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17)
217화. 대전사 (2)
이제는 부정할 수도 없는 권위인 카훌린마저 손에 있으니 게르토니아 제국으로 돌아갔을 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모르는 척 새 칼이라고 할까?’
성검을 든 엘릴의 대전사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칼밥이 되고 싶지 않으면…… 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엘릴의 대전사가 되어 버릴 거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아이작은 스스로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다독였다. 분명 합리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아이작은 카훌린에 박힌 보석, 칼루리엔의 드래곤 하트를 들여다보며 말을 걸었다.
“유배자 칼루리엔. 지상의 공기는 어떻습니까?”
칼루리엔의 드래곤하트가 웅웅대며 빛을 반짝였다. 그의 사념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칼루리엔 역시도 지금 이 상황을 어처구니없어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도 네가 의도한 것이었나?]“댁의 드래곤 하트를 뽑아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카훌린을 들고 가게 될 줄은 몰랐지요. 이건 받는 사람도 부담되는 선물입니다.”
거기다 돌려주려던 분열 예식까지 다시 들고나왔다. 지금까지 엘릴의 성검을 두 개나 들고 다닌 사람이 엘릴 말고 또 있었을까 싶었다.
[그분을 탓할 수는 없겠군. 한동안 웅크리고 계셨으니 이제 반발하여 튀어 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승리와 영광과 용기를 부르짖던 분께서 이 오지의 섬에 틀어박혀 계셨으니 얼마나 굶주려 계시겠느냐.]칼루리엔은 엘릴을 이해한다는 듯 말하면서도 착잡한 감정을 지우기 힘들어했다.
엘릴의 명령이란 결국 엘릴 교단이 엘릴의 신도답지 못하게 행동할 바에는 차라리 전장에 나가서 다 죽어 버리라는 것이었다.
그의 천사들 역시도 이제 엘릴의 의도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카훌린에 달린 자살 옵션은 어쩌면 엘릴의 의지가 담긴 명령일지도 모른다.
‘이거 나중에 내가 말 안 들으면 대전사 자격 박탈하고 목을 찌르게 만들려는 수작 아니야?’
아이작은 새삼 엘릴의 의도를 의심해 보았지만, 여명군은 어차피 일어날 일이다.
아이작은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엘릴을 섬으로 추방할 때 왜 다른 교단들까지 그렇게 협력했던 겁니까? 빛의 법전이야 당연하다지만 소금 의회랑 세상의 화로, 심지어 올칸 규율까지 보이던데.”
올칸 규율이 지금 흑제국에 소속된 무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엘릴이 그 시대의 ‘공적’이었던 셈이다. 지금의 불사교단 이상으로.
물론 엘릴이 보여 주던 위업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싶지만, 엘릴이 딱히 어떤 민족이 태어나기도 전에 대량 학살한다거나 죽은 신을 언데드로 되살리거나 인류의 1/3쯤 멸종시킨 것도 아닌데 그럴 필요까지 있나 싶었다.
하지만 칼루리엔의 대답은 담담했다.
[원래부터 신들은 엘릴을 좋아하지 않았다.]아이작은 이유를 듣기도 전에 이미 알 것 같았다.
엘릴은 그때 아홉 신앙이 아니면서도 세상의 절반을 차지한 고대신 비슷한 존재였다. 그러면서 신의 비밀을 너무 쉽게 떠들어댄다. 신들도 입 가벼운 신을 좋아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칼루리엔이 밝힌 이유는 의외의 것이었다.
[원래 신성한 존재들은 네필림을 낳은 자에게 관대하지 않으니.]음음, 역시 네필림은 죄악이지……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네필림을 낳은 자요? 네필림이 아니라?”
[네필림? 신들도 네필림 자체는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죄악의 결과물일 뿐, 죄인은 아니니까. 하지만 네필림을 낳는 행위는 신성을 품은 자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이다. 들키면 어떤 신앙이라도 반드시 타천(墮天)시킬 만큼.]타천사, 즉, 이름을 빼앗고 천사의 지위도 빼앗으며 존재한 적 없던 자로 만든다는 뜻이다. 타천사가 흔하진 않지만 이사크레아 영지에 출몰할 정도로 심심찮게 발견되는 것을 보면, 기나긴 역사 속에서 천사가 되었다가 날개를 빼앗긴 자가 무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많은 타천사들의 원래 이름은 알 수 없다.
분명 역사를 풍미했을 대단한 위인들이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엘릴에게 임신한 아내를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왔던 것도 그것 때문인가? 무희가 네필림이라서?’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그런데 왜 네필림을 낳는 걸 죄악으로 여기지?’
아이작은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이 신들에게 크게 거슬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결국 자신의 생물학적 부모에 대해 생각하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릴은 네필림인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배교하고, 신이 되이 되어야 했고, 딸에게 심장까지 내어 주었다. 그렇다면 아이작의 부모 역시 무언가 엄청난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번식하고 생육하는 것은 생물의 본능이다. 신의 입장에서도 키우는 가축이 더 크고 번성하는 것은 기쁠 일이다. 하지만 왜 그것을 죄악으로 여기고 통제하는 것일까?
아이작이 그것에 대해 고민하려던 찰나, 갑자기 카훌린을 들고 있던 팔이 툭 떨어졌다.
“응?”
카훌린을 다시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제야 아이작은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서야 엄청난 공복감이 찾아왔다.
엘릴과의 싸움으로 지금까지 포식했던 것들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덕분이었다.
‘왜 이제서야?’
[몸에 깃들었던 우르반수스의 신성력이 주변의 압력에 맞춰서 빠져나간 모양이군.]칼루리엔이 아이작의 상태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말했다.
[힘이 충만하게 들어차 있다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 것뿐이다. 죽을 위기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도록.]‘아, 이런.’
하지만 칼루리엔이 말하는 대상은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지, 네필림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이작은 휘청거리다가 주저앉고서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온갖 축복으로 신체 상태를 건강하게 유지해 왔지만 ‘죽은 신의 내장’이 공복으로 으르렁거리자 갑옷을 입고서는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심지어 경량화 축복까지 걸린 갑옷이었는데도. 열심히 키운 근육과 체력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아이작은 낑낑대며 갑옷을 겨우 벗어 던지다가 포기하고 드러누웠다. 저혈압과 저혈당이 동시에 온 것처럼 눈이 자꾸만 감겼다.
‘……복귀는 헤사벨과 에델레드에게 맡겨야겠군.’
***
아이작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과 익숙한 헤사벨이 보였다. 이제는 낯선 장소에서 눈을 뜰 때마다 천장의 무늬처럼 붙어 있는 헤사벨이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헤사벨은 아이작이 눈을 뜬 것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재빨리 천장에서 내려왔다.
“괜찮으세요, 아이작 님?”
헤사벨의 등 뒤에는 여전히 붉은 날개가 돋아나 있었다. 하지만 영리하게도 그걸 유연하게 접어, 마치 망토처럼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덕분에 특이한 깃털로 치장한 로브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음, 괜찮다. 여기는 어디지?”
“엘리온 성채요. 그 어린이 왕이 아이작 님을 업겠다고 고집을 부렸는데 다리가 질질 끌려서 제가 업고 왔어요. 리안나 게오르크는 물론이고 알데온 기사단도 우리 보호를 선언했으니까 안심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리안나? 되살아난 모양이군?”
“예! 그쪽도 우리랑 같은 날 깨어났다고 하더군요. 수정에서 나오자마자 성지로 사람을 보내서 우리를 안내해 줬어요. 하마터면 아이작 님을 엘리온 성채까지 업고 갈 뻔했지 뭐예요? 그런데 우리가 며칠이나 우르반수스에 있었는지 아세요?”
아이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보았다. 분명 들어갈 때만 해도 늦봄이었는데 지금은 완연한 여름처럼 보였다.
“48일?”
“오, 어떻게 아셨어요?”
소금 의회에서 달우물 의식을 통해 우르반수스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에도 48일이 지났었다.
48일이라는 숫자에 뭔가 의미가 있거나, 그 이상 머무는 것은 불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우르반수스에 들어가면 반드시 그 숫자를 채워야 돌아올 수 있다거나.
아이작은 일어나려다가 극심한 공복감에 몸을 숙였다.
죽은 신의 내장이 빨리 뭔가를 넣지 않으면 아이작이 수년간 애써 길러 놓은 근육들을 모조리 잡아먹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었다. 하지만 숟가락 들 힘조차 부족한 상태였다. 식은땀이 솟을 지경이었다.
‘네필림은 다들 원래 이 상태인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수도원 시절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아이작은 지금 과하게 오버튜닝한 엔진 같은 상태였다. 연료가 충분하다면 엄청난 힘을 보여 주지만, 부족하다면 평범한 엔진만도 못한 셈이다.
“……헤사벨, 미안하지만.”
“아, 예! 그럴 줄 알고 준비해 왔어요!”
헤사벨은 이미 이사크레아 영지에서 아이작의 공복 상태에 대처한 적 있었다. 아이작은 이미 자신의 옆에 돼지 통구이 한 마리가 식은 채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맛을 따질 타이밍은 아니었다.
아이작은 헤사벨에게 엄지를 치켜올리고, 돼지를 향해 포크 대신 왼손을 내밀었다.
***
당장 굶어 죽을 것 같은 상태를 모면하고 나자 아이작은 자신의 상황과 득실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얻은 것은 카훌린과 엘릴의 대전사 지위, 칼루리엔의 드래곤 하트다. 잃은 것은 그동안 배 속에 채워 넣었던 고기들. 덕분에 임시 특전은 모조리 날아갔다. 부패한 천사의 시독을 잃은 것은 조금 안타까운 일이지만, 쓸 만큼 쓰긴 했다.
이제 엘릴의 대전사 지위를 획득한 아이작은 사실상 상징적 권위 면에서는 국왕인 에델레드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엘릴의 기사들이 에델레드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신의 말을 듣거나 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무시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 이름 없는 혼돈은 확실하게 빡쳤지만, 빛의 법전은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었다.
“오월의 검, 잠깐 좀 나와보시죠.”
아이작은 잠시 사라진 오월의 검이 이제 다시 회복해 모습을 드러내길 기대하며 불러보았다. 하지만 오월의 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이작은 고민하다가 파수자의 등대를 켜 보았다. 온화한 빛이 퍼져나가며 질서를 고정시켰다. 그제야 비로소 무언가 반응이 나타났다.
아이작의 눈앞에 작은 날개 형태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꽃 주변에는 낡고 이 빠진 검 두 자루가 수직으로 선 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이작은 이 작고 아담한 불꽃이 오월의 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월의 검, 괜찮으십니까?”
[그래, 살아있다. 주변 꼴을 보아하니 엘릴을 만나고 돌아온 모양이군.]“실패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모든 것은 등대지기가 세운 대계대로 흘러간다. 실패할 리가 없지.]그녀는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덧붙였다.
[그리고 네 실력과 재주를 볼 때, 겨우 칼루리엔 정도로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지옥에서도 기어 올라올 방법을 잔꾀를 내는 녀석이니.]아이작은 예상치 못한 칭찬에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어쨌든 엘릴은 이미 만났고, 이제 우르반수스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좀 난처한 일이 생겨서 그쪽 의견을 물으러 왔습니다.”
오월의 검은 작은 몸을 이리저리 돌려 주변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 검.]그때 오월의 검이 아이작의 한 손을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그의 시선은 아이작의 무릎 위에 놓인 카훌린을 향해 있었다. 아이작은 오월의 검이 카훌린에 박힌 드래곤 하트의 정체를 알아볼까 봐 조마조마했다.
[성검 카훌린이군. 엘릴의 봉인 촉매로 사용되던 것인가?]“음, 네.”
오월의 검은 드래곤 하트를 지적하는 대신 자기 할 말만 했다. 신경 쓰지 않는 것이거나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드래곤 하트에서 칼루리엔의 기척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엘릴이 제게 이 검을 주면서 저를 대전사로 임명했습니다. 제 의사 따위는 묻지도 않더군요.”
[대전사로?]오월의 검은 다소 놀란 듯 물었다.
[영광스러운 일이지. 축하한다.]“문제가 되진 않는 모양이군요?”
[1차 여명군 당시에 나도 임명된 적 있었다.]“……의외로 여러 명 뽑나 봐요?”
[아니. 한 번에 한 명만 뽑는다. 하지만 대전사는 수명이 짧으니까 큰 전쟁이 나면 동시대에 여러 명이 나올 수 있긴 하지. 나도 결국 죽고서야 대전사의 책임을 내려놓았으니.]엘릴은 다른 종교건 뭐건 잘 싸우고 자기 목적에 부합하기만 하면 대전사로 임명하는 모양이다. 결국 대전사라 함은 신이 내린 명령을 직접 수행하는 자니, 누가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엘릴이 침묵한 근 백 년 이래 대전사의 지위를 받은 것은 아이작이 유일할 것이란 점은 확실했다.
[그리고 성검까지 받는 경우는 처음 보았군. 보통 지위만을 받았을 뿐이니. 어쩌면 엘릴 또한 너를 특별 대우하는 걸지도 모르겠다.]아이작은 엘릴의 특별 대우란 것이 조금 꺼림칙했기 때문에 그냥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