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27)
227화. 지상은 인간에게, 천상은 신에게 (3)
새 교황? 아이작은 그 단어에 경악했지만 뒤이어 나온 이름에 또 한 번 경악했다.
‘후안이라고?’
좋게 말하면 이익에 밝고 나쁘게 말하면 돈을 밝히는 사제.
끊임없이 돈을 먹는 교단의 젖줄이지만, 동시에 교단의 권위를 아낌없이 휘둘러 돈을 갈취하는 것으로 이름 높은 사제의 이름이 나오자 아이작은 일단 뭐가 됐든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새 교황이라니, 지금 교황 성하께서는 혹시 건강이 편찮으십니까? 듣기로는 꽤 건강하신 것 같던데요.”
아이작은 발트제메르의 의도를 모르는 척하고 되물었다.
실제로 현 교황 호르마는 직접 여명군에 친정할 정도로 건강하다. 아니, 설사 병약하다 해도 ‘새 교황’을 대놓고 언급하는 것은 불경에 해당한다. 심지어 발트제메르가 말하고 있는 눈앞의 대상은 일단 표면적으로 빛의 법전 소속의 성기사다.
“그럴 리가. 교황 성하께서는 건강하시네. 직접 여명군에 앞장서겠노라고 호언하고 다닐 만큼.”
발트제메르는 비웃음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제로 수많은 전장과 수라장을 헤치고 나온 황제에게 교황의 말은 전장을 명예 쌓기 놀이터로 아는 모지리의 발언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하지만 교황 성하께서 전장에 나간다면 ‘불행한 사건’이 벌어질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전장의 혼란을 최대한 빨리 수습하기 위해 예비된 후보가 하나쯤 있어야지.”
발트제메르는 그 ‘불행한 사건’이 반드시 일어날 것처럼 말했다.
아이작은 복귀하자마자 듣게 된 이 어마어마한 음모에, 엘릴 왕국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엘릴 왕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종류의 이야기였다.
황제와 달리 교황체제에는 후계자가 없다. 교황의 자리가 비면 주교들 중 하나를 골라 추기경들이 투표해 추대하게 된다. 물론 추기경 본인이 출마할 수도 있지만 흔치 않은 일이었다.
만약 황제가 지지하는 교황 후보가 있다면 교단 안에서도 꽤 큰 지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작은 그제야 황제의 노림수를 깨달았다.
여명군의 광기를 부추기는 것은 교단만이 아니었다. 아마 황제도 방치하거나 눈감아 주고 있을 것이다. 종교적 광기에 교단마저 휩쓸려서 교황이 움직이게끔.
그리하여 ‘불행한 사건’으로 성좌(聖座)가 비었을 때, 새 교황을 옹립하는 것이다. 결국 정당한 절차를 거쳐 새 교황이 들어서는 순간 교단은 그 교황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면 황제는 교단을 배신하지 않고 교단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아이작이 보기에 이건 황제가 목숨 걸고 시도하는 도박수였다.
문제는 그 도박수의 승률이 결코 낮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제국의 운명을 걸기 충분할 만큼.
***
‘……하지만 후안이라고?’
“다른 사제는 없습니까? 교단에 인물이 그렇게 없지는 않을 텐데요.”
“자네 후안 리아르 주교와 친한 줄 알았더니 꼭 그런 건 아닌 모양이군?”
발트제메르가 놀란 듯 물었지만 아이작은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교단에서 아이작을 성자 후보로 적극적으로 추천한 것도 후안이고, 그를 이단 혐의에서 비호한 것도 후안이었으며, 그를 부활의 성자로 적극 추대(금덩이로)한 것도 후안이었다.
아이작도 그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는 척했으니 후안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법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후안이 교황이 되어서 나쁠 건 없군. 아니, 하지만 후안은…….’
경전보다 장부를, 묵주보다 금화를 더 많이 만져 봤을 것 같은 그 사제가 교황이 된다고?
아이작은 여전히 떨떠름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후안을 생각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백성들의 말’에 귀 기울일 정도로 신중하면서도 추기경 수준의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네. 게다가 교단 안에서도 후안 추기경의 ‘후원’을 받는 사제들이 많아서 파벌도 제법 규모가 있다더군. 그렇게 영향력이 있으면서 ‘광휘의 날개’를 허락받았을 정도의 사제는 많이 없지 않나?”
확실히 후안이 가진 어마어마한 재력이라면 많은 사제들을 매수하고도 남았을 것 같다. 결국 교황을 뽑는 것은 추기경들이기 때문에 후안이 자신의 표를 비롯해 다른 두 명만 매수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승산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판단이 서자 아이작은 일단 빠르게 생각했다.
‘부패하고 돈을 밝히는 사제 VS 신도들을 불태우면서 전쟁에 몰아넣는 광신도 사제. 어느 쪽이든 절망뿐이군.’
하지만 아이작은 내심 점점 후안에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자신을 지지한다는 것도 크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후안이 실리주의자라는 점이다.
모호한 사후세계의 관념을 따르기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광신도보다는 현실의 금화 한 닢을 더 얻기 위해 제 발로 뛰어다니는 것도 서슴지 않는 욕심쟁이가 차라리 아이작과 어울린다.
그리고 후안이라면 은근슬쩍 조종하기도 편할 것 같았다.
‘이건 애초부터 선택지가 없었군.’
예브하르 수도원장 같은 청렴하면서도 신심 깊은 사제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황 자리는 속세의 정치 외교와 무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지금 황제가 교황을 갈아치우려 하는 것처럼.
차라리 자기 파벌과 재산, 힘이 있고 확고한 신념…… 인지 뭔지를 가진 후안이 나을 수 있었다.
‘차라리’ 후안이 낫다는 판단이 서자 다음은 현실성의 영역이었다.
“수많은 기적들로 가호받고 계신 교황 성하께서 이교도의 손에 그리 쉽게 당하시겠습니까?”
어설프게 시도했다가는 전쟁 직전에 제국이 쪼개지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가장 좋은 건 불사 교단이지만, 최소한 다른 교단의 행각으로 보여야만 했다. 하지만 빛의 법전의 기적은 강력하다. 교황이라면 부활의 기적조차 행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네.”
발트제메르는 미소를 지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편이 좋겠군. 어쨌든 불행한 일이 벌어질 경우 자네의 뜻이 후안에게 있다는 것만 알면 충분하니.”
아이작은 입을 다물었다.
발트제메르는 아이작이 자신의 ‘신성모독적 언행’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기 위해서 질문을 꺼낸 것이다.
과연 그가 자신의 편에 설 것인지 교단의 편에 설 것인지 알기 위해.
하지만 위험부담이 큰 도박이었다. 아이작은 교단을 맹신하는 성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황제에게 보여주었지만, 황제 역시 신앙적 역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제가 당장 교단으로 달려가서 황제 폐하의 신앙심을 고발할 것이라는 걱정은 안 드십니까?”
“왜? 자네가 내게 말해주지 않았나. 지상의 일은 지상의 사람들이 결정해야 한다고. 그 말은 내게 아주 깊은 영감을 주었다네.”
아이작은 말문이 막혔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인간이 아직 스물도 안 된 성배기사 말에 넘어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발트제메르의 말은 아이작의 생각과 일치했다. 그 역시 청렴한 광신도보다는 부패한 사제가 낫다고 생각해서 후안을 밀기로 했을 테니까.
심지어 교단의 수뇌부 꼴을 보아하면 딱히 청렴해 보이지도 않다. 아래 물을 보면 윗물도 안다고, 교황도 어떤 꼴일지 뻔했다.
그렇다고 천사들이 그런 교단의 수뇌부를 응징하지도 않는다.
리히트 조약 때 있었던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교단 전체가 붕괴할 위기가 아니면 손대지 않는다.
빛의 법전에 남아있는 가르침이나 윤리 도덕은 천사나 성자들이 남긴 것들일 뿐이니까.
빛의 법전은 그저 견고한 질서를 수호할 뿐이다.
***
아이작은 황제와 교황의 갈등이 심상찮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당장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사실 이것은 모호한 감정싸움에 불과하던 것이 실질적인 계획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에 불과했다.
발트제메르와 아이작은 서로의 의중을 확인해본 것뿐이다. 이러다 흐지부지될 수도 있는 것이고, 당장 현실적인 무언가로 발전할 근거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때문에 둘 중 하나가 배신한다 해도 서로에게 타격이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런 난장판인 상황 속에서도 여명군을 꾸릴 수 있는 제국의 국력과 견고함에 감탄이 나올 뿐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교황에 대해 칼을 갈고 있듯이, 교황도 황제에 대해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을 텐데…….’
제국의 저력은 결국 빛의 법전이 오랜 시간 쌓아 올린 견고한 질서에서 비롯된다. 교황이 우습게 당할 리는 없었다.
제국 기사단이 그러하듯 이단심문청도 만만한 조직은 아니니까.
‘그래. 둘이 열심히 싸워라. 상황 봐서 대충 내 말을 들을 것 같은 쪽을 응원해야겠군.’
사실 아이작은 어느 쪽이든 천사만 개입하지 않는다면 이기는 쪽으로 바꿔줄 자신이 있었다.
그에게는 일신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소금 의회의 지지와 엘릴의 대전사라는 상징이 있었다.
당장 오월의 검과도 안면이 있는 만큼, 아이작은 이 싸움의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이작이 면담을 마치자마자 디트리히가 찾아왔다. 그 역시도 아이작의 생각과 판단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한숨처럼 말했다.
“미리 듣긴 했지만 정말로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 중이신 줄은 몰랐군요.”
둘은 혹시 듣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교묘하게 주어를 빼놓고 대화했다.
“폐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늘 야망이 크셨지. 황제에게 야망은 미덕일세. 아무리 유능한 자라도 야망이 없으면 무능하고 야망이 큰 자에게 자리를 빼앗기거든.”
디트리히의 말에 아이작은 이전에 발트제메르 황제를 적대했던 자들, 발트제메르의 형제들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성체가 발현한 황제와 맞선 그 형제들을 교만의 상징으로 교훈 삼았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머리에 빛을 뿜어내는 사슴뿔을 단 사람과 싸우지 않을 테니까.
“황제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실 때 사정이 어떠셨는지 궁금하군요. 그때도 황제 폐하께서는 자신의 야망에 이렇게 적극적이셨습니까?”
지금 상황과 가장 유사한 사례를 찾으라면 제국 내전 당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도 12차 여명군이 코앞이던 상황에서 황위를 둔 내전이 일어났으니 현재 상황과 비슷하다 할 수 있었다.
아이작의 말에 디트리히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황제 폐하께서는 황위에 오르시기 전엔 가장 세력이 약하셨지. 일곱 명의 왕자들 중에서도 막내셨고, 체구도 왜소하셨네. 성체를 발현하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분을 경쟁 상대로 생각 하지 않았지.”
이건 또 몰랐던 이야기다. 발트제메르가 아직 어린아이였던 시절이라니.
“하지만 방계에 속한 나와 달리, 황족들은 철저하더군. 어린 시절부터 발트는 많은 암살 시도에 휩쓸렸네. 하지만 형제들도 셋이나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살아남았지. 그의 계승 순위는 차근차근 높아졌지만…… 여전히 그가 황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 나와 다른 귀족들을 비롯해서.”
디트리히는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듯 먼 곳을 바라보는 눈으로 울텐하임을 응시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집에 큰 화재가 일어났네. 발트의 얼마 안 되는 재산과 외가, 하인들까지 휩쓸린 대화재였지. 나도 그 화재를 목격했지. 무슨 저택을 장작 삼은 것처럼 타오르던 불길, 그리고 거기서 태연하게 걸어 나오던 발트와 그의 머리 위로 솟은 뿔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명하군.”
“……그 화재 때 성체를 각성하신 겁니까?”
“그래. 차남의 하인들이 저지른 일이라는 게 뒤늦게 밝혀졌지. 황위 계승전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네. 그때까지는 황제의 장남과 차남이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는데, 갑자기 초신성이 하늘에서 떨어진 셈이었어.”
“하지만 형제들은 신이 내린 권위에 복종하는 대신 싸움을 선택했군요.”
“성체라는 건 신이 인간에게 내린 도구일 뿐이네. 그 도구로 시련을 극복하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지. 빛의 법전께서 그냥 뜻대로 하려 드셨다면 그냥 다른 황위계승자들에게 벼락을 떨어뜨리셨을걸세.”
그게 더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빛의 법전은 권능을 은근하게 드러내는 방식을 선호한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아이작은 그게 신의 한계를 보여 주지 않으려는 이유일 거라고 생각했다. 의도를 분명하게 보이고도 실패한다면 그게 신의 한계가 될 테니까. 하지만 신이 성체를 내렸음에도 실패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핑계가 된다.
그 말은 곧 설령 발트제메르가 형제들에게 살해당하더라도 신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발트제메르는 형제라는 시련을, 형제들은 성체라는 시련을 정면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표면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작은 엘릴을 통해 검기의 비밀을 들었다.
신들은 인간이 결코 자신들이 독차지한 권능에 가까이 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발트제메르가 가지고 있던 염원, 갈망, 노력은 억눌리다 못해 성체의 형태로 드러났는지도 모른다.
발트제메르가 사사건건 교단에 반항하는 모습을 보면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나는 발트에게 성체가 발현됐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델리아 리옹과 함께 찾아갔지. 그리고 그날 밤새도록 대화를 나눠보고, 해 뜰 무렵 충성 맹세를 했다. 브란트 가문은 총력을 다해 발트제메르를 황제로 만들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