그러다 전투가 끝나고서야 깨달았지…… 내가 얼마나 강한지.]‘……?’
고양이를 베고서 얻은 깨달음치고는 좀 이상했다. 하지만 오월의 검은 정확한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거운 눈빛으로 아이작을 응시했다.
[내가 직접 썰어버린 수백의 언데드와 고양이는 별 차이가 없었다. 기껏 해봐야 꽃잎과 줄기 정도의 차이였지. 그날부터 나는 검을 휘두르는 것이 조금 무서워졌다.]쇠를 한 손으로 으스러뜨리는 힘을 가진 사람이 한 손에 달걀을 쥐고 뭉갠다고 생각해 보자. 달걀 껍질과 노른자 사이에 차이가 존재할까? 아주 약간만 세게 쥐어도 달걀은 뭉개지고 말 것이다. 아주 조심스럽게 만지지 않는 이상은.
[내 검은 죽지 않는 시체들을 부수는 정의로운 단죄지만, 새끼 고양이를 간단히 죽일 수도 있는 흉기다. 이 세상이 내가 죽인 고양이들과 무엇이 다를까? 작고, 부드럽고, 사랑스럽지만 잘 부서지지.]“…….”
[이후 그날의 일을 잊으려 무수히 노력했지만, 고양이를 볼 때마다 나는 다시금 깨닫고 만다. 고양이를 볼 때마다 나는 내가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나는 고양이가 무섭다. 그리고 아이작, 너도 앞으로는 무서워해야 할 거다.]아이작은 오월의 검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툭하면 엘릴 왕국을 끝장낸다느니 왕성을 날려 버린다느니 하던 허세를 떠올렸다.
그녀는 단순히 허세를 부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파괴력을 두려워하고 경계했던 것이다.
아이작은 이 세상이 난폭하고 날카롭고 거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칼루리엔을 베어 버릴 도구로 선택된 아이작 또한 이제 바로 그 거칠고 날카로운 세상의 모서리다.
앞으로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것이 생긴다면, 아이작 역시 그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
대화가 끝난 뒤, 아이작은 아득할 정도로 많은 별들이 하늘을 수놓는 것을 응시했다. 늘 꾸준한 속도로 한 방향으로 흐르는 별들과 달리 그 별들은 느리게, 혹은 빠르게 변칙적으로 자리를 바꾸고 있었다. 기이한 모습이었지만 저 너머의 공간이 정상적인 시간이 아닌, 우르반수스 곳곳에서 벌어지는 변칙적인 시간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하자 납득할 수 있었다.
아이작은 문득 특이한 별자리 하나를 발견했다.
“네가 보고 있는 그 별자리는 방랑자 자리라고 부른다. 정해진 자리도 없고, 예측도 할 수 없는 별자리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이작은 어느새 자신이 모닥불이 피어 있던 자리를 벗어나 호수 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상대방을 응시했다.
부드러운 진한 녹색의 벨벳 드레스에 은색 머리카락을 호수까지 폭포수처럼 늘어뜨린 여인이 수면 위에 발끝만을 담근 채 서 있었다. 그녀의 발끝에는 수초와 꽃들이 무성하게 피어 있었고, 옅은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손에는 창과 방패를 들고 있었는데, 가녀린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호수의 귀부인께서 제게 무슨 용무십니까?”
“……무슨 용무? 쳐들어온 건 네놈들이다. 강도들이 집주인에게 여긴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묻는 꼴이구나.”
호수의 귀부인, 명천사 니믈롯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지만 ‘내 용무는 네놈의 죽음이다!’라며 창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이미 호수에서 그녀를 마주쳤을 때부터 어느 정도 이 만남을 예상했던 아이작은 지금 상황이 제법 흥미로웠다.
그들은 칼루리엔을 제거하러 가는 길인데, 칼루리엔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호수의 귀부인만 계속해서 그들에게 개입하고 있었다.
“제 말이 실례가 되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다만 호수의 귀부인 같은 분께서 저를 벌하는 대신 이런 아름다운 장소로 초대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되어 여쭈었습니다.”
호수의 귀부인 니믈롯은 엘릴 신앙에서 어린 기사들을 인도하고 성숙한 기사들을 전장에서 지휘하며, 늙은 기사들이 전장에서 전사했을 때 비로소 천국으로 안내하는, 기사들의 수호신이자 일종의 사신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귀부인처럼 보이지만 어린 엘릴에게서 패왕의 자질을 발견하고 가르쳤다는 전설까지 있었다.
엘릴이 칼루리엔에게 지혜를 배웠다면 니믈롯에게선 검술을 배웠다는 이야기다.
니믈롯은 아이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경건한 성배기사라 들었다만, 혓바닥은 청산유수로구나.”
“감사합니다.”
“칭찬 아니다.”
니믈롯은 들고 있던 창을 수면에 내리찍으며 말했다. 창끝에 닿은 수면이 큰 파문을 만들면서 호수가 들썩였다.
“내가 너를 왜 불렀느냐고? 네가 지금 감히 엘릴의 침소를 침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 빛의 법전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짓을 벌이느냐? 우리는 이미 빛의 법전으로부터 분파했다! 이런 식의 개입은 규약 위반이야!”
아이작은 설마 니믈롯이 자신이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이라는 것을 몰라보지는 않았을 테니, 아마 오월의 검을 들여온 것에 대해 분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작도 아이작 나름대로 억울한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뭐 아이작이 원한 것인가? 천사가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이 성기사다.
“당신의 분노에 동감합니다. 니믈롯. 하지만 일개 필멸자에 불과한 제가 어찌 신들의 대계에 반항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반항해서 이득을 볼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생각이지만 아이작은 일단 굽혔다. 아직 그가 모르는 비밀이 많다. 니믈롯을 잘 꼬드긴다면 오월의 검이 숨기고 있는 비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오월의 검께서 말씀하시기를, 칼루리엔이 엘릴을 감금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이작의 말에 니믈롯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미묘한 침묵을 눈치챈 아이작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귀부인. 엘릴께서 지상에 침묵하신 지 백 년이 넘었습니다. 만약 칼루리엔이 엘릴을 감금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분을 해방시키는 것이 바른 일 아닙니까? 엘릴은 당신의 신이지만 당신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아이작의 말에 니믈롯은 칼에 찔린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얼굴에 수치와 분노,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닥쳐라! 감히 외부 신앙 놈이 뭘 안다고 우리의 신앙을 의심하느냐? 칼루리엔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그건 엘릴께 필요해서 슬픔과 애통함을 끌어안고 벌인 일일 뿐이다!”
아이작의 말에 니믈롯이 분개하며 말했다.
“설령 사실이라 해도 어떻게 우리 내부 사정에 외부인이 개입한단 말인가? 이는 빛의 법전의 교리에도 없는 내용이다! 등대지기가 천년왕국 때문에 욕심을 부리는 것뿐이야!”
천년왕국.
아이작은 이미 오월의 검이 포효할 때 들었던 단어가 다시 나오자 집중했다. 사실 아이작에게는 낯선 단어도 아니었다. 네임리스 카오스에서 성지를 점령하고 빛의 법전에 의한 통일이 완성되었을 때 ‘천년왕국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승리하게 된다.
황금우상 신앙으로 플레이한다면 ‘미다스의 손’, 엘릴 신앙으로 플레이한다면 ‘최후의 전쟁’ 등, 각 신앙마다 승리 선언이 존재했다. 천년왕국은 빛의 법전의 ‘승리 선언’이다. 때문에 아이작은 관용어구 정도로 생각했지만, 천사들에게는 그 의미가 다른 것 같았다.
“천년왕국의 도래가 왜 문제가 됩니까?”
천년왕국이 도래하면 빛의 법전이 승리하는 것이고, 이는 백제국의 승리이기도 하다. 빛의 법전을 도와 여명군을 성공시키는 것은 엘릴의 목적이기도 했다. 그것을 엘릴의 명천사인 칼루리엔이나 니믈롯이 반대하는 것은 이상했다.
그러나 아이작의 발언에 니믈롯의 눈이 번뜩였다. 아이작은 그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창에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느낌으로 그치지 않고 아이작의 입가를 타고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아이작의 몸이 덜컥 움직이면서 루앗딘 열쇠를 거칠게 뽑아 들었다. 새하얀 백색의 불길이 뿜어져 나오면서 온몸에 활력을 북돋자 니믈롯의 기세가 약간이나마 사그라들었다. 아이작은 한순간이나마 자신의 내부 장기가 모두 멎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엘릴 신도는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지요. 저는 뭐 다를 것 같습니까?”
니믈롯은 아이작을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사과하지. 네가 천년왕국의 도래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적극적으로 돕는 거라고 생각해서 화가 났다. 하지만 보아하니 뭔지도 모르는 모양이군. 무지를 벌할 수는 없겠지.”
아이작은 어이가 없었다.
아마 니믈롯은 천년왕국인지 뭔지도 본 적도 없을 텐데 자신은 직접 보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이끌어 내기까지 했다. 이 점은 천사라 해도 아이작이 정보의 우위에 있었다.
“그래. 어쩌면 천년왕국의 도래까지는 알지도 몰라. 하지만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지.”
“…….”
그건 사실이다. 엔딩 이후 사정까지는 플레이어가 알 도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아이작은 칼을 니믈롯에게 겨냥하며 말했다.
“또 허튼 수작 부리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니믈롯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천사 살해자’의 경고인가? 고작 퇴물과 핏덩이를 죽인 걸로 기고만장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니믈롯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이작의 패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만…… 그렇지. 빛의 법전이 왜 엘릴 내부의 일에 참견하면 안 되는지 이야기해주마.”
***
니믈롯은 아이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이작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녀의 손을 붙잡고 호수 위에 발을 내디뎠다. 그의 발은 빠지는 대신 부드러운 모래를 밟은 것처럼 호수 위를 딛고 섰다. 파도의 교리를 쓸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따라와라. 걸으면서 이야기하지.”
처음부터 그랬지만 니믈롯은 아이작과 싸우고 싶은 의지가 없어 보였다. 어디까지나 잘 설득해서 그의 원정을 중단시키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아이작은 그녀의 태도만으로도 이 원정의 성패가 오월의 검이 아닌 자신에게 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잔잔한 호수가 출렁이는 소리만 고요히 들리는 가운데, 니믈롯이 입을 열었다.
“엘릴 분파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아느냐?”
빛의 법전과 엘릴이 갈라서게 된 결정적인 사건. 아이작은 이 사건으로 당시 대제국을 이루었던 빛의 법전이 반토막 났다는 것밖에 알지 못했다. 그 당시 엘릴 왕국은 단순한 섬나라가 아니라 제국의 서부와 남부까지 장악한 거대 국가였다.
빛의 법전의 축복 아래 첫 번째 명천사인 루앗딘에 이어 임명된 두 번째 명천사 엘릴이 반역했다는 것은 빛의 법전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에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그 사건 배경에 온갖 이야기가 분분할 정도로.
그리고 그 이야기에 엘릴의 딸이자 연인, 무희에 대한 이야기는 반드시 빠지지 않는다.
“……빛의 법전이 비열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묵과하지 못해 엘릴께서 정의로운 마음으로 떨쳐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만.”
물론 사회성을 갖춘 아이작은 엘릴의 명천사 앞에서 ‘너희 신이 근친충이라 딸이랑 결혼 못 하게 하니까 갈라선 거 아니냐’라고 말하진 않았다. 천사가 자신을 죽이려 들면 기꺼이 싸울 배짱은 갖췄지만, 자발적으로 싸움을 걸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그러나 니믈롯은 비웃으며 턱짓했다.
“빛의 법전이 뭐라고 떠드는지 다 안다. 솔직하게 말해라.”
“……빛의 법전이 엘릴의 딸이었던 무희와 결혼을 허락하지 않아서 갈라섰다는 낭설을 얼핏 들은 것도 같습니다.”
“어느 쪽이 사실일까?”
“글쎄요…….”
아이작이 ‘내가 어떻게 아냐, 그만 놀리고 정답이나 말해 보라’는 표정으로 니믈롯을 바라보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정답은 ‘둘 다’다.”
“아, 예…….”
빛의 법전이 비열한 짓을 해서 엘릴이 돌아섰다고 해도 엘릴은 결국 정의로운 근친충 결말을 피하지는 못한다.
아무리 정의로워 봤자 근친충인데 뭘 어떻게 포장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