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32)
232화. 기어드는 혼돈 (4)
아이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장식 타일을 살펴보았다.
“사교도들의 상징일까요?”
아이작은 일부러 이름 없는 혼돈을 언급하진 않았다.
이솔데가 이름 없는 혼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불을 보듯 뻔했기에, 굳이 듣고 싶진 않았다.
원래 사교도라는 호칭은 고대 신앙을 섬기는 신도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하지만 이름 없는 혼돈 역시 공식적으론 멸망한 신앙이기 때문에, 사교도는 혼돈의 신도들을 포함하는 명칭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솔데는 의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알 수 없지요. 소금 의회의 천사를 새긴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왜곡에 의해 착각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내부를 더더욱 살펴봐야죠.”
굳이 그녀가 아이작에게 이것을 먼저 보여 준 이유는 하나뿐이리라.
아이작은 이솔데에게 촉수를 보여 줬던 것을 떠올리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솔데를 두고 갈까도 했다. 하지만 이솔데는 아이작이 이래라저래라하면서 돌봐줘야 하는 사람도 아니었거니와, 올빼미의 가르침이니 뭐니 하는 신학적 지식을 분석하려면 이단심문관 출신인 이솔데가 필요했다.
“좋습니다. 일단 내려가서 그곳부터 살펴보죠.”
둘은 다시 납골당 안으로 발을 디뎠다.
이미 이솔데가 길을 찾으면서 경로를 체크해 두었기 때문에 내려가는 속도는 훨씬 빨랐다. 이내 이솔데가 발견한 무너진 구멍에 도착했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관리가 안 된 편이었는데, 그 때문에 바닥이 무너진 것 같았다.
아이작은 시커먼 구멍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을 들여다보다가, 루앗딘 열쇠의 불꽃을 키우면서 뛰어들었다.
불꽃이 어둠을 잡아먹듯 더 거세게 타오르면서 주변을 밝혔다. 이솔데도 이내 뒤따라 내려왔다.
“……허.”
제법 큰 공간이 나타났다. 지상의 납골당이나 묘역과는 다른 건축 양식의 카타콤이었다. 훨씬 투박하지만 장엄한 느낌이 들 정도로 크고 넓었다. 벽면은 책장처럼 빼곡하게 층층이 무언가 쌓여 있었다.
이솔데는 그 공간을 보고 얕게 신음했다. 무수한 백골들이 가득 자리 잡고 있었다. 이솔데는 해골들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장례를 마치고 정화된 백골이에요. 정신 나간 사령술사가 들어와서 움직이더라도 별 힘은 없을 거예요.”
백골이 남았다는 것은 적어도 300년 전의 유적지라는 뜻이다.
하지만 붕괴된 장소를 비롯해 바닥을 살펴보니, 그 뒤에도 제법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보였다. 이솔데도 바닥에 쌓인 먼지의 양이 다른 부분을 발견하고 언짢은 표정을 했다.
“저희가 들어온 구멍 말고도 다른 비밀통로가 있는 것 같네요.”
“구시가지로 이어진 배수로라던가?”
“네. 하긴, 울텐하임 지하가 얼마나 복잡한지는 아무도 모르니…….”
이솔데가 걱정하며 살펴보았던 이름 없는 혼돈 신앙의 흔적 같은 것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장식용 벽돌이나 문양, 심지어 관짝에도 대놓고 촉수나 기묘한 프랙탈 도형이 새겨져 있었다.
아이작은 소금 의회의 천사, 아문달라스가 그에게 보여 주었던 백사병 발생 직전의 세계를 떠올렸다.
당시 이름 없는 혼돈은 사회 상류층부터 하류층까지, 두루두루 믿고 열망하는 신앙 중 하나였다. 암암리에 섬기는 신앙이라고는 해도 당시 인구의 1/3이 신의 이름을 안다는 이유로 죽을 정도라면 대놓고 섬겼어도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
‘클레르와 그 MZ 사제들이 이 묘역에서 매장된 가르침을 발굴해 냈대도 이상하지 않겠군.’
아이작은 클레르의 정신을 깊게 들여다보진 않았지만, 가볍게 대화를 나눠 본 것만으로도 그들이 정신 나간 사교도가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엔 젊은 세대다운 호기심과 학구열, 인정욕구가 가득할 뿐이었다.
아마 이 지하 묘역에 모이는 것도 자신들이 배우지 못했던 지식을 찾아낼 수 있으리란 생각 때문인 게 분명했다. 그 모습을 얼핏 들키면서 사교도라는 소문이 퍼졌을 테고.
하지만 그들이 ‘공동묘지 연쇄 살인 사건’과 무관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구시가지에서 나타난 그 괴 수도승들과 앞으로 울텐하임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괴물…… 어쩌면 클레르와 그 망나니 친구들이 공부해선 안 될 지식까지 공부했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들은 올빼미의 가르침을 찾은 것처럼 이름 없는 혼돈의 지식까지 찾아냈는지도 모른다. 이름 없는 혼돈에 관한 지식들을 아홉 신앙이 병적으로 검열 삭제해 버렸지만, 무덤의 관짝까지 들춰 가며 검열하진 않았을 테니까.
***
아이작과 이솔데는 한참 묘역을 뒤져 봤지만, 사교도의 습격도, 괴물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이 모이거나 뭔가 의식을 치른 듯한 장소는 발견했지만, 범인이 없으니 의미 없는 일이었다.
이솔데는 바닥에 그려진 의식용 진을 확인해 보다가 일어섰다.
“모르는 주술인가요?”
“……아뇨, 오히려 너무 어설프게 그린 진이라서 뭔지 모르겠네요. 아주 파편적인 지식만 가지고 어설프게 흉내 낸 거 같아요. 올칸 규율과 혼돈, 소금 의회의 의식이 잡다하게 섞여 있어서.”
하지만 아이작은 이솔데와 감상이 반대였다.
잡탕에 어설픈 것은 사실이지만 의식이 부분적으로나마 성공한 흔적이 느껴진 것이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심지어 이름 없는 혼돈도 이 상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아이작은 주변에 긁힌 듯한 흔적과 기운을 바탕으로, 무언가 이 의식을 통해 무언가가 나왔음을 알 수 있었다. 특정 존재의 소환까지는 실패했더라도 우르반수스의 기운과 파편 정도는 튀어나왔을지도 모른다.
아이작은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할 수 없죠. 오늘은 일단 돌아가고 내일 다시 오죠.”
“으음, 매복하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공기가 탁한 데다, 이들이 언제 올지 모르지 않습니까. 여기서 오래 버틸 준비도 안 해왔습니다. 적어도 마실 물과 먹을 것 정도는 준비해야죠.”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이솔데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늦은 밤이었다. 의식용 진 주변도 누군가 드나든 지 제법 오래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물론 아이작은 그가 굳이 기다릴 필요 없이 저 너머의 기생충으로 숙주 삼은 쥐 한 마리를 여기에 심어 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나가기 전에 이솔데에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의식에서 뭐가 튀어나왔을지도 모르는데 함께 조사할 이솔데를 무방비한 상태로 둘 수는 없었다.
“이솔데, 당신에게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은데 화를 내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이작의 말에 이솔데는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당신 부탁이라면 무슨 부탁이든 받아들일 수 있지만…… 뭐길래 제가 화낼 수도 있는 부탁인가요?”
“당신은 지금 기적을 사용할 수 없지 않습니까.”
쓸만한 성물들을 골라 무장하긴 했지만, 이단심문관 시절의 기적은 더 이상 허락받지 못했다.
때문에 아이작은 다소 위험 부담을 무릅쓰기로 했다.
“제가 당신에게 일부 기적을…… 부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몰래 ‘안전장치’를 심어 놓을 수도 있다.
아니, 사실 이미 일종의 안전장치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것은 이솔데의 동의를 받아 그 나름의 기적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솔데는 다른 사제가 아닌 아이작이 기적을 부여한다는 말에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길이 아이작의 왼손으로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촉수와 관련 있는 걸까요?”
“저도 통제하고 길들인 촉수입니다. 이솔데에게 결코 해를 끼칠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어쩌면 이솔데의 앞길을 방해하는 짓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솔데는 이미 붉은 성배의 천사의 심장을 먹은 빛의 법전 교단 출신 이단심문관이다. 거기에 이름 없는 혼돈의 축복을 조금 겹쳐 봤자 크게 두드러지는 흠은 아닐 거라고, 아이작은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이솔데는 잠시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빛의 법전을 믿어요. 아이작.”
그녀는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뻗어 아이작의 왼쪽 손과 깍지를 꼈다.
“하지만 그만큼 당신 역시도 믿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
“흐윽, 헉!”
울텐하임 성당, 신학대학 기숙사실에서 잠들어 있던 클레르는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났다.
비슷한 타이밍에 같은 방에서 자고 있던 사제들도 덩달아 일어났다. 식은땀이 흥건한 클레르는 오밤중에 눈을 뜬 사제들을 보고 자신이 단순한 꿈을 꾼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공범의 침묵을 공유했다. 두려움과 호기심, 죄책감에 휩싸인 채 그들은 조심스럽게 침실 밖 복도로 나왔다.
“너희들도 같은 꿈을 꾼 거 맞지?”
“……그래. 그자가 우리를 부르고 있었어.”
“어쩌지?”
불안한 속삭임이 오가자 클레르는 안경알 너머로 열의를 불태웠다. 다른 학생들이 겁에 질린 것과 반대로 그는 학구적 열망에 휩싸여 있었다.
“당연히 다시 가야지! 우리가 실패한 원인을 찾아내고 되돌릴 수 있는 기회야!”
“하지만…….”
“혼돈은 빛의 법전께서 세우신 질서정연한 세계에 흠집을 내는 균열이야. 우리는 그 균열을 들여다보고 더듬어서 닫을 수 있어야 해!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연구이자 사명이야!”
클레르의 열띤 호소에도 학생들은 겁에 질린 눈치를 공유했다.
“성배기사께서 지금 성당을 드나드시는데 의심을 사면 그분께서 칼로 우리 목을 치실걸.”
“아니지. 오히려 아이작 님이 방문하신 것이 계기가 된 걸 수도 있어. 아이작 님도 우리와 뜻이 같다는 걸 이미 확인했잖아. 아이작 님이라면 이름 없는 혼돈을 길들이고 부리는 법조차도 알아야 한다고 하실 거야.”
클레르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학생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아이작 님이라도 그건 좀…….”
“그, 그래. 차라리 성배기사님께 우리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보자. 그러면 수습할 길도 일러주실지도 몰라.”
클레르는 친구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는 언젠가 아이작 님과 어깨를 나란히 할 형제지, 도움이나 청하는 양 떼가 아니야. 그분은 우리 또래인데도 벌써 천사를 치고 소드마스터들을 혼내주고 있어. 계속 그렇게 한심하게 살 거야?”
클레르의 말에 학생들은 말을 잃었다. 클레르는 안경을 고쳐 쓰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준비해. 다시 지하 묘역을 방문할 거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해보자고.”
***
밤안개가 깔린 울텐하임을 보면서 아이작은 생각이 많아졌다.
‘그 애송이 사제들이 이름 없는 혼돈과 엮인 사교도일지도 모른다고?’
실제 아이작의 나이와 비슷하긴 했지만, 전생의 나이까지 합치면 한참 어린 애송이들이다.
모처럼 자기 말을 잘 이해해 주는 젊은 사제를 만나서 기분 좋았는데, 괴물을 소환할 사교도 무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착잡해졌다.
그리고 자신의 기분에 이상한 아이러니를 느꼈다.
‘……게벨이나 이솔데처럼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도 내 정체를 알면 비슷하게 생각하려나?’
본연의 사람 자체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름 없는 혼돈과 관련되었다고 생각하자 아이작 자신조차 색안경을 끼게 되는 것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름 없는 혼돈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미친 괴물과 멸망을 꿈꾸는 사교도들뿐이었으니, 결국 엮이는 사람들도 비슷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아이작은 클레르와 그 일당들을 생각하다가 침대에 누웠다. 일단 내일 묘역에 기생충을 풀어서 감시의 눈을 붙여 두고, 클레르와 직접 대면하여 심문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일단 자신을 존경하는 것 같으니 잘만 말하면 알아들을 것 같았다.
‘말을 안 들으면 쥐어패서라도 듣게 만들어야지.’
그때 문득 아이작은 뭔가 감각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잠드는 느낌 같기도 했고, 멀미가 닥쳐오는 것 같기도 했다.
머리가 탁해지는 어중간한 감각 속에, 아이작은 어두침침한 어딘가에서 눈을 떴다.
“서, 성공했나?”
웅웅대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각, 촉각, 청각, 후각, 모든 것이 애매모호했다. 모든 감각이 극도로 퇴화한 것 같았다. 아이작은 희뿌연 시야 속에 짙은 회색의 로브를 눌러쓴 사제 무리를 발견했다.
“마, 망각된 이름의 신이여, 우리가 너를 소환했다! 명령에 복종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