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24)
224화. 화형대 (2)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디트리히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브란트 공작인 그는 황제 외에는 위에 아무도 없다고 할 정도로 사회 최상위층이다. 애당초 디트리히는 이런 사태를 그냥 내려다보고 있을 게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빈농들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내려다보듯 말하지만, 그건 그가 배가 부르고 삶의 여건이 충분해서 할 수 있는 투정이었다.
그래서 아이작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솔데를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그 역시도 결국 한 패거리가 된 셈이다.
이 세상의 한쪽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아이작도 그 세상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다. 참견하면 참견할수록, 그는 이 세상의 일원이 된다.
***
불길이 잦아든 화형대 하나에서 여전히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을린 해골이 수거되고, 새로운 사람이 끌려왔다. 병사의 손에 끌려온 새 희생자는 이제 막 10살을 넘었을까 싶은 소녀였다.
“잠깐.”
아이작은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갑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오자 병사들은 움찔했지만, 광기에 물든 사제는 그렇지 않았다. 사제는 눈을 부릅뜨고 아이작을 향해 소리쳤다.
“뭐냐, 네 놈은! 감히 신성한 정화 의식을 방해하는 거냐!”
아이작은 대답하는 대신 한숨을 쉬며 화형대 위로 올라갔다. 검게 그을린 장작은 아이작의 발아래 부스러졌지만, 토대는 돌로 만든 듯 무너지지 않았다. 사제는 그 차분한 태도에 움찔했지만, 오히려 더더욱 노발대발했다.
곧 익숙한 일인 듯 병사와 기사들마저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미 이런 시비가 몇 번 있었던 모양이다.
다가온 사람 중에는 성기사도 있었다. 키가 2m에 이르는 거대한 키에, 은색 면갑을 쓴 차가운 인상의 성기사였다. 사제는 성기사가 등 뒤에 서자 안심이 되는 듯 차갑게 웃으며 아이작을 향해 쏘아붙였다.
“이분은 오스타라 성기사단의 수석 성기사, 르오헴 오스타라 경이시다! 해골 파괴자, 무신론자들을 짓이기는 망치, 여명의 기수가 되실 분이란 말이다! 이 뜨내기 기사가 감히!”
아이작은 길게 늘어지는 수사에 내심 기뻤다.
“나는 아이작이다.”
자신도 기득권층의 한 축이 되었다면 그 권위를 마음대로 휘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하고 싶은 짓 마음대로 하려고 출세하려 했던 것이니까.
사제는 그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아이작은 그가 생각을 잇기도 전에 칼을 휘둘러 화형대를 단숨에 잘라 버렸다. 카훌린에서 피어오른 검기는 화형대를 순식간에 톱밥으로 만들어버렸다.
덕분에 사제의 머릿속에서는 아이작의 이름이 싹 날아갔다.
“검기, 검기! 패왕의 이단이다!”
아이작은 만족했다. 일부러 루앗딘 열쇠가 아닌 카훌린을 꺼낸 것도 상대방이 가능한 자신의 정체를 늦게 알아차리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제는 엘릴 신도가 같은 백제국 동맹이라는 인식조차 없는 것 같았다.
화형대에 매달릴 뻔했던 소녀가 멍하니 아이작을 바라보는 사이, 르오헴인지 뭔지 하는 성기사가 크게 발을 구르며 아이작을 향해 철퇴를 휘둘렀다.
그의 몸에 갖가지 기적이 둘러쳐지며 번쩍거리는 빛을 뿜어냈다. 대응이 빠른 걸 보니 소드마스터가 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이미 아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빛의 법전 성기사들과 제대로 겨뤄본 적은 없었지.’
로튼해머가 이끌던 브리엔트 성기사단의 성기사들과 대련은 해 본 적 있지만, 실전을 벌인 적은 없었다. 지금 상대는 확실히 아이작을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었다. 르오헴의 철퇴가 유성처럼 맹렬한 기세로 떨어졌다.
쾅. 아이작은 굳이 그걸 정면에서 받아 내는 대신, 가볍게 빗겨 냈다. 르오헴은 소드마스터의 검기에 긴장했지만, 동시에 비웃었다.
철퇴가 무거우니 동작도 느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의 오해다. 성기사는 다른 기사들보다 배는 빠르게 무기를 휘두를 수 있으며, 숙련도에 따라 더욱 빠르게 다루는 법도 얼마든지 있다.
특히 상급 검술을 사용한다면.
르오헴은 처음 보는 소드마스터의 머리를 깨부술 생각으로, 쾌속한 일격을 퍼부었다.
그의 몸이 질풍처럼 회전하면서 순식간에 아이작을 향해 몰아닥쳤다.
반면 아이작의 공격은 태만하다 못해 느렸다. 그의 칼은 이제 막 움직였을 뿐이었다.
철퇴의 둔중한 공격에 방심했던 아이작의 머리가 르오헴의 상급 검술에 깨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
갑작스럽게 르오헴의 손목이 아이작의 칼끝에 꽂히지 않았더라면.
“끄윽!”
갑옷에 가려졌음에도 칼날은 정확히 동맥을 파고들었다. 르오헴이 황급히 팔을 빼내자 검기에 상처가 톱날에 긁힌 듯 더욱 크게 찢어졌다. 갑옷 틈새로 피가 철철 흘러넘쳐 마른 장작을 적셨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흉내만 내봤을 뿐인데도 꽤 그럴싸하게 되는군.’
엘릴이 그를 농락하면서 쓰던 검술 일부를 흉내 냈을 뿐이었다.
상대방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가장 약한 부위를 찌르는 기술.
아이작은 동작의 속도에 변칙성을 줘서 상대방이 도저히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 기술엔 두 가지 효과가 있다.
‘상대보다 압도적으로 빠르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효과와, ‘나는 협박만 하려고 했는데 상대방이 칼에 손을 가져다 댔다’라고 주장 할 수 있다는 것.
“우오오오오!”
그러나 르오헴은 그 덩치답게 고작 공격 한 번에 기가 죽지 않고 재차 철퇴를 휘둘렀다. 아이작은 가만히 그 공격을 받아주었다. 그의 동작은 크지 않고, 오직 수비에만 전념하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주변 사람들은 마치 환각이라도 걸린 듯한 기분이었다.
분명 공격을 몰아붙이고 있는 것은 르오헴인데 상처가 늘어나고 피를 흘리는 것도 르오헴이었다. 그들 눈에는 마치 르오헴이 아이작의 칼에 자발적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사제는 그 모습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부릅뜨고 보다가 소리를 지르려 했다.
“마, 마법……!”
“성배기사다! 성배기사 아이작 님이시다!”
뒤늦게 한 병사가 소리쳤다. 그 말에 사제는 왈칵 화를 내려다가 다시 아이작의 얼굴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천사의 외모와 성자의 자비를 가졌다는 부활의 성자.
혜성처럼 나타나 고대신들을 베고 이교의 천사들을 추방했으며, 죽음을 극복하고 천국에서 신탁을 받아 돌아온 성배기사.
엘릴 왕국에서 빛의 군대를 재건해 돌아오겠다던 부활의 성자였다.
그 이름 높은 성배기사를 모를 수는 없었다.
외모가 잘났다고 바로 알아 모실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고 하기에는 아이작은 이미 이름도 밝힌 상태였다.
***
이내 르오헴도 휘청거리다가 무릎을 꿇었다. 성배기사라는 외침에 재빨리 복종했다기보단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더 이상은 축복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 출혈이었다.
아이작은 승자의 권위로 태연하게 그를 발로 걷어차 화형대 아래로 떨어뜨렸다. 몰려들었던 성기사들과 병사들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아이작을 올려다보았다.
아이작은 태연하게 그들에게 명령했다.
“그러다 죽겠다. 치료해 줘라.”
그제야 성기사와 사제들이 황급히 달려왔다.
솔직히 죽어도 상관없지만, 성배기사가 돌아오자마자 성기사를 죽였다고 하면 교단이 그를 황제파로 오인할 수도 있다. 권위를 휘두르려면 권위를 존중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
“부, 부활의 성자님을 뵙습니다…….”
권위의 노예들이 이렇게 알아서 기는 모습을 보려면 말이다.
사제는 벌벌 떨면서 아이작의 말을 기다렸다. 검기에 대해서는 이미 깨끗이 잊은 지 오래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댁 검기 쓰던데 확인 좀 해봅시다’라고 했다간 그의 목으로 사실을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아이작 역시 지금까지 수십 명은 족히 불태웠을 이 사제를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다. 성기사와 마찬가지로 사제를 해칠 수는 없었다. 사제는 그 일신의 힘은 약할지 몰라도 권위는 성기사의 몇 배 이상이다. 여파도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또 이런 미친 짓을 할 수는 없게 만들 수는 있었다.
“사제.”
“예, 예.”
“원래 사망보험 가입자는 어떻게 처리하게 되어 있지?”
사제는 흠칫하다가 어렵게 말했다.
“배, 배교 행위에 대한 처벌은, 무조건 화형으로…….”
아이작은 한 번 더 인내심을 가졌다.
“자발적으로 사망보험 가입에 대해 고백하고, 해지를 요청한 경우 말이야.”
“……해, 해지 의식을, 진행합니다.”
“그래. 다시 빛의 품으로 돌아온 것을 축복하며 불사 교단의 사악한 흔적을 지워내지. 그 대가로 제물로 사용될 유황과 향나무를 구입하는 비용만 받고 말이야.”
“그, 그것이…….”
사제는 필사적으로 변명의 말을 내놓았다. 물론 아이작도 단순한 광기처럼 보이는 이 풍경에 나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망보험 계약자는 장기적으로 적군인 동시에, 살아서는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첩자가 될 수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살아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언데드가 되고 싶어 하는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 자들에게 여명군이 시작되기 전에 일찌감치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너희가 되고 싶어 하는 언데드가 어떤 꼴을 당하는지 보라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고, 그저 영원히 불타는 고통을 당할 뿐이라고.
그 꼴을 보면 죽음이 두려운 사람이라도 한번쯤 사망보험 가입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될 것이다. 사망보험 가입자들이 엘릴 왕국에서 어떤 사태를 일으킬 뻔했는지 기억하는 아이작은 이 ‘절차’를 탓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계약을 해지하고 싶어서 자백한 이들이 이런 꼴을 당하면, 결국 남은 자들에게는 불사 교단밖에 선택지가 없다.
근시안적인 어리석은 짓이었다.
뭣보다 ‘본보기’를 위해 기꺼이 어린애까지 불태워도 된다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잘 알았다. 하지만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 배교자 선정에 조금 더 신중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제야 사태가 진정되었다고 느낀 건지 디트리히가 다가왔다.
그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아이작은 칼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뽑았다. 사제는 드디어 살아남은 건가 안도하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순간 아이작의 칼이 아래서 위로 치솟았다. 저항의 여지조차 없이 단숨에 날아간 사제의 목이 빙글빙글 돌다가 화형대 한쪽에 처박혔다.
‘생각해 보니 내가 열심히 권위에 복종하면서 고분고분 말을 들었던 것은 이런 놈들 썰어도 뒤탈이 없게 하기 위한 거였지.’
그동안 아이작은 살아남기 위해서 빛의 법전 교단에 고분고분 순응해 왔다.
그런데 명천사인 오월의 검조차 그를 ‘쓸모 있다’라고 판단해 준 와중에 굳이 교단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
지상보다 훨씬 높은 천상의 권위가 그를 인정하고 있었다.
‘내가 쓸모 있는 도구라면 너희들도 내게 쓸모를 보여야 기브 앤 테이크가 성립할 거 아냐?’
권위의 한 축이 되었다면 그 역시도 기꺼이 그 권위를 이용해먹자.
아이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모가지가 가벼워서 무슨 들풀을 베는 것 같군.”
날아간 사제의 목에 광장 전체가 적막에 빠진 가운데, 아이작이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경악한 것은 눈앞에서 사제의 머리가 날아간 것을 본 디트리히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작은 신경 쓰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나는 아이작 이사크레아다.”
아이작은 그들이 잊지 않도록 목이 날아간 시체의 발로 차 넘어뜨리며 말했다.
“너희들이 본 것을 똑똑히 보고 전해라. 신앙이 모든 것을 합리화시켜 주진 않는다는 것을. 천벌은 벼락이 아니라 지나가던 방랑기사의 형태로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
디트리히는 아이작을 데리고 바람같이 배에 올라 순식간에 출발했다. 사제의 목이 날아간 것도 날아간 거지만, 당장 분노한 지방 영주나 토호, 수도원, 성기사단에서 찾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천사의 명령까지 수행한 부활의 성자를 고작 지방 수도원에서 어쩌겠습니까?”
“그딴 건 성도나 수도에서나 통할 말이다! 천사가 직접 강림해서 경고하지 않고서야 지방 촌놈들은 자기네들끼리의 관계를 더 중요시하니까!”
디트리히는 어이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하다못해 수도원 사제들이 전부 몰려나와서 따지거나 공격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건가? 그들의 모가지도 다 베어버릴 건가?”
디트리히의 말을 듣고 보니 아이작도 반성했다.
사제 한 명은 교리 원칙 위반인 셈 치고 처벌할 수 있다. 교단도 그 점에 대해서는 눈을 감을 것이다.
하지만 수도원 사제 100명의 목을 날려 버리면 빼도 박도 못 하고 이단이다.
디트리히가 그를 잽싸게 빼돌려 배를 출발시킨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영리한 사위인 줄 알았더니 이런 미친 짓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군.”
“영리한 사위라서 한 겁니다.”
아이작은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단지 기분 좀 나아지겠다고 사제의 목을 날려 버린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