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13)
213화. 칼끝 너머에 (1)
“귀 기울여주십시오, 폐하. 물론 폐하께서 위대한 질서의 한 축이 되고 싶으시다면 저는 얼마든지 돕겠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단순히 공주님을 보호하고 싶으신 거라면, 차라리 멀리 도망치십시오.”
칼루리엔의 말은 간절했다.
엘릴은 빛의 법전을 배교하고 나와 신이 되는 의식을 치렀지만, 아직 그는 그저 고대신과 비슷한 ‘숭배받는 강력한 존재’에 불과했다. 진정한 신이 되려면 승천 의식을 치러 사후세계의 한 축을 차지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지배해야 했다.
하지만 그게 엘릴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가?
칼루리엔은 엘릴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뭔지 알고 있었다. 엘릴이 빛의 법전을 배교하고 신이 되었던 것은 딸을 보호하고 당당한 승리를 거두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라라비아를 보호하려면 도망이 아니라 승리가 필요해. 칼루리엔.”
그러나 엘릴은 전사였다.
그는 지금까지 칼과 땀, 피로 모든 것을 일궈 냈다.
엘릴은 불타는 눈으로 칼루리엔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분노와 열망, 패전에 대한 설욕 같은 기사도적 욕망이 가득했다.
정복자이자 승리자였던 그는 자신이 이런 ‘잔수작’에 패배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는 나와 직접 전장에서 마주치게 될 거다. 그러면 누가 진짜 전사인지 알겠지.”
***
아이작이 시선을 돌렸을 때 다시 그는 폐허가 된 루주베르크로 돌아와 있었다.
“보았느냐? 이것이 엘릴이다.”
엘릴은 텅 빈 폐허를 걸으며 중얼거렸다.
“가정을 보호하는 아버지, 비겁자의 수단에 맞서는 기사, 최후의 순간까지 항복하지 않는 전사다.”
‘지금 자랑하는 건가?’
하지만 아이작은 곧 엘릴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엘릴이라는 개인은 이제 더 이상 없다.
그저 엘릴이 세운 관념과 규칙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 눈앞의 엘릴, 아이작이 본 엘릴은 엘릴 신앙이 구현한 이상적인 모습일 뿐이다.
칼루리엔이 말했던 ‘질서에 편입’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리라.
엘릴은 이 승천의 대가로 빛의 법전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을까?
지금 엘릴 왕국의 영토를 보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우르반수스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도 그의 최선은 무희를 보호한 게 전부였을 것이다.
아이작은 엘릴이 보여 준 것을 통해 진정한 신이 되려면 육신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과, 신적인 존재들은 설득이나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그는 후자가 더 걱정되었다.
비인격신은 몰라도 인격신은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왔으니까.
‘그러면 정신병에 걸려서 자살하려 드는 일도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생각해 보면 엘릴은 자살조차 불가능하다.
승천한 신이 된 순간부터 그는 그저 자신의 주관을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밀고 가는 질서가 되고 마니까.
그 질서는 지금 투쟁을 원한다. 다만 그 결과가 파멸로 이어질 뿐.
엘릴은 자신의 기억을 보여 준 이유를 설명했다.
“다른 신앙과의 싸움은 결국 우르반수스에서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막아내지 못하면 너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
엘릴의 경고에 아이작은 불사 교단의 신을 떠올렸다.
‘잠깐, 그러면 불사황제 베셰크는 어떻게 된 거지?’
그걸 ‘살아 있는 몸’이라고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불사교단의 신이자 지배자인 베셰크는 육체를 가지고 지상을 거니는 신이다.
사후세계를 아예 지상으로 끌어내린 이상, 우르반수스의 권능을 베셰크도 그대로 가졌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엄연한 아홉 신앙인만큼, 완벽하진 않더라도 사후세계의 수정에 휘둘릴 정도는 아니라고 봐야 했다.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긴 했지만, 확실히 치명적인 사실이군.’
이미 소금 의회의 우르반수스에서 아문달라스를 통해 깨달은 내용이었다. 우르반수스를 통해 역사 왜곡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역사 왜곡이 이루어지면 현실 역시 개변된다는 것.
즉, 일개 필멸자에 불과한 이들은 진정한 신과의 싸움에서 죽어도 이길 수 없다.
아홉 신앙과 싸워서 맞설 수 있는 것은 아홉 신앙에 속한 이들뿐이다.
이들만이 역사 개변을 막을 수 있으니까.
빛의 법전이 그토록 제거하려 했지만 붉은 성배 클럽이 아직 건재하고, 불사 교단이 세상을 양분할 정도로 성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름 없는 혼돈이 과연 대항할 수 있을까?’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도 일단 아홉 신앙에 속한 이상 대항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우르반수스를 넘나들며 활약해야 하는 것은 결국 천사인데, 이름 없는 혼돈의 우르반수스는…… 그런 게 존재하는지나 의문이고, 있다 하더라도 개막장 상태일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개입하지 않는 쪽이 좋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엘릴이나 붉은 성배 클럽에 손을 벌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엘릴은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고, 붉은 성배 클럽은 이러나저러나 비밀 동맹 관계다. 소금 의회를 당장 움직일 수 없는 게 아쉬웠지만, 그건 차라리 미래의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게 나아 보였다.
이렇든 저렇든 친구는 많은 편이 좋다.
그러려면 결국 아이작이 쓸모 있는 존재처럼 보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미래를 들여다보고 역사를 개변시키는 신앙들이 그를 죽이려 들지 않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가 자신들의 미래에 쓸모 있기 때문에.
아이작은 그들이 그리는 미래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각 신앙 제각각의 승리 선언에 자신이 한몫하게 되리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그는 신들 사이에서 지극히 정치적인 존재였다.
“이해했습니다. 엘릴.”
그리고 아이작은 이용할 수 있다면 신조차도 지렛대로 삼을 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렇다면 아까 말씀드린 소원을 지금 빌고 싶습니다.”
아이작은 엘릴의 호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 먼저 그를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엘릴은 이미 설득당할 준비, 아니 상대가 원치 않는다 해도 강압적으로 몰아붙일 준비가 만반이었다.
그는 전쟁을 원한다. 영광과 명예와 용기를 구할 수 있는 전장을 원하니까.
언데드가 되어서라도 전쟁을 만들고자 했던 자다.
아이작 정도라면 그가 바라는 전쟁의 방아쇠를 당겨 주는 존재이자 대리인으로 충분했다.
“소원?”
엘릴은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물었다.
“여명군 참전이 소원이라고 하지 않았나?”
“엘릴께서는 이미 여명군 참전을 간절히 원하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엘릴의 소원이지, 제 소원이 아니지요. 오히려 제가 당신께 전쟁을 들고 왔으니 치하받아 마땅합니다.”
엘릴은 웃음을 터뜨렸다. 만족스러운 웃음이었다.
이런 에고 높은 강자는 오히려 자신 앞에서 당당한 존재를 좋아한다. 아마 그의 동료들,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이작은 무희가 어떤 성격이었을지도 내심 알 것 같았다.
“좋다. 소원을 말해봐라.”
그리고 아이작은 엘릴이 더 만족할 소원을 알고 있었다.
“대련 한판 부탁합니다.”
***
엘릴은 아이작의 요청을 시원하게 받아들였다.
무신 엘릴과의 대련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소원을 그는 비웃지도, 웃어넘기지도 않았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어쩌면 여명군과 마찬가지로 그는 이런 것 또한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지극히 기사스러운 욕망에 맞춰 주는 것을.
하지만 아이작에게 이는 철저한 계산과 이득을 따져 고른 결정이었다.
‘이기는 건 기대도 안 한다.’
만약 엘릴의 실력이 전해지는 전승의 반만큼이라도 사실이라면 자신은 칼도 꺼내기 전에 죽을 것이다. 심지어 엘릴은 승천하여 전성기의 육신을 구현할 수 있고, 여전히 검술의 이상향으로써 존재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이나 부상 따위는 그에게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싸울 가치가 있었다.
‘엘릴의 검술을 반의반만이라도 훔쳐 배울 수 있다면, 성물이나 축복 따위보다 백배는 이득이야.’
엘릴은 아이작의 맞은편에 섰다.
장소는 여전히 폐허가 된 루주베르크. 하지만 충분히 넓었기 때문에 대련에는 지장이 없었다.
“먼저 규칙을 설명하마.”
엘릴은 칼 한 자루를 주워 들며 말했다.
아이작은 규칙이라는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보통 대련의 규칙은 상대방이 다치거나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한다. 하지만 엘릴이 아이작을 죽일 정도로 실력이 어설플 것 같지는 않았고, 아이작 또한 엘릴을 다치게 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우선 나는 기적을 쓰지 않겠다. 기척을 지워서 눈앞에서 사라지지도 않을 거다. 충격파를 일으켜서 건물을 무너뜨리지도 않을 거고, 공기를 터뜨려서 네 고막을 찢어 균형감각을 허물어뜨리지도 않을 거다. 살기로 네 심장을 멎게 하지도 않을 거다. 검기도 쓰지 않을 거고, 상급 검술을 쓰지도 않을 거다. 오직 힘과 속도만으로 널 상대하겠다.”
“……제게도 같은 규칙이 적용되지는 않을 테고, 엘릴께서만 그러신다는 거지요?”
“그래.”
“그건 보통 제약이나 페널티라고 부릅니다만…… 일단 감사합니다.”
스스로 페널티를 안겠다는데 아이작이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실망스러운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훔쳐 배우고 싶은 건 엘릴의 검술이었으니까.
“하지만 엘릴의 검술을 견식하고 싶은 제 마음은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상급 검술은 쓰셔도 되지 않을까요?”
아이작은 자신이 검술로 천사를 꺾을 수준은 아니더라도 버티는 수준은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엘릴이 아무리 전성기에 잘나갔어도 검기나 상급 검술도 쓰지 않고 그럴 수 있을까?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엘릴은 그냥 필멸자가 아니라 태생부터 비현실적인 무언가였을 거다.
“그건 너 하기에 달렸지.”
엘릴은 대답을 내놓은 뒤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순간 아이작은 일대의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폐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저물어 가던 석양에서는 피비린내가 풍겼고, 공기조차 천 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얼어붙었다. 단지 분위기를 잡는 것만으로도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워지는 기세에 아이작은 머리가 아득해졌다.
‘이게…… 엘릴!’
엘릴은 전혀 봐줄 생각이 없었다.
결투가 그러하듯 대련 역시 신성한 것이다. 엘릴은 자신이 내놓은 제약 외에는 모든 노력을 다해 아이작을 꺾을 생각이었다.
엘릴이 발걸음을 뗐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순간 아이작은 목을 강하게 틀었다.
촤악. 아이작은 가까스로 강압적인 기세에서 빠져나와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목은 이미 엘릴의 검 끝에 강하게 긁혀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이작은 서둘러 뒤로 물러나 상처를 지혈했다.
엘릴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나.”
‘예상은 했지만 보이지도 않는군.’
아이작은 쓰게 웃었다.
엘릴은 그의 목에 구멍을 내려고 하진 않았다. 그저 검 끝을 가져다 댔을 뿐이지만, 아이작이 급히 움직이면서 상처가 커진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엘릴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덴 성공한 것 같았다.
“그래도 반응하다니 대단하군.”
“……감사합니다.”
“하지만 서툴렀다. 대련을 시작한 순간 검기를 피워올리고 기적으로 온몸을 무장했어야지. 내게 선공을 양보할 게 아니라 먼저 달려들었어야 했다. 소환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뭐든 다 소환해라. 너는 혼돈의 권속 아닌가. 부정하고 삿된 수단을 써도 좋다. 이길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뭐든 다 동원해라.”
진작에 그랬다면 방금 같은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작은 엘릴의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그 후 여파가 두려워서 차마 꺼내지 못했던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아이작은 스스로를 무장하기 시작했다.
아이작의 기세가 변화하기 시작하자 엘릴은 다시 차분하게 맞은 편에 섰다. 이번에는 아이작이 먼저 공격해 오길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아이작은 상대가 버틸 수 있을까, 같은 오만한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다.
지금, 오늘, 여기서 엘릴을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으로 싸우지 않는 한 그는 엘릴에게서 티끌만 한 가르침도 얻어 갈 수 없을 것이다.
배움도 교훈도 자격 있는 자에게나 주어지는 것.
아이작의 눈이 강렬한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촉수가 스멀거리며 그의 몸을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오늘 나는 신을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