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45)
245화. 불경한 존재들 (3)
로튼해머의 기대대로, 아이작은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싸우는 방식은 로튼해머의 생각과 조금 달랐다.
‘칼로 저런 놈을 썰어 버리는 건 의미가 없겠지.’
그래도 울텐하임에서 봤던 기도하는 백목은 어느 정도 인간미가 있었는데, 지금은 생명체라기보다 구조물이라고 봐야 할 정도의 규모가 되어 있었다. 여전히 신경과 근육이 꿈틀거리는 촉수기는 하나, 아이작이 칼로 몇 번 잘라낸다고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더군다나 저 ‘문’ 너머에 아직도 얼마나 거대한 몸체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래서 아이작은 문을 닫아 버리기로 했다.
‘헤사벨, 내 주변에 아무도 못 오게 보호해라.’
‘네.’
아이작은 제단 중앙의 자리에 아예 털고 앉았다. 촉수 벼룩과 다리가 기형적으로 긴 다면거미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아이작이 칼을 들 것도 없이 갑자기 몰아닥친 붉은 깃털의 폭풍이 일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퍼퍼퍼퍽! 붉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헤사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커다란 날개를 펼쳐 아이작을 보호하고 그가 치를 의식의 방해꾼들을 가차 없이 제거했다.
‘새삼…… 이 녀석한테 등을 맡길 수 있을 정도가 됐군.’
헤사벨이 배신할 기미가 보이면 머리에 벌레를 박아 놓고 터뜨리겠다느니 하는 흉흉한 생각을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지금부터 아이작은 그가 열어젖힌 문을 다시 닫는 의식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동안 아이작이 쇠약해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만약 헤사벨이 배신한다면 그 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만약 헤사벨이 자신을 배신한다면 가슴 아픈 일이겠지만, 아이작은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이작은 기도하는 백목을 노려보며 이름 없는 벌레의 책을 펼쳤다.
경전에는 지금도 무언가 쉴 새 없이 글자가 갱신되고 있었다. 아이작이 자신을 참칭하는 무지한 자들을 어떤 식으로 훈육했는지, 제 주인을 몰라보는 권속을 어떻게 벌하는지.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은 책이 눈앞에서 작성되는 것을 보는 것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아이작은 자신이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는 내용마저 적히는 것을 보며 무슨 생각도 맘대로 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집중.’
아이작은 손바닥으로 책을 쓸어 넘겼다. 지금부터 이 책의 집필은 아이작이 맡는다.
이름 없는 혼돈에는 사실 의식이랄 게 없다.
모든 이름이, 의식이, 기적이 잊히고 풍화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 있는 의식들은 과거의 편린을 모아 만든 조잡한 잔재에 불과하다.
진짜 의식은 단 하나뿐이다.
아이작이 읽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
그 행적이 우르반수스에 새겨지고 재현해 낼 수 있는 의식이 된다.
아이작의 손끝을 따라 이름 없는 벌레의 책에 글귀가 새겨졌다.
[……성자 아이작은 준엄하게 열린 문을 닫으라 명했다. 바깥의 스산한 바람에 혹해 문밖을 기웃거리던 불경한 존재가 문이 닫힘과 동시에 목이 베여 바닥에 떨어지니…….]콰드드드드득!
굉음과 함께 지하 신전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괴이한 굉음이 바엘바덴 전역을 크게 진동시켰다. 기도하는 백목이 토해 내는 비명이었다.
엄청난 비명에 주변에 있던 벼룩들이 견디지 못하고 퍽퍽 터져나갔다.
헤사벨마저 휘청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기도하는 백목이 뻗어 나온 절벽에서 선혈이 홍수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악. 흘러나온 피가 파도처럼 밀려와 헤사벨의 발목을, 앉아 있는 아이작의 경전과 옷을 흥건하게 적셨다.
하지만 아이작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저 책을 들여다보았다.
이름 없는 벌레의 책은 밀려오는 핏물을 벌컥벌컥 빨아들이며 선명한 보랏빛으로 글귀들을 써 내려갔다.
콰드드득, 콰득!
그러나 기도하는 백목의 저항이 적지 않은 건지, 문은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절반쯤 베인 몸통을 뒤틀어 문을 다시 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중이었다.
뿜어져 나온 핏물이 홍수를 이루자, 기도하는 백목도 달에 대한 경배를 멈추고 아이작을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기도하는 백목의 촉수 중간에 종양이 부풀어 오르면서 카밀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는 인간의 얼굴이라 상상하기 힘든, 분노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향해 알 수 없는 고함을 쳤다.
그러나 아이작은 그 말을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이미 그의 의식은 아득한 어딘가에 가 있었다.
***
아이작은 숲 한복판에 앉아 있었다.
온통 새하얀 모래 백사장 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채 새카맣게 말라 있었다. 그 나무들 중 유독 한 그루가 눈에 띄었다. 다른 나무와 달리 아직 생명력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완전히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아이작은 어째선지 그것이 카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제야 아이작은 주변에 보이는 나무들 한 그루 한 그루 전부가 기도하는 백목과 같은, 수백에서 수천 미터에 이르는 촉수들이 메마른 형상으로 굳어 버린 것들임을 깨달았다.
[너는 대체 뭐냐.]분노하고, 증오하고, 살의를 드러낼 줄 알았던 카밀은 그 메마른 숲 한가운데서 우두커니 서 흐느끼고 있었다.
[뭐 하는 놈이길래 대체…… 나를 이런 지옥에 떨어뜨린 거냐.]카밀은 아이작을 탓하고 있었다.
성스러운 빛의 법전 교단에서, 손가락에 꼽히던 추기경이었던 자신을 이런 끔찍한 곳에 떨어뜨린 아이작을 원망하고 있었다. 죽더라도 천국이 보장되어 있던 그녀를 몰락시킨 것이 아이작이라며 흐느끼고 있었다.
“이 지옥은 네가 만든 거다, 카밀.”
아이작은 카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곳이야말로 네게 가장 어울리는 사후세계다.”
아이작은 카밀이 죽었을 때 그녀의 죽음을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경쟁하던 주교들은 빈 추기경 자리를 노렸고, 교단은 새로운 톱니바퀴를 찾았다. 클레르도 자기 할머니의 진실을 알면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네리아가 조금 추모하는 것 같았는데, 그렇다면 카밀에게 어울리는 저승은 이곳뿐이다.
아이작의 대답은 카밀에게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다가, 가지 같은 손들을 아이작을 향해 일제히 휘둘렀다.
아이작은 경전의 책장을 넘겼다.
새하얀 백지가 드러나자 카밀의 손가락들이 나선형으로 부러지고 휘어졌다. 기괴한 비틀림은 팔을 타고 전염되면서 그의 온몸을 배배 꼬다가 터뜨려 버렸다. 그 현상에는 아무런 논리가 없었다.
단지 책에 그렇게 쓰였기에 이루어졌을 뿐이다.
이름 없는 혼돈이 책을 집필하고 있었고, 카밀은 책의 등장인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개연성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카밀의 분노는 찢어지고 터져나간 몸으로도 아이작을 휘감았다. 그녀는 자신의 분풀이를, 아이작의 죽음을 원했다. 왜냐하면 성자에게는 시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비록 하찮지만 시련으로 선택된 존재였다.
성자가 앞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한.
이름 없는 혼돈은 집필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다. 지금부터는 의지와 깨달음의 싸움이다.
혹은…… 성자가 새로운 가치를 깨닫게 되는 계기이거나.
[가아아아아악!]카밀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끝이 갑작스러운 화염에 휩싸이고 있었다. 불길은 삽시간에 그녀의 몸을 살라 먹으며 번져갔다. 그뿐만이 아니라 구석구석 패고 으스러지고 있었다.
아이작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조력자들이 해낸 일이었다.
***
“불이다! 전부 불을 질러라!”
“생명체 같아서 걱정했는데 잘 탑니다, 단장님!”
로튼해머와 그의 성기사들은 기도하는 백목의 몸 곳곳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무기를 감싸는 성화의 불꽃은 성기사들에게 기초적인 기적 중 하나다. 카밀의 몸은 그 성화의 불꽃을 메마른 장작처럼 흡수하며 타올랐다. 나무라는 호칭이 괜히 붙은 게 아닌 것 같았다.
넬이 가끔 뿜어내는 벼락은 기도하는 백목에 긴 불꽃의 상처를 남기면서 타올랐다.
넬도 이 대화재가 만족스러워 보였다.
다만 기도하는 백목의 크기가 워낙에 크다 보니, 불꽃이 수백 미터에 이르면서 성기사들도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 번졌다. 이대로 불타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화재를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화재 걱정은 말고 태워버려라! 어차피 여긴 온천 마을이라 물도 많아! 그리고 이 괴물 놈을 상대하는 것보다 불을 끄는 게 차라리 낫다.”
솔직히 그건 성기사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기꺼이 불을 질렀다. 타오르는 불꽃에 기도하는 백목을 타고 오르던 벼룩들도 타죽고, 나이트 스토커들도 열기를 감당 못 해 휘청거렸다. 그나마 남아있던 놈들도 넬에게 붙잡혀 뜯어먹히기 일쑤였다.
“탄 자리부터 가차 없이 베어내라!”
쾅! 로튼해머가 새카맣게 탄 부위를 망치로 후려치자 대량의 파편이 뭉텅이로 날아갔다. 나무 베기에 적당한 무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른 성기사들이 휘둘러대는 칼이나 도끼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을 박살 내고 있었다.
타들어 간 부위는 촉수만큼 질기지도 단단하지도 않아서 잘라내는 것은 손쉬웠다. 물론 직경 10미터가 넘는 건축물에 가까운 촉수를 베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차근차근 확실하게 기도하는 백목을 잘라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활약은 꾸준히 어딘가에 충격을 누적시키고 있었다.
***
브리엔트 성기사단이 가한 공격은 기도하는 백목에게 타격을 주긴 했지만,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이작이 우르반수스에서 문을 닫아 몸통이 동강 나는 사태가 훨씬 더 위험했다.
단지 치명상일 뿐만 아니라, 아직 저 너머에 있는 본체의 힘이 끊어지면 그때부터는 말라 죽는 길밖에 남지 않을 테니까.
때문에 카밀은 아이작에게 더 집중하려 했다. 그러나 브리엔트 성기사단의 공격과 넬의 브레스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
[아아아아아!]그녀는 더 많은 벌레들을 풀어 방해꾼들을 제압하려 했다. 동시에, 아이작의 본체를 향해서도 더 많은 괴물들을 배출해 냈다. 달팽이와 사마귀가 융합된 듯한 괴물이 촉수의 살갗을 가르고 기어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강력한 경호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늘 아이작과 다녀서 그렇지, 헤사벨은 이미 왈라이카의 귀족들 가운데서도 손꼽힐 만한 강자였다. 그리고 그녀의 힘이 기반이 되는 피는 지금 사방 천지에 홍수라도 난 것처럼 고여있었다.
괴물들이 달려오자, 헤사벨은 아이작에게 더러운 피가 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날개로 그의 얼굴과 몸을 감쌌다. 그리곤 섬뜩한 미소를 드러내며 손뼉을 쳤다.
짝 소리와 함께 바닥에 고여 있던 피들이 머리통만 한 크기로 역류하듯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일제히 온 사방을 향해 폭발했다. 하나하나에 발리스타 같은 위력이 담겨 있었다.
선혈의 화살은 괴물의 피부에 박히자마자 다시 또 한 번 피를 흠뻑 머금으면서 폭발했다.
“흥.”
몰래 우회한 달팽이 사마귀 하나가 촉수 같은 몸통으로 헤사벨을 감싸려 했다. 하지만 헤사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숨에 놈의 턱 밑에 손바닥을 박아 넣고는, 그 안으로 아이작이 그녀에게 부여한 기적─촉수를 밀어 넣었다. 단번에 사마귀의 몸통 안을 꿰뚫고 장악한 헤사벨은 순식간에 그 안의 체액을 빨아들였다.
마지막 사마귀가 체액 한 방울 남기지 못한 채 바스라졌다. 나머지는 체구가 작아 간신히 살아남은 벼룩 떼뿐이었다. 놈들은 이제 해자나 다름없는 피 웅덩이에 발을 디딜 때마다 녹아내리듯 죽어 나가 아이작에게 접근조차 못 하고 있었다.
안전이 확보되자 헤사벨은 허리를 숙여 의식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드득, 드드득, 드드드득!
땅이 경련하고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중단되었던 의식이 재개되면서 문이 다시 닫히고 있었다. 카밀은 아이작에게 고함치고 비명 지르고 호소하고 흐느끼며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녀의 역할은 여기서 끝이었다.
콰득, 콰직, 까드드득…….
살과 뼈가 짓이겨지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도하는 백목이 몸부림쳤으나 그것은 죽어가는 생물의 의미 없는 경련에 지나지 않았다. 이내 굉음이 뚝 끊어진 순간, 기도하는 백목의 거체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혼돈의 포상이 주어졌습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혼돈의 자손’ 능력을 강화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