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12)
212화. 패왕 (4)
엘릴은 여명군에 참전하고 싶지 않아서 ‘왜 참전해야 하냐’라고 물은 것이 아니었다. 아이작의 속내를 떠보고 그의 생각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아이작은 준비한 대답을 내놓았다.
“이미 엘릴 왕국의 기사도는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입니다. 외국에서 온 일개 이단 성기사가 각지의 내로라하는 검객들을 모두 격파하고 다녔습니다. 엘릴의 왕은 그 외지의 이단 성기사가 가르쳐준 검술을 배웠고, 성지수호자 역시 그에게 패배했습니다.”
엘릴 면전에서 네가 남긴 신앙, 왕국, 유산 전부 망했다고 쏘아붙이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동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자신이 하는 행동에 자신이 있었다.
엘릴은 이런 걸로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
‘저것’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이 맡은 업이라도 잘 수행하고 있었습니까? 엘릴 왕은 마녀의 난동조차 제압하지 못했고, 반란 세력에 끌려다녔으며, 성지수호자는 불사 교단에게 침식당하고 있었고, 당신의 천사들은 감히 언데드의 침입을 허락했습니다.”
아이작은 속으로 에델레드와 리안나에게 사과했지만 필요한 말들이었다.
엘릴이 다시 지상에 관심을 갖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과연 이것이 기사의 나라 엘릴이 맞습니까? 그저 당신의 이름을 참칭하는 군벌들의 모임이 아닙니까?”
“너의 말이 옳다.”
엘릴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기사를 자처하는 자들이 전쟁터에서 가장 먼 섬에서 자기들끼리 한 줌 명예를 이리떼마냥 물고 뜯는다. 엘릴 왕국에 더 이상 기사는 없다. 칼 든 무뢰배들만이 있을 뿐.”
엘릴은 코웃음 치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왕국의 꼴은 온전한가? 과거의 영광된 고토를 전부 잃어버렸는데도 그들은 되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 빛의 법전의 질서를 따르고자 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왕국은 왜 존속하는가? 적을 물리칠 전쟁조차 수행하지 않는다면?”
“실로 그렇습니다.”
“천사들조차 마찬가지다. 천사들은 내가 벌일 전쟁의 재개가 두려워 나를 현혹하는 시간에 가두었다. 아니, 가장 한심한 것은 나지. 근친상간을 벌인 도망자에, 패배한 무장, 배신당한 왕, 현실을 외면하는 신이 나다. 한심한 나라에 어울리는 한심한 왕이다.”
엘릴의 서늘한 넋두리에 아이작은 침을 삼켰다.
칼루리엔은 엘릴의 자기혐오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그를 가두고 있다고 했었다. 그리고 엘릴은 바로 정확히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엘릴에게 그러지 않을 도리가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엘릴은 승천한 순간 승리와 영광, 용기, 명예를 노래하는 기사들의 신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 자신에게 그의 신앙과 교리에 부합하는 구석이 하나라도 있는가?
그의 군대는 여명군으로부터 가장 멀고 안전한 섬나라에 처박혀 있고, 기사들은 자기들끼리 다투기 바쁘며, 엘릴 왕은 제대로 된 카리스마도 보여 주지 못하고 있고, 그의 가장 영광된 소드마스터들은 이교도 성기사에게 연전연패다.
‘천국과 지옥은 같은 공간에 있지.’
그렇다면 이곳은 엘릴을 위해 마련된 지옥일 것이다.
신이 거하는 곳이 꼭 천국이란 법은 없다. 엘릴은 이 지옥의 밑바닥에서 자신의 실패와 후회, 지나간 영광을 핥으며 존재하고 있었다.
이 지옥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하나뿐이다.
전쟁.
엘릴은 번뜩이는 눈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용기를 찾는 자는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명예를 찾는 자는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전장이, 영광을 구하는 자는 영광을 가지고 돌아올 장소가 필요하다.”
그의 눈이 기이한 열망과 욕망으로 흔들렸다.
“기사가 기사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전쟁터가 필요하다.”
***
터벅.
엘릴은 돌 무더기 잔해에서 걸어 내려왔다.
아이작의 눈에 엘릴은 그저 전쟁에 미친 전쟁광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평생 정복과 힘만을 추구하던 패왕에게 다른 가치를 요구하는 것도 이상하다. 하물며 그의 신앙과 신도들이 패배로 얼룩져 있다면 더더욱.
“네가 나와 동류라는 것은 이미 진작에 알아보았다.”
동류라니. 아이작은 자신에게 딸을 탐하는 근친상간 성벽 따윈 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엘릴은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너는 진심으로 스스로의 신앙을 믿지도 않고, 신념조차 네 도구에 불과하다. 사랑도, 충성도, 마찬가지다. 너는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행동하는 자다. 그렇지 않은가?”
아이작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실제로 성지 수복이라는 목표를 위해 엘릴 왕국을 전쟁터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의 인간관계와 여정, 신념, 신앙, 모두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아이작은 엘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승리는 아니다. 아이작은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 물론 승리를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엘릴이 ‘목표’ 달성을 위해 뭐든지 다 버릴 수 있는 존재라면 아이작과 동류라느니 하는 말을 할 리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다면 엘릴의 승리 선언이 ‘라그나로크’일 수가 없다.
전쟁은 과정이지 목표가 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엘릴은 모든 것을 향한 대전쟁을 ‘승리 선언’이라고 정하고 있었다.
“나는 전부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엘릴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나의 신도들이 전사답게, 전쟁터에서 명예와 영광을 부르짖다가 전장의 진창에 널브러졌으면 좋겠다. 마침내 한 명도 남지 않고 전부 다 죽어버린다 해도 나는 기쁠 것이다. 그들은 영광으로 가득 찬 전장에 마침내 입성할 것이니.”
자신의 신앙을 혐오하는 신이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눈앞의 엘릴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엘릴 왕국이 ‘진정한 전쟁터’에서 가장 먼 안전한 곳에 있다는 것, 신도들이 싸움을 거부하는 것, 진보를 멈추고 구식의 안락한 삶만을 고집하는 것.
모든 것이 엘릴에게는 혐오스러웠다.
‘그래서 불사 교단이 언데드로 소생 의식을 치렀을 때 받아들이고 부활한 건가?’
아이작이 불사 교단으로 플레이했을 때에는 엘릴을 언데드로 되살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엘릴의 부활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릴의 기사 빌론 게오르크의 요청이었기에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엘릴 왕국을 전쟁터로 몰아붙이고 싶어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엘릴을 감금하고 있던 칼루리엔이 엘릴 왕국을 지키고 있었던 셈이니 아이러니했다.
아이작은 한 번 더 엘릴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엘릴은 아이작의 코앞에 서서 속삭였다.
“그리고 그 전쟁을 네가 이끌어 주었으면 한다.”
아이작은 자신을 적대하지도, 경계하지도 않는 엘릴을 보면서 기이함을 느꼈다.
물론 엘릴이 자신의 혈통과 신앙에 대해 모를 리가 없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기이할 정도의 호감을 보일 이유가 없다.
엘릴에게는 이름 없는 혼돈 또한 격파해야 할 적일 테니까.
“……제가 네필림인 것은 알고 계시지요?”
“그게 뭐? 나도 네필림을 낳았다. 그 죄악에서 벗어나기 위해 빛의 법전으로부터 벗어나야 했지.”
“제 신앙은 문제가 안 됩니까?”
“내가 아는 한 혼돈은 이미 죽어 이름조차 잊혔다. 혼돈이 인제 와서 망각의 숲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어. 무슨 수를 써서 그 너머에서 촉수를 뻗어 빛의 질서를 어지럽힌다 해도, 그 또한 영광을 위한 전장이 아닌가?”
즉, 어쩌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다시 튀어나온다 해도 자신이 나서서 잘라 낼 것이라는 패기, 혹은 광기였다.
아이작은 엘릴만 이런 건지 다른 신들도 이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엘릴은 아이작에게 열렬한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가 꿈꾸는 미래, 대전쟁의 무대를 아이작이 이끌어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승리를 거두려면 단순히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엘릴은 눈을 번뜩이다가 아이작의 눈가를 손으로 슬쩍 매만졌다.
“네게 세상의 비밀을 알려주마…….”
***
루주베르크의 성의 시간이 갑자기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무너진 벽은 복구되고, 불탄 재는 커튼과 카펫으로 돌아왔으며, 젖었던 돌들은 다시 말랐다. 아이작은 어느 순간 석양빛이 강하게 드리운 홀에 도착해 있었다.
방 중앙에는 성인 남성 여섯 명은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테이블이 한가운데 놓여 있었고, 그 위에 한눈에 보기도 어려울 만큼 커다란 대륙 전도(全圖)가 펼쳐져 있었다. 엘릴 왕국군과 그에 맞서는 다른 군의 배치를 보여주는 그 배치도는 가늠할 수 있는 규모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엘릴 왕국이 아직 대륙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시절. 하지만 그 영토가 야금야금 빼앗기던 어떤 수백 년 전 과거를 보여 주고 있었다.
적어도 5, 600년 전의 과거였다.
“울텐하임 쪽 전황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그때 누군가 뒤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며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그 얼굴, 엘릴이 무거운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작이 뭐라 할 말을 찾는 사이 그의 입이 제멋대로 열렸다.
“최악이군요. 바덴 장군이 전사했고, 울텐하임 수비군은 전면 항복했습니다.”
그것은 아이작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제야 아이작은 자신이 로브를 입고 있으며, 지팡이와 고깔모자를 쓴 마법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금 아이작은 칼루리엔이었다.
엘릴이 입을 열었다.
“또 우르반수스 때문에 개변이 일어난 건가?”
엘릴의 말에 아이작, 아니, 칼루리엔은 침통한 표정을 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바덴 장군과 그의 군대는 도저히 패배할 수가 없는 전력이었는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한 걸 보면…….”
우르반수스로 인한 개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아문달라스는 사후세계가 과거 모든 시간의 총합이라고 했고, 거기서 정정된 과거는 현실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적들은 이를 아주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었고, 엘릴은 그에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둘은 지도를 다시 확인했다. 빛의 법전임을 상징하는 백색의 말들이 상당수 포진되어 있었고, 세상의 화로 교단을 표시하는 주홍색, 소금 의회의 청색, 올칸 규율의 연녹색, 그리고 온갖 색들이 엘릴 왕국의 녹색 말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엘릴 왕국을 침략하는 신앙은 빛의 법전이었다. 엘릴과 빛의 법전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흑제국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엘릴도 반역자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면 당연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왜 엘릴은 우르반수스를 이용하지 않는 거지?’
칼루리엔이 입을 열었다.
“빛의 법전에서 새롭게 명명된 천사, ■■■■가 크게 활약하는 것 같습니다. 우르반수스에서도 그녀의 움직임을 도저히 쫓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는…….”
아이작이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빛의 법전의 천사 이름이 불린 순간 이명과 함께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아이작은 이것이 단순히 특이한 이름이 아니라 우르반수스에서조차 지워진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저 천사는 지금 타천사가 된 어떤 존재일 확률이 높았다.
신에 의해 이름 지어지는 것이 영광된 일이듯, 이름이 지워지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수모이자 절망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기록말소 되기 전까지 저 천사는 엘릴 왕국을 몰아붙이는데 상당한 업적을 세운 것 같았다.
엘릴은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도를 본다고 말들의 배치가 달라지진 않았다.
엘릴 왕국군이 크게 수세에 몰리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엘릴 왕국 영토를 표시하는 지역은 대륙 절반 가까이 있었으나, 왕국군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지역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울텐하임을 빼앗기면서 엘릴은 루주베르크에서조차 물러나야 할 상황이었다.
“알데온으로 우선 넘어가는 건 어떻습니까?”
“알데온? 그 섬 말인가?”
이 당시 알데온은 엘릴 왕국의 중심이라기보다 변방에 위치한 촌구석 섬에 불과했다. 다만 풍광이 아름다워 엘릴은 그곳을 곧잘 휴양지로 쓰곤 했다.
“빛의 법전의 권능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소금 의회의 영역까지 넘어와 행패를 부리기는 어려울 겁니다. 일단…….”
“도망치라는 거군. 아니, 그럴 바에야 승천을 하겠다.”
엘릴이 갑자기 꺼낸 말에 칼루리엔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칼루리엔이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승천 의식에 대해 알려준 것이 바로 칼루리엔이었으니까.
엘릴은 칼루리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법사, 왕국 전역에서 내 불패의 군대가 터무니없는 실수와 오판으로 전멸당하고 있다. 심지어 나와 니믈롯이 직접 출전하여 대승을 거둔 전투도 돌아와 보면 패배한 걸로 되어있어. 이 말도 안 되는 사기행각이 가능한 건 빛의 법전이 역사를 조작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거기에 다른 신들도 동조하고 있고!”
엘릴은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
“승천을 해야겠어. 그래야 등대지기가 수작질 부리는 걸 막을 수 있다. 우리도 우르반수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해!”
“폐하, 그렇게 되면 폐하께서…….”
“육신은 죽겠지. 하지만 신에게 육신이 대수인가?”
“폐하께서는 아홉 신앙에 편입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십니다!”
칼루리엔은 신음하듯 말했다.
“살아있는 존재는 희로애락을 가지고 있고, 실수도 할 수 있고 고민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승천한 신은 그럴 수 없습니다. 아홉 신앙이 된다는 것은 절대적인 질서이자 관념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번에 이미 했던 이야기로군. 그래. 내가 그 절대적인 질서가 되겠다는데 그게 무슨 문제지?”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질서, 사상, 신념, 도덕, 윤리…… 모두 영원불멸하는 진리가 되어 남는다는 겁니다. 폐하께서는 고민도 실수도 없는 존재가 되실 겁니다. 만약 그 질서에 어긋나는 것이 나타나면 끊임없이 정정하기 위해 세상을 누르려 들 겁니다.”
칼루리엔의 말은 지나치게 모호하고 형이상학적이었다.
당장 승천한 신이 되어서 빛의 법전으로부터 승리하고 싶은 엘릴에게는 와닿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칼루리엔도 이 이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힘들어하고 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엘릴은 지금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혁명가인 셈이다. 혁명가는 세력도 강하고 주변으로부터 숭배도 받는다. 하지만 승천한다는 것은 혁명가의 죽음으로 이념을 완성시키는 것과 같다. 종종 사람들은 이념과 혁명가를 동일시하지만 둘은 다르다.
혁명가는 변절할 수 있지만 이념은 바뀌지 않는다.
승천한 신은 사유하고 고민하는 생물이 아니다.
하나의 개념으로 존재하게 된다.
절대 변하지도 설득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 개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