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26)
226화. 지상은 인간에게, 천상은 신에게 (2)
이후의 상황은 정신없이 흘러가서 아이작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군중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황궁으로 올라가고, 뭔가 이것저것 긴 직함을 가진 노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황제가 나와서 어깨를 다독여 주고, 어느 순간 보니 아이작은 대기실에 이솔데와 함께 덜렁 앉아있게 되었다.
“……정신없군요.”
“그러게요. 저도 리허설까지 했는데 그냥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흘러다닌 기분이에요.”
이솔데도 다소 피곤한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공작님께서는 이단심문관, 아니, 당신은 브란트 영지를 지키고 있을 거라고 하던데요.”
“……제가 여기 있는 게 의외인가 보군요, 아이작?”
이솔데는 씩 웃으며 속삭였다.
“반려가 몇 달이나 소박맞고 있는데 얼굴도 안 보고 딴 데로 샌다고 하면, 따라가서라도 확인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이작은 이솔데의 말에 뜨끔하며 변명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작의 어깨를 두드렸다.
“농담이에요. 황제 폐하께서 저도 부르셨어요. 아버지께서도 알고 계셨을 텐데, 아마 놀래켜 드리려고 했나 봐요.”
“…….”
아이작은 디트리히의 그 사람 좋은 얼굴의 뒤통수를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내면의 유교 인격으로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보다 이솔데의 말이 신경 쓰였다.
황제가 그냥 아이작에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안겨주려고 공작가 후계자에게 그 먼 거리를 오라 가라 하진 않았을 것이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쩐 일로…….”
“으음, 일종의 특수감사 조직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계시다더군요. 제가 이단심문청에서 일 하던 때의 경험을 살려보면 어떨까 하시면서 원정에 합류하길 권유하셨죠.”
아이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특수 감사조직? 그러니까 황제 직속의 이단심문청 같은 걸 만들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건 권한은 막강할지 몰라도 욕먹기 딱 좋은 위치다.
이단심문관으로 일하면서 온갖 못 볼꼴 다 본 이솔데에게 또 비슷한 일을 맡기려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황제는 특수 감사조직이나 정보국 같은 걸 ‘새로’ 만들 필요는 없다. 제국 기사단이 이미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또 새롭게 특수 감사조직을, 그것도 이솔데를 임명하겠다는 것은…….
‘설마 교단을 내사하겠다는 건가?’
이단심문관인 이솔데는 교단의 약점을 많이 알고 있다.
이단심문청이 하는 일이 바로 그런 약점을 덮는 일이었으니까. 황제가 ‘교단의 부패’를 들춰 백성들에게 공개한다면, 교단과 적대하지 않으면서도 그 권위와 힘을 깎을 수 있었다.
“이솔데, 그건 거절하는 게 좋겠습니다.”
“교단에 칼끝을 겨누는 짓이니까요?”
이솔데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아이작은 당황했다. 하지만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교단의 부패를 들춰내는 것은 단순히 내부자들로부터 욕만 먹고 끝나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교단 안에는 강력한 실력자들이 즐비하고, 뭣보다 이단심문관부터가 암살과 정보조작에 능하다.
이솔데는 자신들의 옛 동료에게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
“아이작, 뭘 염려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그러니까 제가 해야 해요. 아니, 제가 하고 싶다고 요청했었어요. 이단심문청 출신의 브란트 공작가의 외동딸, 그리고…… 부활의 성자의 반려. 제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어요?”
“아니…….”
이솔데는 마지막 수식어에서 얼굴을 좀 붉혔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말했다.
“제가 이사크레아 영지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 기억하세요?”
아이작은 말문이 막혔다. 그제야 아이작은 그녀가 강성 급진개혁론자였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이사크레아 영지에서 이솔데는 아이작의 촉수를 보고 그를 이단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아이작이 보여준 결과, 행동, 성정을 보고 판단했을 뿐이다.
“저는 당신을 무너진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빛의 법전께서 보내신 사자라고 판단했었지요.”
“……그랬지요.”
이솔데는 여전히 아이작의 비밀을 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여전히 숨겨주고 있다.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교단에 개혁의 바람을 불어넣어 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이솔데는 아이작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면 오히려 오래 못 버틸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라면 이단심문청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다 알고 있죠. 저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하아…….”
아이작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영지에 있을 때에도 이 정신 나간 이단심문관과 잘못 엮이면 큰일 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미 엮여도 단단히 엮였으니, 아이작은 그녀를 응원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솔데가 그리는 신앙의 모습을 그 역시도 보고 싶었다.
그가 바라는 ‘빛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는 아궁이의 온기와 작물에 드리우는 빛으로 가득한 세계다. 사람을 불태우는 화형대의 열기와 감히 쳐다도 못 볼 섬광 아래 엎드리는 세계가 아니라.
어쩌면 그 세계는 이솔데 같은 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
“좋습니다. 대신 한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부탁이요?”
“아직 가약을 맺지는 않았지만 부부로서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저를 믿고 제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를 취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이솔데는 아이작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아이작은 자신이 하는 짓이 이솔데의 신앙에 있어서 치명적인 위기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교단의 사나운 이빨과 발톱 앞에 그의 반려를 무방비하게 내놓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작은 이솔데가 그리는 세상을 이뤄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기존에 있는 세상을 철거해야 했다.
***
기나긴 대기 시간이 끝나고, 아이작은 가까스로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문이 열리자 들어오자마자 인상을 쓴 드워프들이 투덜거리며 빠져나갔다. 아이작은 그들이 세상의 화로 교단의 화로 장인들이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화로 장인? 세상의 화로 교단까지 합류하기로 했나 보군!’
그쪽에도 사절이 보내졌다고는 들었는데 화로 장인까지 합류한 걸 보면 상당히 유능한 사람인 듯했다. 화로장인이 드나든 공간답게, 황제의 집무실에는 방금 전까지 번잡스럽게 서명하던 문서들과 어울리지 않는 흉흉한 병장기들까지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이작!”
발트제메르는 아이작을 보자마자 두 팔 벌려 환영했다. 하지만 곧 굴러다니는 병장기를 보고 멋쩍어하며 벽에 대충 세워 정리했다.
“미안하군. 기사들에게 납품된 장비들의 품질이 영 기대 이하라서 서두를 수밖에 없었네. 도저히 기다리게 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어서.”
“세상의 화로 교단도 여명군에 합류하기로 한 모양이군요?”
“음, 리옹 후작이 잘해주었지. 그만큼 비싼 값이 들긴 했지만, 화로 장인들을 돈 주고 고용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큰 소득 아니겠나.”
아이작은 이사크레아 영지에서 신나게 타천사 조각을 두들기고 있을 울스텐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데, 그가 그동안 원하는 연구 성과를 충분히 거뒀기를 바랐다. 조만간 그는 또다시 아이작이 부탁하는 외주 노동에 시달리게 될 테니까.
하지만 발트제메르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아이작은 잠시 생각하다 그가 하는 말의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상의 화로 장인이 만들었는데 품질이 기대 이하라구요?”
“그래. 내가 쇠질에는 재능이 없지만 무기 보는 안목에는 자신 있지. 그럭저럭 쓸만한 무기들을 내놓긴 했지만 내가 바라는 무기는 ‘그럭저럭 쓸만한’ 무기가 아니야. 특히 지불한 금은에 비하면 도둑질이나 다름없고.”
그래서 납품된 제품 품질에 대해 하자 클레임을 건 모양이다. 덕분에 화로 장인들은 인상 팍팍 쓰면서 돌아갔고. 황제 앞에서도 저따위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건 아마 성질 더러운 드워프들뿐일 것이다.
아이작은 벽에 세워둔 장비 앞으로 다가가 살펴보았다. 균형감도 좋고 무게도 고른데다, 날까지 예리하게 선 상품이었다. 이 정도면 기사가 들고 다녀도 아깝지 않은 무기였다.
“어떤 물건을 요청하셨길래…….”
“음, 성기사와 싸울 수 있을 정도의 성물을 요청했지. 하지만 납기일을 좀 급박하게 줬더니 이따위 물건을 들고 오더군.”
“…….”
아이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야 화로 장인들은 다른 신앙의 성물조차도 만들 수 있는 능력자들이긴 하다. 사제가 기적을 부여하여 마감 처리를 해야 하긴 하나, 기적을 부여하지 않아도 강력한 성물인 건 확실하다. 그러나 아이작은 황제가 성물을 요청한 ‘의도’가 궁금해졌다.
아이작의 얼굴을 본 발트제메르가 피식 웃었다.
“왜, 성기사와 맞설 수 있는 무기라고 하니 교단이라도 공격할 것 같은가? 그런 일은 꿈에도 꾸지 않았네.”
“교단과 사이가 안 좋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교단의 등하맹인들이 내 눈을 가리려 하나 내 신앙심은 굳건하네.”
점잖게 말했지만, 황제 정도의 위치 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정도면 그냥 대놓고 ‘교황청 놈들 전부 나가 죽어’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심각하게 듣지 말게. 알다시피 교단이 여명군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고 있잖은가. 전장에서도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확률이 높으니, 우리끼리라도 불사 교단의 언데드들에 맞설 방도를 찾아봐야지. 무방비하게 데스나이트나 리치를 상대할 수는 없지 않나.”
일반인이 성기사나 사제를 상대할 유일한 방법은, 그 자신도 발트제메르와 같은 성체거나, 아니면 하찮더라도 성물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다. 그리고 발트제메르는 ‘성물 무기의 대량 보급화’ 같은 것을 계획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장인 정신 투철한 화로 장인들은 군납의 필수적인 요소인 ‘대량생산과 저렴한 가격’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이건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군.’
황제가 포기하든가, 화로 장인들이 갈려 나가든가 할 일이다.
“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엘릴 왕국에서 거둔 성과에 대해 들어볼까?”
“이미 다 보고받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괜히 일정을 이렇게까지 뒤로 미뤘을까. 바로 자네가 엘릴 왕국에서 이뤄낸 호쾌한 이야기를 당사자 입에서 직접 듣고 싶어서였네. 참고로 자네 일정이 오늘 일정 중 가장 마지막이니 시간은 충분해.”
발트제메르는 빨리 썰을 풀어 보라는 듯이 아예 소파에 기대앉아 재촉했다.
아이작은 어이가 없어서 웃으면서도 입을 열었다.
***
“……그렇게 하고서야 저는 그분의 진정한 검을 견식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걸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별을 떨어뜨리는 충격과도 같다고 할까요.”
“허, 과연 무신, 패왕이라는 이명이 무색하지 않군.”
발트제메르는 연신 감탄하며 아이작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뭔가 정치적인 이야기가 오가지 않을까 했지만 발트제메르는 정말 아이작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을 뿐이었다. 심지어 디트리히조차도 아이작이 엘릴 왕국에서 얻어낸 성과를 정치 외교적으로 어떻게 이용할지 골몰했었는데.
하지만 아이작은 이 열정적인 청자 덕분에 제법 몰입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엘릴이 속삭인 신이나 검기에 대한 이야기들은 비밀로 했다. 안 그래도 야심 넘치는 황제가 그런 이야기까지 들으면 어디까지 튈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당연히 딸을 닮았니 어쩌니 했던 말들도.
“다행히 엘릴께서는 제 검을 인정하며 대전사로 임명하셨지요. 덕분에 엘릴 왕국의 인정을 받아 여명군 참전에 힘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오오, 그럼 자네가 차고 들어온 그 검이 엘릴에게 받은 그 성검 카훌린인가?”
아이작은 황제를 알현하면서 특별히 무장을 허락받았다. 루앗딘 열쇠는 성기사로서 소속된 무구였기에 함부로 손댈 수 없었고, 카훌린은 엘릴의 대전사로서 가진 상징이었기에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황제가 제국에서 가장 강한 존재라는 점이 이 느슨한 무기 제한에 한몫했을 것이다.
덕분에 아이작이 칼을 뽑아도 제지하는 황실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구경할 수 있겠나?”
“아, 물론입니다.”
아이작은 카훌린을 풀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발트제메르가 반사적으로 칼을 살펴보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아이작은 그 손을 제지했다. 여기서 황제가 자기 목을 찌르고 자살하면 교황이 좋아하겠지만, 아이작은 아직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 상태가 맘에 들었다.
“주의하십시오. 성검은 주인으로 선택된 자가 아니면 잡은 이의 목을 찌릅니다.”
“허, 성검마다 성스러운 힘과 저주가 함께 걸려있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발트제메르는 아쉬워하면서도 카훌린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무인이라더니 무구에 대한 욕심이 커 보였다.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창 역시도 상당한 수준의 성물이었다. 관찰이 끝나자 아이작은 카훌린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발트제메르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걸 보고 나니 다시 한번 내가 백제국의 황제가 되었음을 선언해도 좋겠다는 기대가 생기는군. 스반바르 군도에서 델리아 리옹도 잘해줬지만, 자네만큼은 아니었지.”
“……동맹을 생각한다면 교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어린 백성들이 황제 폐하를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게 좋겠지요.”
“물론이지. 그런 건 여명군이 끝난 다음의 일일세. 지금은 내부 정리부터지.”
내부 정리? 아이작은 조심스럽게 발트제메르를 바라보았다.
발트제메르는 이제 백제국 내, 그러니까 엘릴 왕국과 세상의 화로 교단의 협력을 끌어냈다. 그 말은 즉, 그가 지금부터 빛의 법전 교단을 상대로 ‘정리’를 시작해도 견제할 세력이 없다는 뜻이다.
불사 교단은 늘 방어할 뿐이지 군사를 몰아 쳐들어오진 않으니까.
“나는 새 교황으로 후안 리아르 추기경을 내세우면 어떨까 하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