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48)
248화. 밑그림 (1)
‘카밀의 뒤처리를 하려고 했을 뿐인데 별 우연이 다 있군.’
아이작이 이 신전을 들른 것은 우연과 충동이 만들어 낸 흐름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계속 이름 없는 혼돈의 길을 걷는다면 언제고 이곳에 방문하게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이작이 자신의 기원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다만 이 육신이 태어난 배경이 단순히 금지된 사랑이나 육욕 같은 저차원적인 욕망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는 추측을 얻었을 뿐이다.
탄생에 이유가 있다면 살아가는 방향에도 목적지가 있을 것이다.
아이작은 그걸 알아내야 했다.
***
아이작은 넬을 타고 빠르게 이사크레아 영지로 이동했다.
넬의 빠른 속도 덕분에 한나절도 걸리지 않아 이사크레아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바로 착륙하는 대신 날아다니며 영지를 대강 둘러보았다.
먼 거리에서 내려다본 풍경이지만 영지의 모습은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길은 확실하게 넓게 정돈되었고, 오가는 행인의 숫자도 적지 않아 보였다. 땅도 꽤 개간되어 밀과 감자를 경작 중이었고, 집과 수로의 숫자도 늘어났다.
‘카일이 잘하고 있군.’
멀쩡했을 때의 머리통보다 벌레에게 뇌를 잡아먹힌 이후가 더 낫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지만 애초에 이사크레아 영지는 이만큼 발전할 잠재력을 품고 있었다.
전임 영주가 배교와 반역을 동시에 저지를 작정으로 일부러 고립시켜서 그렇지, 길만 잘 닦으면 나름 교통의 요지였다. 황금우상 상단의 쇠르 지부장, 캐틀린이 괜히 발 벗고 달려온 게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북부의 노르덴 항을 통해서 엘릴 왕국과 아를 동맹의 물자가 오가고 있을 테니 황금우상 상단도 눈여겨볼 만한 위치다.
아이작은 넬의 날개를 펄럭이다가 서서히 수도원 한가운데 착지시켰다. 사람들이 놀라긴 하겠지만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에서만큼은 차차 적응시켜야 했다.
무엇보다 아이작은 자신을, 아니, 이곳에 퍼져 있을 자신의 평판을 믿었다.
“영주님! 아니, 수도원장님!”
“성배기사님!”
“부활의 성자님께서 오셨다!”
곧바로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환호와 외침에 아이작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호칭부터 좀 통일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안뜰에는 이미 캐틀린을 비롯해 대장장이 울스텐, 경비대장인 자클렛이 와있었다. 아이작이 온다는 것을 의지를 전해 들은 카일이 영지의 주요 인사들을 부른 것이다.
아이작은 그들에게 듣거나 전할 이야기가 많았다.
사람들은 수도원 중앙에 착지한 드래곤을 보고 놀란 눈치였지만, 그 위에 타고 있는 것이 아이작이었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대신 신기한 듯 다가갔다. 그 중 자클렛이 넬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뻗으려고 하자 아이작이 제지했다.
“만지지 마라. 아직 식성을 교정하지 않았으니까.”
“예? 사람을 잡아먹습니까?”
“정확히는 편식하지 않는다고 해야지.”
어린아이에게는 모범적인 습관이겠으나, 식재료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통 곤란한 습관이 아니었다. 자신이 드래곤 취향인지 확인하고 싶지 않은 자클렛은 손을 서둘러 회수했다.
“들려오는 소문이 굉장하더군요. 성배기사님.”
캐틀린은 상인답게 현명했다. 그녀는 넬로부터 열 발자국쯤 떨어진 채 말을 해서 아이작이 듣기 어려웠다.
“이곳까지 소문이 많이 퍼졌나?”
“당연하지요. 이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이작이 제국을 비롯해 엘릴 왕국까지 건너가면서 보여 준 행보는 당연하게도 이곳까지 퍼져 있었다. 이곳을 비롯해 렌하임, 쇠르, 노르덴에 이르기까지 아이작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소문을 들을 때마다 이사크레아 영지의 주민들은 뿌듯해하고 자신이 성배기사가 통치하는 영지의 주민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내가 성배기사님이 붉은 성배의 천사를 퇴치하는 것도 봤고, 함께 불사 교단의 언데드들을 물리친 적도 있다고!’
충분히 자랑스러워하고도 남을만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과장된 소문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사크레아 영지까지 퍼지면서 조금 축약된 감도 없지 않았다.
애초에 바다에서 소금 의회의 천사를 죽이고, 브란트 공작가의 사위가 되었으며, 혼돈의 마수로부터 황제를 구출하고, 엘릴 왕국에서 반란을 진압한 뒤 신과 담판까지 짓고 왔다는 이야기 자체가 과장할 여지를 주기 힘들었다.
오히려 아이작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그의 소박하고 겸손한 면모를 알고 있는 주민들은 ‘물론 내가 영주님을 존경하긴 하지만 그건 너무 과장된 거 아닌가?’ 하는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저 역시 이사크레아 지부장으로서 역시 성배기사님께서 약속을 지켜주신 것에 대해 아주 기뻐하고 있구요.”
“아…… 아직 엘릴 왕국뿐이지만 말이지.”
아이작은 그녀에게 엘릴 왕국과 세상의 화로와의 교역로를 터주기로 약속했다. 그가 해낸 것은 엘릴 왕국과의 교역뿐이지만, 어차피 소금 의회가 교역로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약속을 지킨 셈이었다.
아이작은 시선을 돌려 땅딸막한 드워프에게로 향했다.
“울스텐, 화로장인. 건강히 지낸 것 같아 다행이군요. 타향에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별말을. 이곳 자체가 원래 광산 마을이라 그런 건지 날씨 빼고는 그냥 고향 같소. 그건 그렇고 남겨둔 재료들로 몇 가지 뚝딱거려 보다가 흥미로운 걸 발견했는데…….”
아이작은 화로장인이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이야기에 호기심을 가졌다. 하지만 아이작의 호기심은 금방 충족될 수 없었다.
울스텐이 바로 대답하는 대신 어딘가를 향해 슬쩍 눈짓을 줬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그가 바로 말할 수 없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수도원 입구 쪽에 화려한 복장을 입은 뚱뚱한 사제와 웬 비루한 차림새의 바짝 마른 수도승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울스텐이 이곳에서 뭘 가지고 뚝딱거리는지 아는 아이작은 그의 침묵을 이해했다.
***
들을 이야기도 해야 할 이야기도 많았지만 아이작은 일단 그 모든 것을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빛의 법전 교단의 사제들이 찾아온 이유를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바엘바덴을 박살 내고 오긴 했지만, 그건 아직 소식이 퍼지기엔 너무 일렀다.
아이작은 사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예배당으로 향했다. 그곳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뚱땡이와 비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려고 했지만 영주 대행을 맡고 있는 카일이 곁에 다가와 속삭였다.
“렌하임 성당의 라마리에 주교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방랑승입니다.”
카일은 그러면서 정보를 덧붙였다.
“처음에는 라마리에 주교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봐도 라마리에 주교가 방랑승을 보좌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편의에 대해 일일이 신경 쓰고 의사를 묻더군요.”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듣지 않아도 아이작은 방랑승에게서 강력한 힘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천사의 힘은 아니지만 천사의 향기 정도는 난다고 해야 할까. 무시하기 힘든 존재감이었다.
“아이작 이사크레아. 이름 높은 성배기사를 뵙습니다.”
역시나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건 것은 호르헬이었다. 라마리에 주교는 겸손하게 뒤에서 손을 모아쥐고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으로 그들의 권력 관계를 알 수 있었다.
라마리에 주교는 정말로 방랑승을 보좌, 아니 시중들러 온 것에 불과했다. 대체 이 거지 같은 꼴의 방랑승이 뭐길래 대도시인 렌하임 성당의 주교를 부려 먹는지 알 수 없었다.
“부족한 이름을 기억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혹시 성함이……?”
“기억할 가치가 없는 이름이니, 호르헬이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이작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최대한 동요를 숨기며 처음 들은 척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에게는 칼센만큼이나 유명한 이름이었으니까.
‘설마 교황 대리인이 찾아올 줄이야.’
교황 대리인 호르헬.
게임상으로는 거의 중반부 이후에나 모습을 드러내는 교황의 비밀임무 수행 요원이었다. 교황 대리인이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발휘할 수 있는 기적 역시도 교황에 비견될 정도다.
즉, 천사와 직접 대면하고 소환하거나 힘을 빌릴 수 있을 정도의 능력자라는 뜻이다.
성좌에 앉아 거만 떠는 교황과 달리, 호르헬은 음지에서 양지에서 바쁘게 활약하기 때문에 전투력만 놓고 본다면 교황보다 더 강력할 수도 있다.
라마리에 주교의 옷차림은 주교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화려한 차림새였다. 후안도 저 정도로 화려하게 입지는 않았었다. 그에 비하면 호르헬은 아리엣 수도원에서 고아들을 돌보던 수도사에 비할 정도로 검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가 천사를 소환해 적 수천 명을 단숨에 불태워 버리는 모습을 보면 권위란 복장이 아닌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호르헬 형제님, 부족함이 많은 곳이지만 부디 편하게 머물러주십시오. 혹시 순례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가능한 협조하겠습니다.”
아이작은 최대한 예의 바르게 들리길 바라며 말했다. 비굴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오늘 호르헬을 처음 보았으니 너무 과하게 예의를 차리면 불면 더 이상해 보일 터였다.
‘이렇게 긴장되는 상대도 제법 오랜만이군.’
호르헬은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뇨. 성배기사님을 뵈러 온 것이니 더 머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순례행에 필요한 물건도 튼튼한 지팡이 하나와 질긴 옷 한 벌이면 충분하지요.”
‘그야 기적 한방이면 죽은 사람도 되살리는 사제라면 그렇겠지.’
아이작은 속으로 그렇게 비아냥댔지만, 실제론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허울뿐인 명성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제게 듣고 싶으신 말씀이라도?”
아이작은 예의보다는 빨리 이 위험한 인간이 용건을 마치고 꺼져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대화를 진전시켰다. 다행히 호르헬은 그의 의사대로 따라주었다.
“아이작 형제의 행보는 대단히 흥미롭더군요. 천사를 무찌르고 괴물들을 퇴치하며 이교도들의 공포가 되어가는 모습이 제가 보기에도 대단히 통쾌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득 형제만큼 대단한 영웅이 한 명 생각나더군요.”
“아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과장된 소문이 많습니다. 감히 선배님들께 비할 바가 아닙니다.”
“들어보십시오. 정말 아이작 형제의 행보를 빼닮은 훌륭한 영웅이었습니다. 교단에서는 그를 성자로 추대하고, 빛의 법전께서는 그에게 이름을 지어줄 준비까지 하셨었지요.”
이름 지어준다는 말은 명천사로 임명한다는 뜻이다.
아이작은 그런 대단한 영웅이 있었나 하다가 오월의 검을 떠올렸다. 성 아르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했지만, 그의 말이 과거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호르헬은 완전히 엉뚱한 이름을 꺼냈다.
“칼센 밀터라고 혹시 들어보셨는지?”
***
아이작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잃어버린 칼센 밀터요? 지금 제 뱃속에 있습니다만.’ 하고 말할 수는 없었다.
대체 배교자로 낙인 찍히고 기록말소형을 당한 칼센을 영웅이라고 부르며 자신과 비교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날 엿 먹이려는 건가?’
아이작은 침착하려 애쓰며 동요를 숨겼다.
“교단을 배신한 배교자 아닙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그가 배교하기 전까지는 위대한 영웅이었던 것도 사실이지요. 그의 배교는 교단을 비롯해 수천만 신도들의 뼈 아픈 슬픔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의 실종과 동시에 새로운 희망이 이렇게 나타났지요.”
호르헬은 갑자기 덥석 아이작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눈을 감고 고개 숙인 채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정말 기쁘고 복된 일입니다. 가장 뼈아픈 배교는 가장 신실한 신자가 하는 법이라지만, 악의 진창 속에서도 빛나는 별을 발견할 수 있나니. 아이작 형제가 천년 왕국의 도래를 앞두고 이렇게 큰 영웅이 되어 빛의 기수가 되어주셨지요.”
아이작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길래 자신을 이렇게 띄워주는 건가 하며 얼떨떨해졌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적어도 ‘네 놈 정체를 알았으니 껍질을 벗겨서 촉수 좀 봐야겠다’라고 말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긴장을 늦추려던 찰나, 호르헬이 그의 팔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등대지기께서 당신에게 예비된 이름이 있다 전하라 하셨습니다.”
예비된 이름?
아이작은 그 말의 뜻을 잠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충격은 느리게, 하지만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찾아왔다.
“……제게 이름이 주어질 것이란 뜻이십니까?”
아이작에게 붙은 수많은 호칭 중에 이제 하나가 더 추가될 참이었다.
아이작 이사크레아, 예비 명천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