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20)
220화. 마법사의 탑 (1)
아이작은 풍랑을 헤치고 가까스로 해안에 상륙했다. 다행히 모래사장은 얕았지만, 북쪽으로 갈수록 깎아지르듯 높아지는 산세가 험악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눈에 띈 것은 그 앞 평원에 놓인 ‘깨진 산’이었다. 잔잔한 구릉이 계속되다가 갑자기 덜컥 나타난 험악한 회색 바위산은 기괴할 정도로 괴리감이 느껴졌다.
에이단은 그 산을 보며 질린 듯 중얼거렸다.
“저게 그 ‘깨진 산’이군요. 전설에 따르면 무슨 ‘천사가 부딪치는 밤’이라는 대폭풍이 엘릴 왕국에 몰아닥쳤을 때 바람이 산을 들어 올려 내동댕이쳤다고 하더군요. 물론 허황한 헛소리지만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기괴하군요.”
“……의외로 사실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이작의 관심은 수백 년 전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전설이 아니었다. 그는 칼루리엔의 연구실이 있던 무너진 폐허로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은 다 무너진 폐허에 불과했지만, 한때 명천사가 머무르던 거처답게 이곳에는 무시무시한 전설들이 가득했다. 칼루리엔이 남긴 유물들을 노리고 들어왔던 도적이나 성배기사들도 있었지만 저렇게 다 무너진 뒤로는 드나드는 사람도 없었다.
“에이단, 자네는 풍랑을 피하고 있도록. 나는 저 탑에 잠깐 들렀다 오겠다.”
“예, 알겠습니다. 언제 다시 돌아오면 될까요?”
“내일.”
아이작은 짧게 대답하고 헤사벨과 함께 탑으로 향했다.
헤사벨은 칼루리엔이 내동댕이쳤던 깨진 바위산이 실제로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란 듯 연신 살펴보았다. 물론 세월 때문에 많은 부분이 닳고 마모되긴 했지만, 여전히 오월의 검이 새긴 검흔의 매끈한 단면이 보일 정도였다.
우르반수스에서 벌어진 일은 사람들의 의식만이 아니라 세계조차도 속이는 듯했다.
“여기서 찾을 게 있다고 하셨었나요?”
“그래.”
헤사벨은 칼루리엔의 옛 은신처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정보를 수집했었다.
“불사의 영약이요? 아니면 신이 되는 비결? 드래곤 하트가 있다는 말도 들었는데.”
물론 대부분 전설에 기반한 것들이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뿐이었다.
사실 정설은 명천사가 귀한 성물을 허술하게 보관했을 리도 없을뿐더러, 약탈당할 물건은 이미 다 약탈당했고, 있다 해도 이미 무너진 잔해 아래 다 깔려있으리란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노리는 것은 터무니없는 전설도, 괴담도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상급 던전, 마법사의 탑.’
아이작은 모처럼 ‘지식’을 활용할 참이었다.
다른 도적들과 달리, 아이작은 무엇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찾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먹을 것’이었다.
***
험준한 산길을 타고 올라 간신히 탑 아래 도착했지만 무너진 탑의 잔해는 도저히 파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작은 루앗딘 열쇠를 꺼내 들었다. 카훌린이 더 높은 격의 성물이었지만, 이럴 때에는 비밀을 들추고 어둠을 밝히는 빛의 법전 성물이 유용했다.
루앗딘 열쇠에서 타오른 불길이 환하게 퍼지자, 아이작은 주저 없이 칼을 내질렀다.
탑의 잔해가 부드럽게 갈라지며 균열을 일으켰다. 탑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열리자 헤사벨은 감탄하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원래대로라면 봉인을 풀기 위해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오월의 강화해 준 루앗딘 열쇠에 담긴 상급 봉인 해제 능력은 칼루리엔이 남긴 낡은 봉인 정도는 쉽게 뚫었다.
[……여긴 뭐하러 온 거지?]그제야 칼루리엔이 사념파를 보내 물었다.
칼루리엔은 엘릴의 명에 따라 아이작을 최대한 보좌하고 조언해 줄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아이작의 첫 행보가 자신의 옛 은거지를 방문하는 것일 줄은 몰랐다.
“네가 남긴 물건을 처리하러 온 거지.”
[여긴 아무것도 없다. 귀한 물건은 당연히 모두 처리했고, 허접한 쓰레기들도 도굴꾼들이 훔쳐 갔지. 어디 버릴 곳도 없어서 방치한 폐기물들만 남았다.]“바로 그걸 가지러 왔거든.”
아이작이 대답하기 무섭게 벽에서 뭔가 튀어나와 아이작을 물어뜯으려 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가볍게 피하면서 놈을 왼손으로 후려갈겼다. 순식간에 다섯 손가락이 다섯 갈래의 촉수로 돌변해 벽에 붙어 있던 카멜레온─조개─개구리 키메라를 집어삼켰다.
괴물의 정체는 바로 칼루리엔이 남긴 키메라였다.
칼루리엔은 아이작 일행을 공격할 때 키메라 무리를 끌고 와 공격할 정도로 생물합성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이런 만들고 남은 ‘찌꺼기’들을 감히 엘릴 왕국에 풀어둘 수 없으니 자신의 옛 은신처에 던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사이에도 키메라들은 열정적으로 번식하거나 서로를 잡아먹으며 살아남았다.
‘덕분에 마법사의 탑은 상당한 난이도를 가진 던전이 됐지…….’
하지만 아무래도 너무 많은 것들이 섞인 키메라인 탓에 정보가 불확실해 포식 효과조차 미미한 것 같았다.
어차피 이런 조무래기들로 눈에 띄는 효과를 얻기 힘들어진 지는 오래였다.
아이작의 주된 목적은 바로 배를 채우는 것이었다.
이 카멜레온 조개는 일종의 알림벨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계단 아래쪽에서 부산한 소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지간해서는 외부의 먹이가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서는 이런 침입자가 매우 귀했다.
물론 피식자와 포식자의 입장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
닭─뱀─지네 합성 키메라가 천장에서 떨어져 아이작을 휘감으려 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보다 먼저 촉수로 상대를 휘감아 잡아먹었다. 도저히 눈뜨고는 식욕이 돋지 않는 기괴한 모습이었지만 그보다 ‘뱀과 지네를 합성하는 건 좀 기능이 중복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대체 무슨 규칙을 가지고 이런 생물 실험을 해댄 거지?”
토끼─곰─마멋 키메라를 상대할 때쯤 해서는 아이작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광기 어린 뇌내 던전 같은 풍경이었다.
토끼─곰─마멋 키메라는 귀여워 보이는 외형에도 불구하고, 이 끔찍한 던전에서조차 포식종의 위치인 듯, 과감하게 아이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이작은 죽은 자의 손으로 가볍게 막아 내고 키메라에 왼손을 꽂아 넣었다.
촉수의 포식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아이작은 어지간해서는 칼을 쓰지 않았다.
[내게도 미숙하고 호기심 넘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내 종족의 존속이 내 손에 달려있다고 믿었지. 이건 그 잔해에 불과하다.]“드래곤을 만들어 내는 거?”
[……알고 있다니 놀랍군. 어떻게 알았지? 천사가 알려준 건가?]게임을 통해서 알아낸 지식이기 때문에 아이작은 대강 얼버무렸다. 하지만 칼루리엔도 별로 숨기고 있던 사실은 아닌 듯 대충 넘어갔다.
드래곤은 그 존재 자체가 신비하지만, 그 신체를 묘사할 때 늘 뱀의 머리에 사자의 몸통, 박쥐의 날개 같은 복합적인 묘사가 들어간다. 단순히 외형을 생물학적으로만 따져보면, 일부러 전투용으로 만든 키메라에 가까운 것이다.
아마 칼루리엔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드래곤이라는 종이 어떤 고대의 존재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키메라가 아닌가 생각했다. 물론 신조차 우리보다 어리다는 것을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일이지.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 종의 번식이 어려워지면서 그 가능성을 연구해 보지 않을 수 없더군.]드래곤의 번식이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는 아이작도 처음 알았다. 하기야, 네임리스 카오스에 등장하는 드래곤들은 모두 고룡들밖에 없고, 그마저도 아주 극소수다. 아이작은 그게 신들 때문에 몰락해서 그렇다고만 생각했을 뿐, 그들의 번식에 대해서는 생각한 적 없었다.
[이것들은 드래곤을 합성해 낼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연구하던 중 만들어 낸 잔해들이지. 구덩이에 묻어버리고 잊어버렸지만, 설마 인제 와서 혼돈의 식량이 될 줄은 몰랐는데…….]칼루리엔은 아이작의 촉수에 하나하나 잡아먹히는 키메라들을 보면서 착잡하게 중얼거렸다. 키메라들은 아이작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지는 않았지만 하나하나가 나름 강한 존재여서 그런지 야생동물보다 훨씬 더 많은 영양과 포만감을 주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진짜 목표로 삼고 있는 대상에게 가기까지 너무 오래 걸린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어디까지 내려갈 생각이지? 적당히 배를 채운 게 아닌가?]“네가 만든 그 궁극의 폐기물까지 다 먹은 다음 돌아갈 거다, 칼루리엔.”
[…….]칼루리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키메라들은 칼루리엔에게 수치는커녕 신경 쓰이는 존재조차 아니었다. 그가 진짜 아이작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은 이 던전의 밑바닥에 있었다. 이 키메라들은 사실 그 존재를 감추기 위한 파수꾼에 불과했다.
반면 아이작은 파수꾼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는 것이 슬슬 귀찮아지고 있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이상, 아이작은 우르반수스에서 배운 재주를 하나 실험해 보기로 했다.
아이작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자신의 갑옷에 의지를 전달했다.
꿀렁.
아이작의 갑옷에 검게 착색된 저 너머의 색채가 출렁이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망토처럼, 혹은 폭포처럼 흘러내린 색채는 순식간에 던전 안을 채우고 범람하며 계단 안쪽으로 쇄도해 내려갔다.
칼루리엔과 싸울 때 만들어 냈던, 이 태고의 마력이 적용된 색채는 평범한 색채보다 훨씬 더 짙고 강도 높은 밀도를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작의 의지에 순응해 손발처럼 움직였다.
아이작은 색채를 한계까지 흘려보냈다.
물론 기껏 채웠던 포만감이 그만큼 소진되었지만,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마침내 아이작의 갑옷에서 검은 기운이 거의 다 빠질 정도로 퍼진 순간, 아이작은 그 색채 속으로 촉수들을 내보냈다.
[세상에 드리운 그림자(B) / 촉수를 저 너머의 색채로 감싸 보이지 않게 하거나, 그림자 속에 숨길 수 있습니다.]눈속임 외에는 써먹을 곳이 없던 특전이 좁은 공간 안에서는 대량 살상 무기가 되었다.
콰드드드득, 와작, 으직, 꽈드득.
계단의 벽체를 타고 섬뜩한 소음들이 흘러나왔다. 소음은 십여 초 정도 이어지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아이작은 다시 색채를 거두어 갑옷에 착색시키고 다시 발을 내디뎠다.
깨끗하게 청소된 던전에는 더 이상 키메라가 나타나지 않았다. 적지 않은 신앙심이 소모되었지만, 그만큼 빠르게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좋아. 좀 더 빨리 갈 수 있겠군.”
칼루리엔은 그 모습을 보면서 저게 진짜 엘릴께서 제정신으로 선택하신 대전사가 맞는지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저자를 대전사로 고르셨을지도.’
***
칼루리엔의 던전은 의외로 깊고 넓어서, 아이작은 ‘만찬’을 두 번 더 하고서야 목적지로 삼고 있던 밑바닥에 닿을 수 있었다. 밑으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아이작도, 헤사벨도 심상찮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밀도 높고 강대한 마력.
엘릴을 봉인할 때 수많은 봉인을 겹쳤던 것처럼, 물론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상당한 주문과 마법이 중첩되어 있었다.
“여기 대체 뭐가 있는 거죠?”
그 마력을 피부로 느낀 헤사벨이 질린 듯 물었다. 칼루리엔은 당연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이작은 그가 숨기고 싶어 하는 치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냈다.
“칼루리엔이 만들어낸 죄악의 결과물.”
아이작이 루앗딘 열쇠를 휘둘러 또 한 번 봉인을 해제하자 숨겨져 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바닥이 흩어져 내리면서 광대한 공동이 나타났다. 그 아래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쇠사슬에 휘감긴 생명체가 잠든 듯 엎드려 있었다.
반은 반투명하고, 반은 정상적인 몸을 가진 거대한 생물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마주쳤던 온갖 기괴한 키메라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정상적인 외형이었다. 왜냐면 일부가 반투명하다는 것 외에는 이미 익히 눈에 익은 생물체였으니까.
“……드래곤?”
헤사벨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이자은 그녀의 부족한 혼잣말에 설명을 덧붙였다.
“정확히는 천사─드래곤 키메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