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02)
202화. 마법사 칼루리엔 (1)
“자, 그러면 그 ‘비열한 행위’가 뭔지가 중요해지겠지. 당시 등대지기 루앗딘은 명천사였던 엘릴에게 명령을 내렸다. 어떤 여자를 죽이라는 명령이었지.”
“어떤 여자요?”
“그냥 평범한 일반인 여자였다.”
정말 평범한 존재라면 루앗딘이 명천사까지 시켜서 죽이라고 할 리가 없다.
니믈롯은 말장난을 미소와 함께 넘기며 말을 이어 갔다.
“그래. 사실 우르반수스에서 루앗딘은 미래의 어떤 풍경을 보았다. 어떤 강대한 민족이 탄생해 빛의 법전의 대계를 방해하는 미래를 예견했지. 루앗딘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역사를 정정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 민족의 시조가 되는 존재를 태어나기도 전에 제거하고자 했지.”
즉, 루앗딘은 빛의 법전의 대계를 위해 아직 무력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일반인을 엘릴에게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걸 왜 엘릴에게?”
“왜냐면 그 여자는 엘릴의 아내였거든.”
아이작은 입을 다물었다.
니믈롯이 말하는 강대한 민족의 시조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그녀는 미래에 태어날 어떤 민족의 시조(始祖)였다. 루앗딘은 그녀의 딸이 신이 되고, 엘릴을 살해하며, 불사자들과 협력해 빛의 법전의 대계를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지. 신이 태어나면 ‘정정’하기는 더 어려워질 테니, 그 전에 처리하고자 한 것이다.”
엘릴 신화에서 엘릴의 딸이었던 무희는 자주 언급되지만 엘릴의 아내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평범한 인간인 데다, 무희를 낳은 직후 사망하여 이렇다 할 업적을 세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앗딘은 바로 그 평범한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이후 태어날 수천만 명의 새로운 민족을 말살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예고된 엘릴의 죽음을 스스로의 손으로 벗어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역으로 결과적으로 두 신의 탄생을 일으키고 말았다.
엘릴이 루앗딘의 명령을 거부하고 아내를 보호한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예언을 받은 딸을 탄생시켰다.
엘릴의 아내는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지만, 그는 딸의 보호를 단호하게 선언했다. 루앗딘의 비열한 행위를 묵과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자신이 죽는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엘릴의 배교는 그가 칼루리엔의 도움을 얻어 신의 격을 얻어 내는 것으로까지 이어졌다. 역사에 없던 신앙 엘릴이 탄생하면서 루앗딘의 계획은 더 크게 흔들렸다.
결국 루앗딘은 ‘역사’를 정정할 기회를 잃었다.
이제는 엘릴도 우르반수스에 개입할 수 있으므로.
“물론 루앗딘은 엘릴께 경고했지. 너는 네 반역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네 딸이 너를 죽일 것이고, 네 기사들은 고립될 것이며, 네 천사들은 너를 업신여기게 되고, 너는 영원한 자기혐오에 빠질 것이라고…….”
니믈롯은 먹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말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엘릴께서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하셨다. 당신의 딸을 태어나기도 전에 죽이는 것보다는 자신이 고통받는 것이 낫다고. 그분께서는 수치와 모욕을 안는 대신, 용기와 명예를 얻으신 것이다.”
아이작은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까지 엘릴을 근친충이라며 놀렸던 자신의 얕은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그러면 딸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역시 비열한 거짓말…….”
“아, 그건 사실이다. 두 분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셨지.”
“…….”
정의롭지만 처연하고 슬픈 근친충이었다.
“다만 딸과 결혼하려고 엘릴 분파를 일으켰다는 말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악의적인 거짓말이 맞긴 하지. 태어나지도 않은 딸과 결혼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아이작은 엘릴 분파의 내막을 알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빛의 법전을 막아서는 민족의 탄생’은 왈라이카 왕국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엘릴의 아내가 낳은 딸이 민족의 시조가 된다고 했으니까.
‘붉은 성배의 영향력이 엄청난 것은 사실이지만…… 왈라이카 왕국이 빛의 법전을 위협할 만큼 강대한 민족이라고 말하기는 뭐한데.’
인간사냥꾼들은 악명 높긴 하지만 벌이는 짓이 워낙에 악랄하고 잔인해서 그런 것뿐이다.
왈라이카 왕국 자체의 국력도 그다지 강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동부의 흔히 있는 군소 국가들 중 제일 큰 수준에 불과하다.
엘릴 왕국이 개판처럼 보일지 몰라도 왈라이카 왕국보다는 객관적인 면에서도 국력이 두 배 이상 강했다.
“왈라이카 왕국의 민족이 그렇게 강하지는 않아 보입니다만…….”
“음. 내가 알기로는 민족보다는 그 민족에서 탄생하는 탁월한 영웅이 민족을 각성시킨다고 들었다. 루앗딘이나 엘릴 같은 역사적인 영웅이 탄생하는 셈이지.”
“영웅이요?”
니믈롯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예비된 영웅의 이름이 헤사벨이던가? 그랬던 것 같군.”
“헤사벨요?”
아이작은 다시 확인해 보았다. 니믈롯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굴복시킨 도박중독자 흡혈귀가 사실은 SSS급 구국의 영웅?! 같은 문구가 스쳐 지나갔지만, 아이작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헤사벨이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로 게임상에 나타나긴 하지만 결코 구국의 영웅이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붉은 성배의 승리 선언인 ‘진홍의 무덤’을 성공시켰을 때 나타나는 존재가 그나마 설명과 흡사하긴 한데…….
아이작은 문득 등골이 오싹해졌다.
붉은 성배 클럽 루트의 승리 선언, 즉 엔딩인 ‘진홍의 무덤’은 한 흡혈귀가 궁극의 음모와 암살을 성공시켜 붉은 성배의 무희와 무수한 천사들과 왕족들마저 잡아먹고 다른 신들마저 압도하는 새로운 신으로 재탄생하는 결말이다.
게임상에서는 플레이어가 바로 그 존재지만, 만약 플레이어가 없는 세계라면?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존재가 있을 것이다.
그게 헤사벨이라고?
‘우리집 도박충이 그럴 리가 없는데. 동명이인 아닌가?’
아이작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일단 부정하고 보는 것이었지만 천사의 입에서 이름이 나온 이상 우연으로 여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자신들 일행 중에도 헤사벨이라는 이름의 붉은 성배 신도가 있는데 오월의 검이 신경 쓰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내 등장이나 역사 개변으로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거나…… 살아있는 편이 좋다고 판단한 걸지도 모르겠군. 혹은 붉은 성배가 지켜주고 있다거나?’
그렇다면 거울 시녀가 굳이 헤사벨을 아이작 곁에 붙여 둔 것도 이해가 된다. 무희가 자기마저 잡아먹히는 것을 원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헤사벨은 붉은 성배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인 셈이다.
니믈롯은 아이작이 다른 생각에 빠진 것은 모르고 말을 이어 갔다.
“어쨌든 엘릴께서 분열 예식을 용납하신바, 이제 남남이 된 붉은 성배 클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가 알 바 아니다.”
니믈롯의 말은 엘릴의 빼앗긴 심장을 찾으러 가겠다며 떠난 수없는 성배기사들을 섭섭하게 할 만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빛의 법전의 개입을 불쾌하게 여긴다는 뜻이기도 했다.
“같은 이유로 우리가 한때 빛의 법전 아래 있었다는 이유로 개입하려 드는 것 역시 용납할 수 없다. 이 뜻을 오월의 검에게 분명히 전하도록.”
“귀부인. 제가 감히 귀부인의 뜻을 거스르려는 것은 아니나…….”
아이작은 어떻게 논리적으로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오월의 검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쳐보지요. 그러면 불사 교단이 성지 엘리온에 접근하도록 허락해주신 것은 왜 그런 겁니까? 불사 교단이 엘릴을 부정한 형태로 부활시키려 했음을 몰랐습니까?”
“엘릴?”
니믈롯은 무슨 말이냐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엘릴을 언데드로 부활시켜? 무슨 수로?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아이작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분명 보았고, 가능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데 니믈롯은 ‘그런 건 불가능하다’라는 투로 나오니 할 말이 없었다.
“그게 가능하려면 엘릴께서 용납하셔야 하는데, 그분께서 언데드로 부활하는 것을 승낙하겠느냐? 그 말은 그분의 의지를 비웃는 것이다.”
“……그러니까 엘릴의 동의가 있으면 가능은 하다는 것이군요.”
하지만 니믈롯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믿어서 불사교단의 침입을 허락한 것이다.
그들이 아이작 일행과 공멸하길 바라면서.
그러나 게임 내에서 엘릴은 부정한 형태로 부활했고, 이는 엘릴 왕국의 파멸로 이어졌다.
아이작은 그 사실에 한가지 가정을 더했다.
지금 엘릴이 언데드로 부활하는 것에 동의할 만큼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슬슬 이 사건의 내막이 궁금해지기 시작하는데.’
원래 아이작은 엘릴 왕국의 여명군 참전을 이끌어 내기 위해 엘릴을 만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엘릴 왕국이 여명군 참전을 거부하며 내전을 거듭하던 배경에는 엘릴의 침묵이 있었고, 엘릴의 침묵 배경에는 명천사 칼루리엔의 감금 혐의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감금의 이유가 만약 반역이 아닌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 해도 엘릴을 만나긴 해야 해. 엘릴을 여명군에 끌어들이지 못하면 백제국의 여명군은 난이도 최악으로 진행하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엘릴에게 다가갈수록 진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이작은 호수의 귀부인 역시 소극적으로 칼루리엔에게 협력하고 있는 것 같으니 그녀를 통해 문제의 해답을 향해 다가가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등대지기 루앗딘의 명령을 받는 오월의 검이 고작 성기사의 말 몇 마디에 ‘그러마’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니믈롯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비장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월의 검에게…….”
“제가 그 이야기를 직접 들었는데, 고양이 이야기는 역효과를 일으킬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이작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수를 쳤다.
니믈롯은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리안나에게 율리히의 정체를 알려준 것은 니믈롯이었던 모양이다.
“나도 오월의 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고 싶진 않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느냐?”
“좀 더…… 유화적인 방법은 어떻습니까?”
“유화적인 방법?”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월의 검은 칼루리엔에게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칼루리엔이 와서 잘 설득한다면 납득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니믈롯은 아이작의 지성을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네 말은 지금 암살자가 목표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데, 목표가 암살자 앞에 나와서 ‘그대가 날 죽이려는 이유는 오해요’라면서 설득하라는 것 같구나.”
“문제는 그 암살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목표에게 다가갈 것이란 점이지요. 그리고 저 역시 제 처지상 오월의 검을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자꾸 괴물들을 보내서 방해하는 대신 처음부터 칼루리엔께서 나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니믈롯은 아이작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지혜로운 칼루리엔이 이런 말을 듣고 ‘네 알겠습니다’하고 앞에 나설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결국 만나는 것은 정해진 바.
다른 신앙의 천사가 천국에서 분탕을 치고 있는 이상, 결국 이 문제는 천사가 직접 나서야 해결할 수 있다.
“좋다. 네 말대로 해보지.”
***
[그래서 네 설득의 결과물이 이거냐?]아이작은 오월의 검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하늘에 둥둥 떠서 자신을 바라보는 직경 10미터짜리 눈동자의 시선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아이작은 간밤에 니믈롯을 만난 것을 그대로 고백하고 타협안을 전했다.
니믈롯 역시 아이작의 말을 칼루리엔에게 분명하게 잘 전달했고, 칼루리엔도 그 의견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이 분명했다. 그는 오월의 검을 마중하기 위해 해가 뜨자마자 그를 찾아왔다.
대략 1만여 명쯤 되는 엘릴의 기사들과 온갖 기괴한 마법 생물들, 그리고 관절마다 쉴 새 없이 마력의 폭풍이 요동치는 골렘들과 함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 기이한 대군세 우익에는 엘릴의 두 번째 명천사 니믈롯이, 좌익에는 연한 푸른빛의 사자 모양 투구를 쓴 기사가 있었다. 저 사자 투구가 엘릴의 세 번째 명천사인 사자 기사라는 점은 분명했다.
그리고 중앙 후열에 허공에 떠 있는 늙은 마법사가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척 봐도 ‘마법사요’하는 듯한 긴 수염에 고깔모자, 치렁치렁한 로브, 긴 지팡이까지.
그야말로 마법사의 원형 그 자체인 모습이었다.
저 노인이 엘릴의 첫 번째 명천사 칼루리엔이리라.
하나만 마주해도 숨쉬기 힘든 명천사들이 셋이나 눈앞에 나타나자 아이작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눈앞에서 태풍과 화산폭발과 해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게 이런 느낌일까. 평생에 한 번만 봐도 많은 게 천사인데, 아이작은 너무 많이 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천사 같은 힘을 낼 수 있는 인재가 있지.’
아이작은 에델레드를 슬쩍 보았다. 에델레드는 이 많은 천사들을 보자 선 채로 심정지가 온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서 있었다.
그는 아이작과 눈이 마주치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존경하지만…… 천사 셋과 동시에 싸우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할 정도로 존경하진 않습니다.”
“현명하십니다. 폐하.”
이토록 엘릴의 왕이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니 장차 엘릴의 미래가 밝다.
아이작은 시선을 돌려 장차 빛의 법전의 대계를 막게 될 것이라 예언을 받은 민족 영웅, SSS급 흡혈귀 헤사벨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헤사벨은 전혀 기죽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그녀는 명천사들을 비웃으며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저 녀석들, 이 모든 것이 사실 아이작 님의 함정이자 음모라는 것도 모르고 제 발로 걸어들어왔군요. 엘릴 놈들은 바닥부터 머리까지 녹슬어 있다더니!”
“…….”
“자, 아이작 님! 저 녀석들을 유린할 시간입니다!”
“…….”
“아이작 님?”
이쪽은 에델레드와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장차 왈라이카의 미래가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