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09)
209화. 패왕 (1)
칼루리엔의 정수나 전체가 아닌, 오직 피와 살점만을 먹은 탓인지 특별한 능력은 상승하지 않았다. 하지만 건강한 신체는 아이작이 그 무엇보다도 바라는 능력이다. 특히 목숨이 경각에 달한 지금은 더더욱.
덕분에 아이작은 분명 온몸이 바스러질 정도로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꽤 사람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크프리트 전설이었던가. 거기서는 용의 피에 몸을 담갔다 빼니까 어떤 무기도 듣지 않는 몸이 되었다고 하던데 나는 그런 거 안 주나?’
그런 생각을 잠시 했지만, 만약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애당초 칼루리엔도 자신의 칼 따위에 상처 입지 않았을 것이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이 자신을 주시하는 것에서 우습지만 염려나 걱정 따위를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죽음에 가까운 상처를 입었음에도 촉수가 그의 몸을 비집고 튀어나오지 않았다. 물론 아이작도 가급적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의외라고는 생각했다.
‘불사의 의지 능력을 알고 있어서 그런 건가? 아니면 여기가 엘릴의 천국이라서?’
어찌 됐든 발현하지 않는 게 좋은 능력이다. 여파가 얼마나 클지도 모르고, 대가도 정확하지 않은 능력이니까.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이 자신을 믿고 배려했다고 믿었다. 혹은 드디어 촉수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거나.
하지만 아이작의 든든한 배후와 달리 그렇지 못한 자도 있었다. 아이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쓰러진 칼루리엔을 향해 비척대며 다가갔다.
큰 상처를 입은 칼루리엔은 힘겹게 숨을 헐떡이며 몸을 뉜 상태였다.
“너희 신은 뭐 하시냐?”
아이작의 말에 칼루리엔은 대답이 없었다. 하기사 엘릴이라도 자신의 패륜아를 돌보고 싶은 마음 따윈 별로 없을 것이다.
아이작은 아까보다 더 커진 상처로 들여다보이는 드래곤 하트가 크게 흠집 난 것을 발견했다.
‘그 공격에 당하고도 깨지지 않았군.’
적당히 봐주겠다는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필사적으로 공격했는데, 고작 흠집만 났을 뿐이라는 것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작은 왼손을 촉수로 변형시킬 준비를 하며 다가갔다.
칼루리엔은 짙은 청록색 눈동자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멈춰라.”
그때 그의 정면에 한 여인이 뛰어내려 막아섰다.
금색의 창과 방패를 든 여인.
엘릴의 두 번째 명천사이자 죽음의 사자, 호수의 귀부인 니믈롯이었다.
그녀는 착잡한 표정으로 칼루리엔을 힐긋 돌아보았다가 아이작을 향해 창을 겨눴다.
“마법사를 해칠 수는 없다. 여기까지만 하도록.”
***
“귀부인…….”
아이작은 루앗딘 열쇠를 땅에 늘어뜨리고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멈출 수는 없습니다.”
부상당한 칼루리엔 하나도 목숨을 걸어서 겨우겨우 잡았는데 그 뒤를 바로 이어서 다른 명천사까지 상대해야 한다고? 아이작의 이성은 그 질문을 수백 번 반복하며 비명을 질렀지만 본능의 판단은 달랐다.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아니, 니믈롯은 진심으로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느샌지 에델레드와 헤사벨 또한 다가와 각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에델레드는 상처 입은 칼루리엔을 보자 복잡한 표정이었으나, 그보다 중요한 목적을 잊지 않은 상태였다.
“귀부인, 당신도 엘릴 감금에 동참한 겁니까?”
아이작의 질문에 니믈롯은 칼에 찔린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아이작을 노려보았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칼루리엔의 고개가 살짝 움직였다.
“칼루리엔! 이들은 아무것도…….”
[내가 교만했다. 대전쟁이 다가오는데 그 흐름을 내 힘만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게 멍청한 짓이었어. 모두가 전쟁을 원하는데 우리만 침묵한다고 막을 수는 없지…….]칼루리엔은 목조차 가누지 못하는 상태로 시선만 돌려 에델레드를 바라보았다.
[그래. 우리는 엘릴의 의지를 숨기고 그분의 목소리가 땅에 닿지 못하도록 왜곡했다. 천사들이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면 언제나 신께서는 섭리를 움직여 교정하시지. 나의 징벌자들로 인간들이 찾아온 것뿐이다.]‘대화의 시간이군.’
칼루리엔이 완전히 무력화되었으니 이제 그에게서 사건의 내막을 짜낼 시간이었다. 아이작은 칼루리엔이 멋대로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칼루리엔의 말에 동요한 한 사람이 있었다.
“당신.”
에델레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엘릴의 신탁을 막고 있었습니까?”
[그래. 엘릴의 어린 왕.]“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전으로 죽었는지 알고 있었습니까? 엘릴께서 침묵하신 탓에 혼란에 빠져 타국과의 관계도 중단되고, 기사들도 한 깃발 아래 모일 수 없었습니다! 백 년 동안 우리는 서로를 죽이고 죽이느라 처참한 수준으로 떨어졌단 말입니다!”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엘릴이 세운 왕국답게, 엘릴 왕국에는 막대한 부와 권력, 강력한 군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엘릴이 침묵하는 동안, 무작위적인 기적만을 허락받을 뿐 어떤 계시도 없었던 탓에 엘릴 왕국은 자중지란만을 반복했다.
그 막대한 부와 힘을 거의 다 깎아 먹을 만큼.
단지 신만을 바라본 인간의 어리석음이라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칼루리엔의 말은 그것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래. 너희들은 하나로 뭉쳐 있으면 안 됐다. 그래서 내가 내란을 부추겼지.]“당신은……!”
에델레드가 분노의 목소리를 터뜨리려던 순간 아이작이 끼어들었다.
“‘대전쟁’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
칼루리엔과 니믈롯의 눈이 아이작에게로 향했다.
[그래. 대전쟁에 대해 알고 있나?]“제법 알지요.”
아니, 사실 니믈롯이나 칼루리엔보다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전쟁의 다른 이름은 라그나로크, 최후의 전쟁이며 이는 엘릴의 승리 선언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엘릴의 천사들인 그들이 그 승리 선언을 막으려 하고 있었다.
[이교도가 대전쟁에 대해 안다니 의외로군…… 하긴,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이니 어떤 이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가.]칼루리엔이 내뱉은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이라는 말에 에델레드의 눈이 흔들렸다. 아무리 기사 왕국이라 해도 어느 정도 신학을 공부한 에델레드가 이름 없는 혼돈이 뭔지를 모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과 함께해 온 그는 아이작이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는 대신, 그가 보여 준 품성과 행동, 신뢰를 믿었다.
[천년왕국의 도래가 가까워진 것처럼, 대전쟁의 전조도 가까워지고 있다. 누가 먼저일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것이 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엘릴의 뜻이 땅에 실현되는 것을 막아야 했지.]“왜 그렇습니까?”
[대전쟁이 시작되면 그 끝에 엘릴 왕국은 확실하게 멸망하고, 엘릴께서도 드디어 그 최후의 전장에서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실 테니까.]에델레드는 깊은 침묵에 빠졌다. 한참의 침묵 후에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완전한 죽음이요?”
[그래. 엘릴께서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신 상태다. 물론 신을 미쳤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그 미친 행동조차 어떤 대계의 섭리일지도 모르니까. 신의 행동을 판가름한다는 것 자체가 교만한 짓이다. 만약…….]칼루리엔은 애타는 표정으로 에델레드를 바라보았다.
[그분께서 단순히 엘릴 왕국의 멸망을 바라셨다면 나는 그것을 방치하고 오히려 유도했겠지. 하지만 그분은 그걸 바라시는 게 아니다. 그분은 자신을 비롯한 엘릴 신앙의 파멸을 원하셨다.]“대체 왜?!”
에델레드의 말은 비명 같았다.
아이작은 에델레드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였다.
“폐하, 상대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마십시오. 충격적인 발언으로 상대를 감정적으로 흔드는 것은 가장 손쉬운 조종 방법입니다.”
물론 칼루리엔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좋을 대로 숨기거나 생략한 부분이 있을 수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발언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칼루리엔은 아이작의 속삭임을 들은 듯 웃음을 흘렸다.
[나도 차라리 속임수면 좋겠군. 신중한 건 좋지만, 성배기사. 나 역시도 엘릴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에 그렇게 영악한 생각은 하지 못한다. 난 그저 그분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만큼은 막는 것이 천사로서의 도리라 여겼다.]“그래요. 엘릴을 내버려 두면 세상을 끝장낼 대전쟁이 일어나며, 엘릴 왕국이 멸망하고, 엘릴도 죽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신이 죽는 게 가능하기나 한 겁니까?”
엘릴의 승리 선언인 라그나로크는 엘릴이 세상을 향한 재정복 전쟁을 시작하는 데서 끝난다. 그 원정에 플레이어는 함께 하지 못한다.
엘릴이 부활에 성공한 이상 그의 승리는 확정적이었으니까.
그런데 대전쟁이 왜 엘릴의 죽음으로 다시 이어진단 말인가?
[하하하하…….]아이작의 말에 칼루리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말하니 우스워서 그렇다.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아이작은 입을 다물었다.
자살한 신, 바로 그 신의 신도라면 바로 이 자리에도 또 한 명 있지 않은가.
신도도 사라지고, 천국도 몰락하고, 이름마저 잊힌 바로 그 신의 유일한 신도가 바로 아이작이었다. 이제 새로운 신앙이 막 싹트고는 있지만, 그때의 신과 지금의 신이 동일한 신인지도 불분명했다.
[내 말을 믿건 아니건, 나는 오직 엘릴에 대한 애정 하나로 움직였다. 신앙심이라면 그저 맹신했을 테고, 충성심이라면 그를 설득해 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릴을 탄생시킨 스승이자 첫 번째 신도이자, 보호자로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지…….]아이작은 칼루리엔의 방법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배교를 저질렀으며, 대전쟁이란 것도 칼루리엔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엘릴을 불신해서 교만을 저지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당장 그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에델레드가 침묵하는 사이, 아이작은 칼루리엔을 향해 다가갔다.
“성배기사!”
니믈롯이 창을 들고 소리쳤다. 아이작은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물러나라, 천사. 지금 이 자리는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결투의 승자가 전리품을 취득하는 순간이다. 엘릴 신앙에서 정당하게 받아들여질 만한 이 순간에 감히 다른 자가 끼어들 수는 없었다. 그 정정당당한 권리와, 아이작의 패기에 니믈롯은 흠칫했다.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기세였다.
아이작은 동시에 그녀를 조금이라도 안심시키기 위한 말을 했다.
“대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엘릴 왕국과 엘릴 신앙이 멸망하는 일도 없을 거다. 이건 내 신앙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그제야 니믈롯은 조금이나마 안심한 듯 입술을 깨물며 물러났다. 천사인 그녀가 아이작의 기세에 눌렸다는 것은 경악스러운 일이었으나,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누구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
아이작은 칼루리엔의 드래곤 하트 앞에 섰다.
[나를 먹어 치울 시간인가?]아이작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칼루리엔을 죽이는 것은 오월의 검이 내린 명령이자 부탁이었다. 심지어 오월의 검은 산이 추락할 때 목숨을 걸고 그들을 구해 주기까지 했다.
아이작은 오월의 검을 거역할 수 없었다.
‘오월의 검을 믿지 마라.’
동시에, 칼센이 그에게 했던 말도 떠올랐다. 오월의 검은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지만, 그가 어디까지 무엇을 바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루앗딘의 어떤 거대한 계획의 일부라면? 천년왕국의 도래를 위해 일부러 아이작에게 마음의 짐을 씌운 것이라면?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아이작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려던 찰나, 그의 머리를 말끔하게 만드는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그는 모든 것에서 거리감을 두고 객관화하여 이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빛의 법전을 위해서도, 엘릴을 위해서도, 이름 없는 혼돈을 위해서도 싸우지 않는다.
아이작은 가장 완벽한 답변을 찾아냈다.
“칼루리엔.”
칼루리엔의 청록색 눈동자가 깜빡였다.
“네 손으로 드래곤 하트를 뽑아서 내게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