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40)
240화. 멋진 지옥 (2)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아이작은 자료에서 읽은 기록들을 떠올리자 감정이 욱신거렸다. 그에 반응하듯 이름 없는 혼돈이 아이작의 몰입도를 억제했다.
아이작은 그마저도 화가 났다.
그는 지금까지 이름 없는 혼돈 교단이 저질렀던 죄악에 대해서 모호하게 ‘나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백사병으로 전부 죽었다는 사실에는 동정심마저 품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 역사에 대한 자료를 읽고선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들은 멸망해 마땅한 인간들이었다.
아니, 이름 없는 혼돈이 이미 멸망시키지 않았다면 아이작이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름 없는 혼돈의 도움을 받아 이 정도로 성장하기 전에 이 자료집을 읽었다면, 그는 평생 이름 없는 혼돈의 기적을 쓰는 것을 꺼렸을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이름 없는 혼돈이 결코 과거 교단의 행적을 긍정하지 않으며, 아이작이 무엇을 하든 무한정의 호의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용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름 없는 혼돈의 이름 아래 행해졌던 무수한 학살과 고문, 광기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왜 이름 없는 혼돈에 각 신앙과 신도들이 학을 떼며, 관계도가 최악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런 존재인데도,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용납할 수 있는 건가?’
어쩌면 300년의 세월은 그 충격과 공포를 잊기에 충분한 세월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세대는 교단의 집요한 검열 때문에 공포와 혐오를 느낄 기회도 잃었으니까.
당장 큰 위협은 불사 교단 쪽이기도 했고.
“한가지 예를 들어보죠. 이들은 대표적으로 탈피(脫皮) 의식이라는 것을 행했습니다. 인체를 매개로 외계의 힘을 끌어들여 가죽 내부의 본질을 변화시킨다는 의식인데, 이것은 빛의 법전의 열쇠 의식과 세상의 화로가 가진 재창조의 교리, 붉은 성배가 행하는 피의 의식이 뒤엉킨 듯한 형태입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라는 신앙이 애당초 뿌리 있는 신앙이라기보다, 각 신앙에서 흘러든 하수구 같은 종자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어서 그런지 모든 신앙이 잡다하게 뒤섞인 듯한 형태입니다. 당연히 소환 가능한 신수나 얻을 수 있는 힘도 정상적일 리가 없지요. 자신이나 상대를 변질시키는 것이 기본인 의식인데, 클레르의 의식이 어설펐던 것은 제대로 된 제물을 바치지 않아서였어요. 가장 적절한 제물이 6개월이 지나지 않은 아기…….”
“자, 아이작.”
이솔데는 아이작에게 다가가 푹 끌어안았다.
“일단 진정하고, 숨 크게 들이마시세요.”
“후우.”
“다시 길게 내뱉고, 들이마시고…… 하늘도 한번 보고. 여기, 양지바른 곳으로 와서 볕도 좀 쬐세요. 자.”
아이작은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했다. 그렇게 이솔데가 그의 등을 가볍게 쓸어주자 메스껍던 속이 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름 없는 혼돈의 개입은 그의 지나친 감정적 동요를 억제한다. 그가 이 세상을 게임처럼 느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이름 없는 혼돈과 관련된 악덕의 역사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과 관련 있는 이상 남의 일처럼 볼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음, 진정됐습니다. 이솔데. 이런 걸 잘하시는군요?”
“이단심문관으로 일하다 보면 별꼴을 다 보거든요.”
아이작은 쓰게 웃는 이솔데의 모습을 보면서 정작 그녀는 자료집을 그다지 놀랍지 않다는 듯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런 자료를 찾아내고 태워 버리거나 당사자들을 제거하는 일을 해왔다. 아이작보다 훨씬 내성이 높은 것은 당연했다.
“아이작이야말로 이런 걸로 놀랄 줄은 몰랐는데요.”
아이작은 말없이 왼손을 들여다보았다.
“이것도 제가 받을 시험 중 하나인 모양입니다. 과연 제가 앞서서 사람들을 구한답시고 돌아다닐 그런 존재인가 싶더군요.”
이솔데는 가만히 아이작을 바라보다가 자료집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이건 태워버리는 것이 낫겠네요.”
이솔데의 말에 아이작은 화들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아니, 그럴 것까지는.”
“이건 그저 기록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사악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자료라면, 이걸 이용해서 의식을 치르거나 기적을 연구할 필요도 없지요. 광인의 마음에 몰입하거나 공감할 필요는 없어요. 아이작은 이런 게 없어도 스스로 맡은 바 임무를 잘하고 있지 않았나요?”
아이작은 할 말을 잊었다.
그녀의 말대로 과거 이름 없는 혼돈의 교단원들이 무슨 짓을 했건, 그들은 이미 전부 지옥에 떨어져 허우적대고 있다. 가끔 몇 놈이 기어올라 헛소리를 지껄이기는 해도 그것은 광인의 의미 없는 혼잣말이다. 아이작이 대답해 줄 필요도 없다.
모든 과거는 지나간다.
현재를 사는 아이작이 지나간 우르반수스에 압박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만약 그들을 미워하고 증오해서 비슷한 자들을 죽이는 데 매진하게 된다면, 아이작 스스로의 인생도 일그러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아이작이 할 일은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 거예요. 지금도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고,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그렇죠?”
“……맞습니다.”
아이작은 길게 한숨을 내뱉고 스스로의 뺨을 철썩 때렸다.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과거의 이름 없는 혼돈과 지금의 촉수를 완전히 구분할 수 없어서 생긴 일이었다. 실패했을 때의 공포를 완전히 잊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만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것만큼은 자각했다.
아이작이 정신을 차린 것 같자 이솔데는 자료를 돌려주었다. 그는 다시 자료집을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것 같습니다.”
“어디로요?”
“이사크레아 영지로. 그러나 그 전에 들를 곳이 있습니다. 이솔데, 안젤라와 함께 먼저 영지로 가주실 수 있을까요? 저도 금방 뒤따라가겠습니다.”
***
이름 없는 혼돈에 관련된 자료들이 지하 묘역의 부장품 사이에서 발견된 건 사실이지만, 대다수는 아니다. 왕후의 무덤이 아닌 이상, 관 속에 품고 가는 물건이 귀한 물건일 리가 없다. 도굴당할 위험도 있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더 가치 있게 쓸 수도 있으니까.
사실 클레르가 입수한 자료나 도구들은 대부분 카밀이 몰래 발견되게끔 숨겨놓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교단 검열청과 카밀이 가진 이 귀한 자료들의 출처는 어디였을까?
아이작은 게임상의 지식과 카밀의 자료를 조합해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넬을 타고 날아가고 있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어지럽게 흐트러뜨렸다.
아이작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넬이 하늘을 가르면서 만들어 내는 바람을 만끽했다. 예상대로 넬은 썩 괜찮은 탈것이었다. 아이작과 적극적으로 교감이 가능한 덕분에 말보다도 조종이 쉬운 데다, 반투명한 몸은 하늘에서도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는 헤사벨이 붉은 날개를 펼치고 함께 날고 있었다. 그녀는 하늘을 나는 것이 아직 어색했지만 몇 번 뒤처질 때마다 붉은 안개가 되어 날아오면서 그럭저럭 따라왔다. 그녀는 아이작으로부터 목적지를 듣고 의아한 듯 물었다.
“바엘바덴이요? 거기 맞아요?”
“어딘지 아나?”
“알죠. 제국의 유명한 온천 관광지잖아요. 대충 20년 전쯤에 몰락했다고 들었지만…….”
바엘바덴은 울텐하임과 이사크레아 영지 중간쯤에 위치한 곳이었다. 길을 따라가면 조금 돌아가야 하지만, 날아가는 덕분에 시간 소모 없이 바로 갈 수 있었다.
원래 부호나 귀족들이 찾던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방종과 퇴폐를 이유로 빛의 법전 교단이 철퇴를 내리면서 몰락하게 되었다고 했다.
“바덴 영주가 그때 어이가 없다 못해 화병으로 죽었다는 말도 있었어요. 거기 찾아오던 사람 중에는 교단 사제들도 있었으니까……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폐쇄한다길래 고위 사제가 거기서 성병이라도 옮았나 했죠.”
고위직들이 들락거리는 관광지를 음험하기 짝이 없는 붉은 성배 클럽이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곳에 얽힌 비밀은 아직 모르는 듯했다.
“거기 이름 없는 혼돈 교단의 유적지가 있다.”
“예?!”
제국의 수많은 고위직들과 사제들이 들락거리던 관광지에 역사상 제일 악명 높은 사교도 집단의 유적이 있다는 말에 헤사벨이 경악했다.
아이작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방종이니 퇴폐니 하는 말들은 전부 헛소리고, 유적지를 폐쇄하고 발굴하기 위해 수작을 부린 거야.”
“그냥 사악한 유적지가 발견됐다고 선언하고 불태워 버리면 되지 왜 그런 귀찮은 짓을?”
“아마 바로 태워버리기 아까운 것들이 있는 모양이지. 아니면 고위 사제 중 누군가가 겸사겸사 별장 삼고 싶었거나.”
아이작은 코웃음 치며 중얼거렸다.
“검열청이 제대로 일을 안 하고 있다면 신성한 성배기사로서 내가 대신 일해 줘야지.”
***
펄럭. 넬을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바엘바덴 인근의 산자락에 내려섰다. 제법 거리가 있는 곳임에도 온천 특유의 유황 냄새가 풍겨 왔다. 아이작은 어깨에 콧등을 비비는 넬의 머리를 스다듬으며 지시했다.
“여기 머물면서 주변을 살펴라. 사람은 잡아먹지 말고.”
넬은 모호한 긍정의 의사를 표현했다. 헤사벨은 코웃음 치면서 말했다.
“배불러서 아마 요리해서 내놔도 안 먹을 거예요.”
“그 사이 서로 식습관도 파악했나 보지?”
“뭐…… 저는 흡혈만 하면 되니까요. 닭고기를 먹을 때 누군 다리를 좋아하고 누군 가슴살을 좋아하는 거랑 비슷한 거죠.”
그사이 제법 사이좋게 음식도 나눠 먹은 모양이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그동안 사람이 아니라 동물만 사냥해서 잡아먹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잡아먹어도 괜찮을 만큼 나쁜 놈이 자주 나오는 것은 아니니까…….
아마도.
***
아이작과 헤사벨은 밤이 될 무렵 바엘바덴에 잠입했다.
과거의 영광을 잃고 몰락한 관광지는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한 유적지 같았다.
한때 황제가 거하기도 했다는 거대한 숙소는 여전히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중앙의 욕탕에서 넘쳐흐른 물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며 강물을 이뤘다.
벽마다 청소되지 않은 유황 덩어리들이 종양처럼 자리 잡고 있었지만, 수많은 귀족들이 드나들었던 곳답게 길 자체는 여전히 잘 닦여 있었다.
“아직 쓸만한 시설 같은데 사람만 없으니 이상하네요.”
아직도 빛의 법전 기적들로 불야성을 이뤄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지만 정작 인간이 없자 되려 기괴한 느낌만 더 강해졌다. 사람이 있다고 해 봐야 폐쇄된 이곳에 불청객이 찾아오는 것을 막는 성기사나 사제들뿐일 것이다.
“누구냐!”
예를 들면 저 눈앞에 있는 성실한 성기사처럼.
성기사는 교단의 이름으로 엄격하게 폐쇄된 이 타락과 방종의 성역에 감히 침범한 자를 단숨에 베어 버리겠다는 듯 칼부터 뽑아 들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미 넬이 날아오는 동안 배 아래로 길목마다 삼엄한 경비가 서 있는 것을 봤기 때문에 성기사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장 정체를 드러내라. 모가지가 아직 붙어있는 동안에…….”
“지나가던 성배기사.”
아이작은 성기사를 향해 뻔뻔하게 대답했다.
성기사는 잠시 알아듣지 못한 듯 가만히 서 있다가 당황하며 투구를 올렸다.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자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아, 아이작 이사크레아 경? 부활의 성자님이 맞으십니까? 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시비를 걸 준비를 하고 있던 아이작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의아해했다.
“응? 저 아십니까?”
그러자 성기사는 아예 투구를 벗었다.
여전히 아이작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성기사가 답답한 듯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접니다. 브리엔트 성기사단의 이안! 예전에 아리엣 수도원 인근에서 대련도 한 적 있지 않습니까?”
“아아…… 그 훌륭한…… 어린 성기사.”
아이작은 ‘내 미모에 반해 넋을 놓았던 한심한 성기사’라는 말을 삼키고 사회성 있는 단어를 골랐다. 물론 이안은 아이작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어린 성기사’라는 표현에 의아해했지만, 사회적 격차는 그보다 더 커졌기 때문에 그럭저럭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음, 이곳의 경계 태세가 제대로 이루어지는지 불시 점검차 왔습니다.”
헤사벨은 눈 깜빡 안 하고 성기사에게 거짓말을 하는 아이작을 보고 감탄했다.
‘그런 허점투성이 거짓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
확실히 이안은 불시 점검이라는 말에 뭔가 위화감을 느꼈지만,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왜냐면 상대는 자신과 개인적인 인연도 있는 그 유명한 성배기사였으니까.
네필림의 압도적인 매력은 개인적인 인연을 지렛대 삼아 말도 안 되는 신뢰성을 심어주었다.
“그런데 이안 경은 무슨 일로 여기에 있지요? 설마 브리엔트 성기사단이 이곳을 경비하는 중입니까?”
“아아, 예.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로튼해머 단장님도 지금 이곳에 머물고 계십니다.”
아이작은 미소 지었다. 어쩌면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