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30)
230화. 기어드는 혼돈 (2)
게임상에서 ‘심연범람(Abyss flood)’이라고 일컫는 이 사건은 게임의 초중반에 일어나는 가장 큰 사건이었다. 플레이어의 성과에 따라 다르지만, 최악의 경우 제국 수도의 1/3 가까이가 초토화되곤 하니 당연하다.
사건의 진상은 플레이어의 진영에 따라 다르다.
플레이어가 백제국이라면 ‘사교도 놈들이 불사 교단의 도움을 받아 고대의 혼돈을 깨워 수도에 저지른 테러’라고 나오지만, 흑제국 진영이라면 ‘빛의 법전 교단이 인위적으로 천상의 힘을 끌어내려다 스스로 불러낸 재앙’이라고 전말을 설명한다.
이렇게 플레이어의 선택과 진영에 따라 진상이 바뀌는 일은 비일비재했으며, 무엇이 진실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지금은 아이작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주체가 되었으니, 게임의 지식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어쨌든 사교도인지 뭔지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괴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어차피 그것 때문에 공동묘지를 조사해 보려고 했는데 겸사겸사 교단에 빚을 지울 수 있게 되었으니 잘된 일이었다.
‘시기적으로 맞지는 않지만 발동 조건이 여명군 때문이라면 앞당겨질 수도 있지.’
괴물이 그동안 열심히 먹어서 튼튼하게 자란 다음 튀어나오는 걸 수도 있고.
특히나 교단이 먼저 나서서 의뢰했다는 점에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할 단서가 하나 더 생겼다.
‘사건의 원인이 누구인지는 지금으로선 명확하지 않지만…… 교단이 의뢰한 걸 보면 테러일 가능성이 높으려나? 아니지. 교단에서 판을 벌려 놓고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짬처리한 걸지도.’
지금 교단의 꼴을 보니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일단 공동묘지 연쇄 살인 사건이라고 불린다면 그쪽에서 시체가 발견됐다는 뜻이지요?”
“그게 미묘한 부분이에요.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얘기는 파다한데 정작 직접 봤다는 사람도 없고, 보고된 것도 없어요.”
헤사벨이 괜히 ‘도시괴담’이라고 부르는 게 아닌 셈이다.
“사교도들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공동묘지로 가서 조사해보면 되겠지요. 교단에서도 뜬소문 때문에 제게 부탁했을 것 같지도 않고, 민심을 흉흉하게 만드는 소문도 무시할 수는 없으니…….”
“흠, 일단 그렇게 해야겠네요. 누가 봐도 수상한 거무칙칙한 사교도가 구불구불한 단검을 들고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
그때 이솔데의 말이 멈췄다. 아이작 역시 같은 타이밍에 골목 끄트머리를 보고 있었다.
골목 끝에서 짙은 회색의 로브를 걸친 한 수도승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구시가지의 어두컴컴한 골목 중에서도 유독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곧바로 멈춰 서거나 피해 갈 만한 모습이었지만, 아이작과 이솔데는 곧바로 튕기듯 앞으로 달려갔다.
“멈춰! 수상한 죄로 체포한다!”
전직 이단심문관만 할 수 있는 극악무도한 체포 선언이었다.
그러나 수도승은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까지 로브를 깊이 눌러쓴 채 움직이지 않았다. 상대가 정말로 그냥 수도승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작은 칼을 휘두르는 대신 팔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로브의 형태가 기이하게 휘어지더니, 불쑥 소매 속에서 단검이 튀어나왔다. 수도승 따위가 휘두른 단검에 아이작이 당할 리는 없었으나, 수도승은 휘두르는 게 아니라 스며든다는 느낌으로 단검을 뻗었다.
아이작의 손도 팔도 무시하고, 마치 그림자가 얼굴 위에 드리워지는 것처럼 단검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아이작은 가까스로 목을 틀어 단검을 피했다. 그럼에도 살갗을 스쳐 피가 흘러나왔다.
반격하거나 막아 낼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수도승은 재차 아이작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구불구불하게 관절이 휘어지며 덮쳐오는 검격은 인간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마치 기체나 액체가 어설프게 인간 흉내를 내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타이밍에 아이작은 이미 루앗딘 열쇠를 뽑아 휘두르고 있었다.
화르르르륵! 루앗딘 열쇠에서 피어오른 열기가 로브를 순식간에 찢듯이 태워 버렸다. 아이작은 그 속에서 놈의 정체가 드러나길 기다렸지만, 보인 것은 허무하게 흩날리는 잿가루뿐이었다.
“아이작!”
그때 등 뒤에서 이솔데의 목소리가 들렸다. 출입문이라곤 없는 길고 좁은 골목길이었음에도, 대체 어디에 있던 건지 또 다른 수도승 둘이 이솔데를 향해 단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솔데는 빠른 속도로 벽과 바닥을 박차며 뒤로 물러났다.
놀라울 만큼 빠르고 유연한 동작이었다. 아이작은 순간적으로 왈라이카 인간사냥꾼을 떠올렸다. 그리고 뒤늦게 그녀가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심장을 먹었던 것을 떠올렸다.
이솔데는 미리 꺼내든 팔찌를 흔들었다.
팔찌가 서로 부딪친 순간 눈이 아플 정도의 섬광이 터져 나왔다. 빛의 법전의 기적이 담긴 성물이었다. 수도승들이 휘청거리는 사이 아이작이 한 명을 태워버리고, 이솔데 역시 다른 한 놈의 몸에 단검을 쑤셔 박았다. 단검이 박힌 수도승은 온몸에서 빛을 뿜어내며 부글거리듯 펄럭거리다 무너졌다.
“그 단검…….”
“아, 폐하께서 선물해 주셨어요. 좋은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강력하네요.”
루앗딘 열쇠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강한 기적이 깃든 성물처럼 보였다. 선지자의 심장으로 강화된 신체 능력과 이정도 강한 성물이라면 이솔데가 어디 가서 쉽게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끝인가요?”
“그런 것 같군요.”
더 이상 기습이 없자 둘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소란이 벌어졌던 골목은 탄내만 가득했다. 하지만 아이작도 이솔데도 이 기괴한 존재들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으음…… 진짜로 사악한 사교도? 들이 있네요. 아니, 애초에 이게 사교도가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놈들이 정말로 수도 한복판을 돌아다닌다고요? 게다가 대체 어느 신앙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죠?”
이솔데는 혼란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불사 교단은 확실히 아니고, 그녀가 아는 어떤 신앙도 이런 괴물들을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 비슷한 괴물들을 본 적 있었다.
로브는 좀 더 낡고 헤지긴 했지만 이미 육신을 잃고 외경을 형체 없이 떠도는 사제들.
이름 없는 혼돈의 사제들.
***
아이작과 이솔데는 골목을 좀 더 수색해 보았지만 놈들이 도무지 어디에 숨어있다가 나타난 건지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찾을 수 있었다.
이솔데는 바닥에 엎드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배수로 구멍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몸이 그렇게나 유연하다면 이 정도 구멍을 드나드는 건 아무것도 아니겠죠.”
그 가능성밖에 없었다. 다른 가능성은 갑자기 순간이동 하는 능력이 있다거나 그림자에 숨어 이동하는 능력이 있다는 건데, 전자는 그 어떤 추측도 불가능하게 만드니 일단 제외했고, 후자는 이솔데가 뿜어낸 섬광에 당했을 때 꼼짝도 못 했어야 했다.
“이 배수로는 어디로 이어져 있죠?”
“흠.”
이솔데는 복잡하게 뒤얽힌 구시가지의 설계를 떠올리는 듯 말이 없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구시가지가 옛 도시 위에 쌓고 쌓고 또 쌓아 올려서 만든 곳이라 정확한 추정은 불가능해요. 이 아래도 옛날에는 사람이 번듯하게 돌아다니던 대로였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게 제대로 배수로로 쓰이고 있다면, 여기로 이렇게 이동해서…….”
이솔데는 가상의 지도 위에 손가락을 슥슥 그어 거리를 재다가 한곳에 멈춰 섰다.
“……공동묘지와도 이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네요.”
공동묘지 자체도 높게 쌓아 올린 묘지들이 언덕이 되어버린 형태다. 반드시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솔데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중얼거렸다.
“우리가 자기들 이야기하는 걸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요?”
“원래 무서운 이야기를 이야기하면 귀신이 찾아온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귀신? 불사 교단의 악령이 수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닐 리가요.”
“…….”
아이작 딴에는 농담한 거였지만 죽은 사람이 뻔뻔하게 해골로 되살아나서 돌아다니는 세계에선 농담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솔데는 깊게 받아들이지 않은 듯 생각에 빠졌다.
“……누군가 이 조사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서 정보를 흘렸다거나?”
이솔데의 혼잣말에 아이작은 바로 카밀 추기경을 떠올렸다.
아이작은 카밀에게 의뢰를 받자마자 바로 이솔데와 조사를 시작했다. 굳이 발트제메르나 디트리히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서 말도 하지 않았다. 이솔데가 낀 것도 단지 그녀가 구시가지가 와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밀 추기경이 의뢰를 맡겨놓고 의뢰를 방해할 이유가 없다.
“교단 내부에서 정보가 샜을 가능성이 있겠군요.”
아이작이 중얼거렸다.
카밀은 아니더라도 정보가 샜다면 교단에서일 가능성이 높았다. 카밀과는 이해관계가 다른 교단 내부자가 아이작의 조사를 방해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빛의 법전 교단 안에 사교도가 있고, 그 사교도가 괴물을 소환한다……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네요. 공동묘지는 교단의 관리를 받고 있으니까 그곳에 배교자들이 숨어있다면 좋은 은신처가 될 거예요.”
아이작은 이것들이 이름 없는 혼돈의 사교도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하지만 아이작으로서도 확신을 갖기 힘들었다. 보통 혼돈의 권속들이 나타나면 아이작이든 괴물이든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거나 적대감을 품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어떤 영향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렇게 하지요. 제가 묘지를 조사할 테니, 아이작이 성당의 사제들을 조사해 주세요.”
아이작은 어이없다는 듯 이솔데를 바라보았다.
“반대 아니고요?”
“저는 얼마 전에 교단에서 쫓겨난 몸이라 사제들을 만나고 다니기 껄끄럽습니다. 카밀 추기경님은 과거에 인연이 있어서 인사드릴 수 있었지만 그뿐이죠. 하지만 아이작은 교단에서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교단에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얼마 전에 사제 목을 날린 데다 황제파로 찍혀 있을까 걱정 중인 아이작에게는 의아한 소리였다.
‘후안 말곤 싫어하는 사람들뿐일 거 같은데.’
아이작이 이해 안 된다는 듯 그녀를 보자 이솔데는 어깨를 으쓱였다.
“한번 가서 만나보기나 하세요. 그리고 이단심문관 경력이 만만한 게 아니랍니다. 괴물보다 같은 교단 조사하는 게 제 전공이에요. 위험할 것 같은 곳은 같이 갈 테니까 걱정 마세요.”
이솔데는 한 가지에 꽂히면 직진하는 무모한 구석이 있긴 해도 믿는 구석이 없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아이작은 이솔데를 믿고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그 나름의 안전장치는 잊지 않았다.
***
울텐하임 성당은 그 긴 역사만큼이나 누더기 같은 외형을 가지고 있었고, 그 누더기 같은 외형만큼 다양한 시설을 중구난방 가지고 있었다. 기도하는 예배당은 물론이고 사제들이 먹고 자는 기숙사, 대도서관, 식당, 정원, 신학교 등등이 가지처럼 뻗어나가는 형태였다.
성배기사라 해도 같은 성당 소속자가 아니라면 외부에 함부로 공개되지 않는 장소들도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오랜만에 방문하는 종교시설에 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수도원에서 살던 때가 생각나는군.’
물론 울텐하임 성당은 아이작이 살던 수도원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크고 화려한 곳이었지만, 낡은 건물 특유의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문득 정원을 돌아보던 아이작은 갓 사제가 되었을까 싶은 청년 사제들이 조용히 소근거리며 지나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자신도 성배기사가 되지 않았다면 저들처럼 란셀 수도원에 입학하여 공부했을 것이란 걸 떠올리자 기분이 묘해졌다.
“어?”
그때 한 청년 사제가 아이작을 보고 놀란 표정을 했다.
“어, 그, 아이작 이사크레아 아니십니까?”
“응? 성배기사? 어어? 맞는 거 같은데?”
성당에 들어왔다고 방심하고 있던 아이작은 뒤늦게 후드를 눌러썼다. 하지만 이미 아이작을 발견한 청년 사제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청년들은 해맑은 얼굴로 아이작이 도망치지 못하게 둘러싸고 말을 걸었다.
“아, 성배기사님!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아헬 형제가 성서에 성배기사님을 먼저 만나 뵙고 성서에 서명도 받았다길래 저희가 얼마나 부러웠는데요! 오셔서 한마디 말씀쯤 나누실 줄 알았는데!”
“어, 그, 음. 죄송합니다. 그게.”
아이작은 예상치 못한 청년 사제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당황했다.
수도원 사제들도 이랬던가? 물론 그때는 아이작이 어려서 수도원 사제들이 어른스러워 보였을 수도 있다. 수도에 사는 사제들은 부유층이 많다 보니 여유 있어서 그런 걸수도 있고.
‘요즘 젊은 것들이란…….’
하지만 단순히 유명한 성배기사를 만났다기에는 지나치게 열광적인 반응들이었다. 그때 갑자기 안경을 눌러쓴 한 청년이 덥석 아이작의 손을 쥐고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아이작 이사크레아, 우리의 새로운 등대! 당신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우상이에요!”
가르침? 우상?
아이작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작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썰고 베고 자른 기억은 많아도 뭘 가르친 기억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안경 쓴 사제는 열망으로 반짝거리는 눈으로 말을 쏟아냈다.
“당신이 이사크레아 영지에서 퍼뜨린 ‘신 교리’는 구닥다리 교리들을 대체할만한 진짜 가르침입니다! 꼭 이 신 교리의 선구자와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아.
아이작은 그제야 퍼뜩 떠올랐다.
그가 이사크레아 영지의 수도원에서 예배를 진행하면서 떠들었던 말들.
빛의 법전 안에 혼돈의 교리를 퍼뜨린답시고 어디서 주워들은 온갖 좋은 과학과 철학과 이념을 짬뽕시켜 떠들었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제야 아이작은 현실을 깨달았다.
그 자신도 바로 이 눈앞의 ‘신세대’의 일원이며, 심지어 그 선봉에 서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