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19)
219화. 대전사 (4)
“예?”
예상치 못한 말에 모두가 로잘린드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여명군을 이끌 대전사로 뽑혔으니 당연히 결투에 나서게 될 줄 알았던 아이작도 놀라서 로잘린드를 바라보았다.
‘혹시 정말로 여명군을 반대하는 건가?’
솔트아인 입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고립주의적 귀족들은 솔트아인을 편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로잘린드가 일부러 에델레드를 곤경에 내몰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아이작이 반대 의견을 밝히기 위해 일어나려 했을 때, 에델레드가 입을 열었다.
“하, 하겠습니다.”
아이작은 또 한 번 경악했다.
물론 에델레드는 우르반수스에 진입했다가 나오면서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해도 좋을 정도로 성장했다.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하지만 그곳에서 보여 주었던 힘은 우르반수스의 충만한 신성력 때문에 보여 줄 수 있었던 일시적인 성장이다. 그 경험을 충분히 녹여 내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폐하, 칼드부흐로 만들어낸 검기는 일시적일 수 있습니다. 부작용까지 고려하면…….”
“아니오, 성배기사. 할 수 있소. 할 수 있을 것 같소.”
어째 자신 없어 보이는 목소리였지만, 에델레드는 당당하게 일어섰다.
난처해 보이는 것은 리안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죄인으로서 에델레드와 맞서고 싶지도, 여명군에 반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대충 싸우거나 일부러 져 주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 반발이 클 것이다.
에델레드는 앞으로 여명군을 총지휘할 지휘관으로서 분명한 역량을 보여 주어야 했고, 리안나는 반대파의 분명한 의지를 보여 줘야만 하는 상황.
아이작은 이 골치 아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로잘린드 부인은 대체…….’
그러나 로잘린드는 팔짱을 낀 채 좌중을 둘러볼 뿐이었다. 아이작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돈의 눈이라도 써서 알아내 볼까 했다. 하지만 일단 에델레드를 믿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만약 에델레드가 패배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엘릴의 대전사로서 억지를 쓰면 일부나마 병력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기일을 잡을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시작하지요.”
에델레드는 바로 칼을 들고 홀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리안나도 잠시 망설이다가 나왔다. 그녀의 상처는 수정에 갇혀 있는 동안 전부 회복된 상태였다.
둘은 약속한 듯 성검이 아닌 가검을 들었다. 좌중이 모인 상태에서 성검을 휘두르면 휘말리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에델레드가 칼드부흐의 힘조차 빌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길지 알 수 없었다.
‘리안나가 경험도, 실력도, 힘도 훨씬 더 강하다. 에델레드가 당장 검기를 사용한다 해도 풋내기 수준이고, 내 검술도 다 익히지 못했어. 이길 방법이 없는데?’
리안나가 앞에 선 에델레드에게 말했다.
“그럼, 폐하. 제가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리안나는 가볍게 검을 흩뿌리고는, 단숨에 에델레드를 향해 돌진했다.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빠른 속도.
그녀는 단숨에 세 방향에서 에델레드를 찌르는 공격으로 시작했다. 루미아드가 없어도 싸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에델레드는 이를 악물고 칼을 휘둘렀다. 소드마스터의 검기 앞에서 당당하게 칼을 휘두르는 용기는 대단했지만, 그의 검에선 검기도, 탁월한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작이 에델레드의 일방적인 패배를 예감한 순간.
쾅! 굉음과 함께 리안나의 몸이 튕겨 나갔다. 달려든 속도보다 튕겨 나가는 속도가 더 빨라서 아이작조차 한순간 시야에서 놓쳤을 정도였다. 리안나는 벽에 부딪힐 뻔했다가 가까스로 검을 땅에 꽂으면서 멈춰 섰다. 돌바닥이 검에 패여 긴 상흔이 남았다.
경악 어린 시선이 에델레드에게 향했다.
에델레드는 눈을 부릅뜬 채 긴 숨을 토해 냈다. 순간 주변에 늘어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심장이 멎는듯한 중압감을 느꼈다.
에델레드의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뿜어져 나오며 머리카락이 올올이 일어서고, 입에서는 유황불이 끓는 듯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천사!’
아이작은 에델레드의 몸을 장악한 천사가 ‘사자 기사’임을 알아보았다. 저 무시무시한 중압감과 힘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에델레드, 아니 그의 몸을 장악한 사자 기사는 좌중을 슥 둘러보았다. 충격에 빠진 사람들은 말을 할 수도, 움직임도 보일 수 없었다.
사자 기사는 만족한 듯 입을 열었다.
“이게 엘릴의 뜻이다.”
순간 홀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귀족, 기사, 병사할 거 없이 모두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꿇지 않으면 다리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지경이었다.
서 있는 사람은 오로지 아이작과 에델레드의 몸을 장악한 사자 기사뿐이었다.
사자 기사는 불타는 눈으로 시선을 돌려 잠시 아이작을 응시하다가 사라졌다.
에델레드는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섰다. 그리곤 자신을 향해 부복한 사람들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사자 기사가 몸을 장악한 동안 의식이 완전히 날아간 듯했다.
무거운 침묵 속에, 로잘린드가 앞으로 나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엘릴의 결정이 내려졌소. 이견이 있는 자가 있다면 결투장에 서시오.”
물론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
“결투 재판에 신이 임해 바른 결정을 끌어낸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진짜 이런 무식한 방법일 줄은 몰랐습니다. 원래 우연이나 용기를 북돋는 방식으로 한쪽 편을 들어주는 거 아닙니까?”
결정이 내려졌으니 이제 움직일 뿐이다. 귀족들은 여명군 파병이라는 거사가 결정된 뒤, 보낼 물자와 병사, 기사들 등 영지의 역량을 파악하기 위해 서둘러 돌아갔다.
아이작은 이 어처구니없는 ‘결투’ 결과에 대해 로잘린드에게 투덜거렸다.
로잘린드는 씩 웃을 뿐이었다.
“신의 섭리는 신묘한 법 아니겠습니까.”
그냥 승부 조작 아닌가 했지만, 신앙인들에게는 확실한 결과다.
“로잘린드 부인께서는 결투 결과가 이렇게 나올 줄 아셨습니까?”
“설마. 하지만 어렸을 때 결투 재판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요. 아직 신탁이 끊어지기 전의 시절을 기억하시던 어른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제 엘릴께서 침묵을 그만두시고 지상에 신경 쓰시기로 하셨다면, 목격자들의 재담이 아니라 직접 의지를 보이시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입니다.”
노인들의 지식과 경험은 신묘하다. 아이작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직도 이 세계에 대해 얕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자신은 에델레드와 리안나가 싸울 때 ‘객관적’으로 둘의 역량을 비교해 승률을 가늠했다. 하지만 충실한 신도 입장에서는 엘릴의 의지만 확실하다면 승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델레드가 아니라 돌멩이를 갖다 놨어도 리안나가 졌으려나?’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어쨌든 에델레드에게 권위를 더해 주기에는 이만한 이벤트도 없었다. 에델레드는 당분간 ‘사자 기사가 임한 왕’이라는 타이틀로 귀족들을 휘어잡을 것이다. 물론 덕분에 리안나는 배가 뚫렸던 상처가 또 터지고 손가락까지 네 개나 부러졌지만.
하지만 그녀도 나름대로 결과에 만족한 듯했다.
에델레드는 리안나에게 사과하면서 직접 상처를 돌봐주고 있었다.
리안나에게는 아직 에델레드가 동생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를 한 방에 날려 버리던 모습에서 뭔가 기사다운 매력을 느끼거나 하지 않았을까.
“그건 그렇고, 성배기사가 가져온 물건도 귀족들을 설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소. 그게 아니었다면 심정적으로 따르기 어려웠겠지.”
로잘린드가 말한 ‘물건’은 과거 이사크레아 영지에 리치 알 두아자드가 불러낸 듀라한이 가지고 있던 검의 손잡이였다. 엘릴 출신의 명망 높은 기사였던 그는 시신이 도굴되어 듀라한이 되어 떠돌다가 아이작 손에 ‘성불’ 당했다. 그가 남긴 손잡이에는 엘릴에서 꽤 명망 높은 귀족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제야 반 여명군파, 그리고 고립주의파 귀족들은 자신들이 전쟁을 멀리하는 것과 별개로 전쟁은 언제나 가까이 있었다는 것과, 이미 수많은 조상들이 도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까지 깨달았다. 그들이 서둘러 영지로 돌아간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많은 가문들이 화장을 하긴 하지만, 그때그때 유언에 따라 납골당이나 묘를 파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아마 이미 적지 않은 기사들의 시신이 도굴당했을 겁니다. 고작 시신 몇 구 훔치자고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겠지. 불사 교단의 해악이 여기까지 미칠 줄 누가 알았겠소. 하지만 그 사실이 알려지면 확실하게 원정 분위기에 불이 붙겠지…….”
엘릴의 ‘결정’이 내려졌으니 당연히 귀족들은 여명군에 참전한다.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마지못해 따를지도 모르고, 적극적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작이 가져온 도굴당한 부장품 덕분에 그들 역시 동감할 만한 확실한 명분을 만들 수 있었다.
“그렇지. 성배기사가 가장 고생했으니 이걸 넘겨드릴까 합니다.”
로잘린드는 아이작에게 상자 하나를 꺼내 넘겼다. 상자를 열어 보자 새까만 장갑이 보였다.
“이건…… 빌론이 끼고 있던 장갑 아닙니까?”
루미아드의 냉기는 물론이고 아이작의 검기까지도 막아 냈던 장갑이기에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빌론과 그의 기사들은 모조리 수거되어 불에 태워졌다고 했다. 불사교단의 언데드들을 죽이는 방법은 오직 불로 태우는 것뿐이다. 그마저도 영혼이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번거로운 정화 의식으로 쫓아내기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전리품은 남은 것이다.
“그렇소. 듣자 하니 ‘죽은 자의 손’이라고 불린다더군. 유용한 성물인 것은 확실한데, 이교도의 성물임이 확실하니 아무도 안 가지려고 해서 내가 보관하고 있었소. 하지만 성배기사라면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이작은 장갑을 꺼내 살펴보았다.
[죽은 자의 손(S)] [죽은 자의 원혼이 생자를 붙잡고 지옥으로 끌고 갈 때 쥐는 손아귀를 본떠 만든 장갑. 이미 죽은 것이기에 모든 것에 내성이 있으며, 영혼에 직접 손댈 수 있다.]‘나쁘지 않군.’
공격력이 강해지고 있는 데 반해 아이작의 내구력(?)은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아이작이 ‘안 맞으면 된다’는 고인물 같은 마인드와 ‘살아만 있으면 복구 가능’이라는 안일함 사이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었다. 검기조차도 막아 내는 방어구라면 최상급이었다. 불길한 기원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이작은 주저 없이 장갑을 손에 끼웠다. 성기사 갑옷처럼 이것도 철컥거리며 내부가 아이작의 손에 딱 맞게 변화했다. 손보다 1.5배 정도 크긴 했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아귀힘이 강해진 느낌까지 들었다.
‘왼손 장갑은 촉수가 어련히 알아서 뚫어주겠지. 아니면 헤사벨한테 줘도 되고…….’
아이작은 뜻밖의 수확에 만족했다.
“감사합니다.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군요.”
“……전부터 남다르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이교도의 성물이라도 쓰는 데 주저함이 없군요?”
“신의 뜻을 실행하는데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신이 잡으라 명령하신 쥐만 잘 잡으면 되지요.”
아이작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로잘린드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든 듯 웃었다.
“좋은 말씀입니다. 이제 여명군 참전도 결정됐으니, 당분간 이쪽은 바쁠 것 같군요. 성배기사님은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음, 황제 폐하께 돌아가 하달하신 임무를 성공했다고 보고드려야지요.”
아이작이 받은 명령은 엘릴 왕국의 여명군 참전을 끌어내는 것이었고, 거기에 더해 엘릴의 대전사라는 지위까지 받아낼 정도로 크게 성공했다. 엘릴 왕국이 준비하고 넘어오기까지 굳이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 이제 다시 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아이작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만 가기 전에 배를 좀 채우고 갈까 합니다.”
***
아이작은 에델레드와 그의 기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엘리온 성채를 떠났다. 다시 보게 된다면 대륙에서, 여명군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에델레드는 항구까지 배웅하겠다고 했지만 아이작은 사양했다. 지금부터 에델레드가 해야 할 일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해서 엘릴의 진노를 살 필요도 없을뿐더러, 아이작은 그들을 떼어놓고 잠시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아이작은 이곳까지 오기 위해 에이단과 소금 의회의 배까지 동원해 이동했다. 북해의 바람은 혹독하기 때문에 노련한 소금 의회 선원들조차 접근하기 힘들어했지만,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거센 비바람을 맞으며 가까스로 해안가까지 배를 몰고 가던 에이단이 외쳤다.
높은 산 위에 반쯤 무너진 탑이 보였다.
아이작이 향한 곳은 엘릴 왕국의 북쪽 끝.
칼루리엔의 비밀 실험실이자 마법사의 탑이 있던 윈터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