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23)
223화. 화형대 (1)
칼루리엔의 비밀 실험실에서 용건을 마친 뒤, 아이작은 탑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전까지는 무너진 폐허로 위장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진짜로 폐허가 된 셈이었다. 이 장소가 나름 미래의 문화 유적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새로운 탈 것…… 아니, 동료인 네카루리엘을 어떻게 제국으로 데려갈지 고민했다.
“일단 네카루리엘은 너무 기니까 넬이라고 불러야겠다.”
다섯 자를 한 글자로 줄인 건 너무 심한가 싶었지만 네카루리엘, 아니, 넬은 콧김을 내뿜으며 아이작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유순한 강아지 같은 모습을 보면 지능은 낮아도 확실히 길들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 집 드래곤은 착해서 안 물어요’하고 무작정 풀어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아이작은 칼루리엔에게 한 번 더 확인했다.
“사람을 먹지 말라고 지시하면 먹지 않는 게 확실한가?”
[그냥 개랑 비슷하다고 생각해라. 일단 네 말을 존중하기는 하겠지만 절대적으로 그러리란 법은 없어. ‘저걸 물면 주인이 기분 나빠하겠지? 하지만 날 화나게 했으니 딱 한 번만 물자’ 정도로 판단할 수는 있다. 그냥 가급적 인간 가까이 두지 마라.]아이작은 불안해도 일단 그 정도로 납득하기로 했다.
그냥 적당한 핑곗거리를 만들어서 데리고 다니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사람이 많은 장소로 가면 어떤 미친놈이 자신의 용맹을 증명하려 들지도 모른다. 확실하게 안전해지기 전까지는 그냥 외지를 떠돌게 하다가 필요할 때 부르는 편이 나아 보였다.
넬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도 매력적이겠지만 지금 해안에는 에이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해안가로 향한 아이작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에이단만이 아니었다.
“사위, 오랜만이군.”
디트리히 브란트가 에이단과 함께 모닥불 앞에서 그를 맞이했다.
“딸애가 자네에게 다른 여자가 붙어있지 않는지 좀 확인해 보라던데…… 여자는 없고, 그건 뭔가? 설마 드래곤인가?”
아이작은 칼루리엔과 싸울 때보다 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
물론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라는 것은 디트리히의 농담이었다. 디트리히는 아이작이 성지에서 돌아온 것을 알고 직접 마중 나온 참이었는데, 아이작이 바로 제국으로 가는 대신 북해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었다.
덕분에 아이작은 소금 의회의 배 대신 디트리히의 배를 타게 되었다.
디트리히의 배는 공작가의 군함답게 충분히 커서 머리에서 꼬리까지 길이만 10m가 넘는 넬조차도 선미에 탈 수 있었다.
디트리히는 이미 엘릴 왕국에서 아이작에 대해 많이 들은 듯 몇 가지 사항만을 묻고 더 묻지 않았다. 사실 그는 형이상학적인 우르반수스의 이치와 세계의 비밀보다는 실존하는 반투명 드래곤이 더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저 드래곤을 길들이러 여기까지 왔다고?”
“짐승이라고 빛의 법전에 귀의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아이작은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고, 넬은 그 말에 맞춰서 아이작의 머리를 핥았다. 덩치 때문에 디트리히는 아무리 봐도 드래곤이 아이작을 빨아먹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아이작의 필사적인 태연한 모습에 안심했다.
“흠, 뭐. 자네는 붉은 성배의 공녀도 교화시켜 데리고 다닌다고 들었으니 이상할 것은 없겠지. 드래곤 같은 흉수가 성스러운 성배기사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만큼 상서로운 일도 없을 테니 교단도 좋아할지 모르겠군.”
“그렇습니다.”
아이작은 내심 걱정했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 없는 모양이다. 물론 넬이 광장에서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다면의 일이겠지만.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여명군 준비 때문에 바쁘실 줄 알았습니다만.”
그냥 마중이라면 심부름꾼을 보내거나 이솔데를 보내도 괜찮을 것이다. 한참 바쁠 공작이 아이작을 직접 마중까지 나올 이유가 없었다.
“음, 일단 급한 일은 이솔데와 아내에게 맡겨두었네. 영지 경영이야 원래 아내에게 맡겨두고 있었고, 이솔데도 외부 활동을 많이 해서 부족한 건 없거든. 하지만 그보다는 자네에게 제국의 상황을 직접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왔지.”
“제국의 상황이요?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디트리히는 다소 언짢은 표정으로 남쪽 수평선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여명군이 시작됐네.”
아이작은 놀라긴 했지만, 납득할 수 있었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여명군은 겨울쯤 시작된다. 하지만 그가 바꾼 역사의 흐름이 여명군을 앞당긴 것이다.
그가 잡아먹은 칼센만 해도 그렇다. 원래 역사대로 ‘칼센의 승천 실패’ 같은 대사건은 없었지만, ‘칼센 실종’ 자체만으로도 여명군에는 불씨가 붙은 셈이었다.
‘원래 칼센을 신으로 만들기 위해 빛의 법전과 불사 교단이 손을 잡았었지. 하지만 그게 실패했으니, 동맹도 끝났다 이건가?’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 충분히 군세를 모으지 못하셨을 텐데요?”
충분한 병력과 기사들, 그리고 사기를 충전하기 위해 ‘백제국’의 재건을 제안했던 것이 아이작이다. 그런데 엘릴은 이제야 합의점을 찾아 병력을 모으는 중이고, 세상의 화로는 어떻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쪽에는 다른 사절이 파견됐다고 들었지만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렇지. 폐하께서도 이제야 겨우 기사들을 소집하고 보급선을 정리 중이라고 들었네. 황금우상 상단이 바가지를 씌우긴 했지만, 대부분의 보급을 책임졌다더군.”
황금우상 상단은 불사 교단과도 거래를 하긴 하지만 큰 고객은 아니다. 불사 교단은 ‘생필품’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불사 교단이 대개 필요로 하는 것은 사치품이나 예술품, 혹은 좋은 무기 따위인데 이건 규모에 비해 큰돈이 되지 않는다.
“그럼 여명군이 시작됐다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부 광신도들이 자발적으로 군세를 꾸리고 제멋대로 출전하고 있다네.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 조급해지셨지. 최대한 자네를 빨리 만나고 싶어하시네.”
***
아이작이 무슨 짓을 해도 여명군은 일어난다.
그것은 아이작 혼자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자 당대의 정신, 그리고 모두가 갈망하는 역사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연적인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는 사람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작과 디트리히가 도착한 항구 도시─시라크사는 그런 이들이 많은 곳 중 하나였다.
“천년 왕국의 도래가 임박했다! 회개하라!”
아이작은 배가 부두에 닿기 무섭게 들려오는 소리에 기가 질린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한 무리의 사제들이 상의를 탈의한 채 채찍으로 자신의 등을 때리며 행진하고 있었다. 선두에는 자기 몸통만 한 커다란 빛의 법전 상징물을 든 사제가 악을 쓰며 법전의 경구를 연신 외워댔다.
디트리히는 그 모습을 보고 쓰게 웃었다.
“여기도 분위기가 엉망이군. 보급만 마치고 바로 출발하겠네.”
“……난리도 아니군요. 여긴 그래도 성지와 제법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시라크사는 제국 서부에 툭 튀어나온 커다란 반도 남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였다. 지도를 펼치면 크게 돌아가는 경로였지만 강을 타고 올라가면 육로보다 빨리 수도에 갈 수 있었다. 지도상 거리만 놓고 보면 바다 건너 흑제국 영토가 있기에 제법 가까워 보이지만, 그 바다라는 물리적 장벽은 일반인들에게는 훨씬 넘기 힘들다.
결국 전장과는 오히려 정반대인 이곳은, 지금 극도로 광신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그런 걸 수도 있지. 듣자 하니 접경 지역 주민들은 여명군에 떨떠름해하는 편이라더군. 혹시 내릴 생각 있거든 말썽에 휩쓸릴 수도 있으니 너무 멀리 가진 말게.”
디트리히가 경고하지 않아도 아이작은 그냥 배에서 내리지 말까 하는 고민까지 들었다.
이 세계가 원래 이런 세계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굳이 자신까지 종교적 광기와 어둠에 휩쓸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두 너머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자 문득 뇌리에 스치는 장면들이 있었다.
‘아마…… 젠장.’
아이작은 한층 더 내리고 싶지 않아졌지만, 어쩔 수 없이 발을 내디뎠다. 몰랐으면 모를까, 알면서도 무시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작이 해결할 수 있는 범주 안의 것이라면.
게임 속 지식이 불편하게 느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행렬의 뒤를 따라 광장으로 가자 예상했던 광경이 드러났다. 광장 곳곳에 화형대가 몇 개나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화형대마다 이미 희생자가 매달린, 혹은 곧 매달릴 예정의 막대들이 서 있었다.
“성화(聖火)로 계약자를 불태워라!”
그중 광장 한가운데, 또 다른 희생자에게 불이 놓였다. 화형대에 매달린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지만, 횃불을 든 집행인은 거침없이 불을 화형대에 쑤셔 넣었다.
“아아아아악!”
기름을 먹은 불꽃과 장작이 순식간에 타오르면서 여자의 살과 뼈를 살라 먹었다. 처참한 마녀사냥의 풍경이었으나, 현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뒤의 풍경이었다. 살갗이 까맣게 타들어 가면서 온몸이 오그라들었어야 할 여자의 비명이 멈추지 않고 계속 터져 나왔다.
“오오, 사악한 계약자의 살이 타들어간다! 재로 정화된다! 빛의 법전께서는 이 사악한 자의 부덕을 빛과 열로 포용하신다!”
“아아아악! 제발, 제발 죽여, 죽여줘!”
평범하지 않은 불꽃은 살을 전부 불태우고, 뼈만을 남긴 상태였다. 그러나 까맣게 탄 백골의 눈과 입에서 불꽃이 타오르면서도 여자의 비명은 그치지 않았다.
아이작은 여자의 정체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사망보험 계약자군.”
어느새 뒤따라온 디트리히가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계약자’들이 광장 곳곳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덕분에 화형은 쉽게 끝나지도 않았고, 비명도 끊어지질 않았다. 기적으로 만들어 낸 성화는 육신이 이미 타들어가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언데드의 영혼에조차 고통을 부여하고 있었다.
“……여긴 후방 중의 후방일 텐데, 어떻게 사망보험 계약자를 이렇게 많이 찾았지요?”
“아마 고해성사를 한 사람들이겠지. 사망 계약 파기를 요청했다가 광기에 휩쓸려서 이렇게 ‘본보기’를 당하기도 하고…… 뭣보다 여기서 바다만 건너면 흑제국 영토다 보니 넘나드는 사람이 적잖이 있지.”
불사 교단은 살아 있는 노예가 필요한 일부 경우를 제외하면 식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말은 대부분의 경작지가 놀고 있다는 뜻이다. 흑제국의 풍족한 어장이나 산, 광맥 등을 노리고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은 적잖이 있었다.
불사교단은 그런 자들을 사로잡으면 즉시 좀비로 만드는 대신 사망보험에 가입시켰다. 늘 인구 부족에 시달리기에 장기적으로 그게 더 유용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시라크사는 그나마 얌전하군. 제국 남부에는 화형 구덩이를 파서 그 안에 던져넣는다던데. 수백 명의 사망보험 가입자들이 그 안에서 뼈만 남은 채 버둥거리는 모습이 지옥 같다더군.”
아이작은 욕지기가 올라왔다. 물론 그런 짓이 신앙심을 끌어올리고 단합을 이끌어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망보험 가입자는 스스로 고백하지 않는 이상 가입 여부를 알기 힘들다.
마녀사냥과 똑같다. 물에 빠뜨려서 뜨면 마녀고 가라앉아 죽으면 무고한 것이다.
그렇게 불태운 자 중에 무고한 자들이 있다고 해도 과연 사제들이 책임을 질까? ‘성스러운 불이 어쩌구’하면서 대강 넘어갈 것이 분명하다.
타락한 사제들이 이런 일을 벌이는 이유 중 하나는 ‘사악한 배교자들의 재산을 교단에서 정화’하는 목적도 있으니까.
광장 곳곳에는 병사나 기사들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교단의 이런 제재를 말리는 게 아니라, 제대로 이루어지는지, 누군가 반항하진 않는지 감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서 사제가 벌개진 얼굴로 소리치고 다녔다.
“회개하라! 천년 왕국의 도래가 임박했다! 불사 교단의 걸어 다니는 시체들이 너희들의 천국을 빼앗으러 침략해온다! 호르마 크무엘 교황 성하의 영도 아래 펼쳐질, 여명의 성전에 참전하라!”
아이작이 이미 들었던 바로 그 ‘광신도들의 여명군 행렬’이었다.
디트리히는 이런 행렬이 제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아하니 교단은 그걸 자제시키는 대신 오히려 부추기는 것 같았다.
“보다시피 교단의 ‘일부 극단적인 사제들’도 저런 흥분을 부추기고 있지. 그중에서도 시에로인지 뭔지 하는 사제가 제일 큰 무리를 이끈다더군.”
디트리히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대체 성기사단도 없고 사제도 몇 명 안 되는 그 광신도 무지렁이들이 어쩌자고 흑제국에 뛰어드는 건지 모르겠네.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뛰어들면 기적이 임하여 이교도들을 격퇴할 거라는데, 그렇게 안일한 생각으로 전쟁이 되나? 그렇게 해결될 일이었으면 지난 여명군 때 진작에 해결됐겠지. 지난 여명군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던 줄 아나?”
즉, 종교적 광신이 사회의 밑바닥을 휩쓸고 있다는 뜻이다.
사회적 불만과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 신앙의 증명에 대한 욕구가 폭발하면서 지금 눈앞의 이런 일들이 제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아이작은 그 어리석음에 눈살을 찌푸리려다가 문득 찔리는 감이 있어서 그만두었다.
‘……나도 귀족 다 됐군.’
그가 한동안 어울린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 상류층인 귀족, 기사, 사제들이었다. 때문에 바닥의 하층민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잠깐 잊고 있었다.
쇠르에서만 하더라도 먹을 것이 없어서 신앙을 저버리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나왔으며, 수도원의 사제들조차도 감자 몇 개로 하루를 연명했다.
그가 성배기사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하면서 잊고 있던 모습들이었다.
물론 지금 광기에 휩쓸린 사람들도 종교적 광신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겠지만, 결국 그렇게 된 탓도 사회가 책임져 주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그들이 지금의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빠져나올 수단은 하나뿐이다.
영광스럽게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
적어도 지상보다는 저승이 더 나을 테니까.
그리고 여명군은 천국 직행 티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