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49)
249화. 밑그림 (2)
이 세계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명예와 지위는 무엇인가.
아이작이 살던 세계에서는 영웅적인 위업을 세우면 여체화 되어서 게임에 나오지만, 이 세계에서는 신에 의해 이름 지어진 천사가 된다.
새로운 이름을 받아 새롭게 탄생하는 것. 그것이 명천사,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다.
‘감히 신에 범접하겠다는 생각만 안 한다면 말이지.’
아홉 신앙 중 천사에게 배신당한 신은 있어도 실각당한 신은 없으므로 제외하자.
어쨌든 아이작은 그 어마어마한 지위가 자신에게 주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래도 되는 건가?’라는 것이었다.
아이작의 살갗 아래에 피와 뼈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이미 등대지기도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아이작은 네필림이다. 네필림을 낳은 천사는 반드시 타천사가 되는, 부정할 수 없는 죄악의 증거물.
그런 악조건을 딛고도 명천사가 되는 것이 가능한가?
결론은 금방 나왔다.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다른 신의 권속에 속한 것?
배교를 저지르고 스스로 신이 되어 버린 천사도 있다.
멀쩡한 신앙을 버리고 다른 신앙으로 배교함으로써 천사의 지위를 얻어 낸 자도 있다.
아이작도 그럴 수 있었다.
네필림? 이미 붉은 성배와 무희라는 모범적인 예시가 존재한다. 천사가 아니라 신이긴 하지만, 네필림은 죄악의 증거물이지 죄악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게 처벌할 이유가 된다면 이미 아이작의 목은 달아나고도 남았다.
‘그래도 명천사라니.’
아이작이 생각에 빠져 대답하지 못하자 호르헬은 그가 충격받아서 그런 것으로 이해하고 미소 지었다.
실제로 아이작이 충격을 받긴 했다.
“놀라셨군요. 하기야, 저도 제 생전에 고지를 두 번이나 할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작은 호르헬의 말에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칼센에게도 호르헬 형제님이 전달하셨던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천사의 사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으니까요. 참으로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호르헬은 아이작의 안색을 살피고는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그런데 아이작 형제는 칼센만큼 기뻐하진 않는 것 같군요?”
아이작은 재빨리 태도를 고쳤다. 그는 서둘러 호르헬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예법대로 칼을 끌러 바닥에 내려놓았다.
“생각도 못 한 광명에 감히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경황이 없어 예의를 갖춰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영광스러운 일이나 제 허울뿐인 명성에 걸맞지 않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아이작은 빛의 법전에서 성공해 잘 먹고 잘살겠다고 생각했었다. 빛의 법전의 명천사가 되는 것이 예고되어 있다면, 확실히 살아생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냥 좋다고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공짜 점심은 없다. 후한 보상을 약속한다는 것은 혹독한 시련을 준비해 놓고 있다는 뜻이다. 때깔 좋다고 마냥 받아 들었다간 노예계약서에 서명하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르헬은 아이작이 겸양을 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는 건지 자세를 낮추고 칼을 다시 집어 아이작에게 건네주었다.
“자세를 바로 하십시오. 성배기사. 저는 고지를 전달할 뿐이지 천사가 아닙니다. 부담스럽다 생각하시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모든 것은 천사들께서 밝은 눈으로 굽어살피시고 내린 판단입니다.”
“하지만…….”
“아이작 형제처럼 젊은 나이에 위업을 달성한 영웅은 지금까지 얼마 없었습니다. 아니, 명천사로 예비되었던 칼센조차도 아이작 형제만큼 어린 나이에 위업을 달성하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위업을 쌓을 수 있겠습니까?”
“…….”
“그리고 등대지기께서 예비된 이름이 있다 하셨을 뿐, 아직 결정된 단계는 아닙니다. 이름은 당장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 지어지는 것이니까요. 그전까지 충분한 위업을 쌓는지 눈여겨보시겠다는 뜻이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이작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 말은 ‘지금까지 위업을 쌓은 만큼 부려 먹고, 죽을 때까지 부려 먹어 주마’라는 말로 들렸다. 실제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겸양을 가장한 거절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바로 코앞에서 아이작과 닮았다는 칼센의 예를 들은 참이다.
여기서 계속 거절했다간 ‘그러고 보니 칼센도 배교자가 되는 방식으로 명천사가 되는 영광을 거절했지. 혹시 너도 그런 거니?’하는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칼센, 이 개새끼.’
결국 아이작은 애꿎은 칼센을 욕하며 수락하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작이 쉽게 대답하지 못하자 호르헬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겸손이 아니라 정말 부담스러우신 것 같군요.”
아이작은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넙죽 물었다.
“제가 과연 명천사가 되기에 적합한 업적을 세웠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저는 나이도 어리고 타인에게 모범이 되기에도 부족합니다. 잘해봐야 무언가를 죽이고 베는 일밖에 모르는 칼잡이입니다. 그런 제가 빛의 법전의 질서를 전파할 수 있는 명천사에 어울릴까요?”
거절할 핑계를 댈 때만큼은 말이 청산유수였다. 하지만 아이작의 말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명천사들은 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상징하는 존재다.
빛의 법전에서 성기사 출신의 명천사는 오월의 검, 한 명뿐이다.
그마저도 그녀가 전투에서 세운 업적보다 성기사라는 직책을 만들고 성기사단 검술을 창안해 내면서 인정받은 대가였다.
‘칼센이 명천사가 될 뻔하긴 했지만 실패했고.’
호르헬은 아이작의 거절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며 말했다.
“아이작 형제의 겸손한 그 말은 오히려 아이작 형제가 명천사가 되어야 할 이유를 보여주는 것 같군요.”
‘제길, 명천사가 됐으니 돈 내놓으라고 삥이라도 뜯고 다녀야 하나?’
아이작은 피눈물을 삼키며 생각했다. 하지만 호르헬은 아이작에게 강요할 생각이 없다는 듯 그의 바로 앞에 마주 보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름 지어질 자격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 볼까요.”
“예?”
“명천사 말입니다. 왜 등대지기께서 당신을 천사로 만들려 하시는지, 감히 유추해 봅시다. 가장 가까운 예로 칼센이 있군요.”
호르헬은 허리를 숙이며 아이작에게 시선을 가까이 맞췄다.
“아이작 형제, 왜 칼센에게 이름이 주어지려 했던 것인지 알고 있습니까?”
***
아이작은 칼센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아는지 생각했다.
명예로운 성기사 칼센 밀터.
칼의 성자, 밀리샤르 성기사단의 단장, 해골 분쇄자, 수많은 적들의 피와 시체로 위업을 쌓아 올린 자. 그에게도 이름이 지어질 기회가 있었다. 호르헬이 찾아와서 지금처럼 영광된 고지를 받들라 했을 것이다.
칼센이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성기사였다면, 기뻐 눈물을 흘리든가 신을 한껏 찬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영광된 임무를 수행하다가 명천사가 되는 대신, 배교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왜?’
아이작은 오래전, 해방주교 알 두아자드가 자신의 영지에 쳐들어왔을 때 심문했던 일을 떠올렸다. 알 두아자드는 그때 이름 없는 혼돈이 복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칼센을, 새로운 아홉 번째 신앙으로 만들려 했다고 말했다.
칼센 역시 그것에 동의했기에 빛의 법전과 불사 교단의 합작이 이루어졌다.
그때는 그것이 칼센의 결정이었는지, 아니면 교단의 명령에 의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후자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명천사가 될 예정이었던 칼센은 그렇게 교단에 의해 배교자가 되고, 불사교단으로 내쫓긴 것이다.
어쨌든 그가 명천사로 예비된 적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슨 업적을 쌓아서 명천사로 예비되었을까?
“아이작 형제, 빛의 법전에 속한 명천사들에 대해 아십니까?”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빛의 법전에는 4명의 명천사가 있다.
“등대지기, 맹인 파수꾼, 오월의 검, 불타는 처녀.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원래 ‘등대지기’와 ‘맹인 파수꾼’ 사이에 ‘대장군’ 엘릴이 있었지만, 엘릴 분파라는 막장 사태로 뛰쳐나갔다. 그래서 그는 제외되었다. 어쩌면 다섯, 아니 여섯 번째 이름에 칼센이 올라갈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역시도 배교로 실패했고.
빛의 법전에 유달리 배교자가 많은 것은 아니다. 단지 세력이 크고 숫자가 많아서 그렇게 보일 뿐. 붉은 성배만 하더라도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제 발로 뛰쳐나와 도망치려 하지 않았던가.
“잘 알고 있군요. 원래 칼센에게는 ‘하얀 사냥꾼’이라는 이름이 주어질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이제 쓰일 일이 없게 되었지요.”
호르헬은 손가락들을 탁탁 순서대로 마주치며 중얼거렸다.
“칼센이 어떻게 명천사가 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아이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칼센은 전장에서 무수한 승리를 거두고 적들을 쓰러뜨렸다. 명실상부 백제국 최강의 존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지 그 이유로 명천사로 임명될 것 같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건 발트제메르도 마찬가지니까.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왜냐면 그가 이뤄낸 진정한 업적은 지워졌으니까요.”
“……지워졌다구요?”
“사실, 대략 20년 전쯤만 해도 빛의 법전에는 명천사가 한 명 더 있었습니다.”
아이작은 20년이라는 말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작이 그 명천사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 천사가 타천당했으며, 역사에서 지워지는 형벌을 당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작은 그 20년이라는 숫자에 기시감을 느꼈다.
“그 명천사는 심각한 죄를 저지르고 도주한 자였지요. 등대지기께서는 칼센을 통해 죄인을 찾아내고, 오월의 검, 그리고 불타는 처녀와 함께 그 명천사를 숙청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후 타천의 형벌이 이루어졌고 명천사는 역사에서 지워졌지요.”
천사가 둘이나 나섰음에도 칼센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은 아이작이 엘릴 왕국에 함께 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보였다. 어딘가에 입장해야 하는데 천사들끼리는 단독으로 불가능했거나, 칼센이 가지고 있는 능력, ‘파수자의 등대’가 필요했을 것이다.
“올빼미의 가르침에 대해 들으신 적 있지요?”
“예?”
갑작스러운 말에 아이작은 당황했다. 그는 카밀에 대한 추궁이 나오는 건 아닌가 싶어 긴장했지만, 호르헬이 꺼낸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숙청당한 명천사의 이름은 ‘흰올빼미’. 올빼미의 가르침을 만들어 낸 자였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역사에서 지워졌지만, 그녀가 남긴 지식과 흔적은 끈질기게 남았더군요.”
찌잉. 아이작은 귓가가 기이하게 울리는 이명을 느꼈다. 흰올빼미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그의 기억 속에 뭉개졌던 파편들이 되살아나면서 반복해 울려 퍼졌다.
엘릴의 우르반수스에서 들었던 기억이었다.
“빛의 법전에서 새롭게 명명된 천사, 흰올빼미가 크게 활약하는 것 같습니다. 우르반수스에서도 그녀의 움직임을 도저히 쫓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는…….”
아이작의 머릿속에 그 이름이 반복해서 울려 퍼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
호르헬은 아이작의 그런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이 어깨를 다독였다.
“이해합니다. 어디선가 그녀의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모양이군요. 지워진 지식이 복구되면 두통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도 몇 번이나 겪은 일이지요.”
하지만 아이작은 호르헬이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른 현상을 겪고 있었다.
흰올빼미, 20년, 알, 바엘바덴, 올빼미의 가르침.
일련의 단어들이 조합되면서 한가지 추측이 완성되었다.
‘혹시 흰올빼미라는 타천사가 내 생물학적 어머니인가?’
그렇다면 타천 당하고 지워진 것도 이해된다. 신들은 천사의 번식을 절대적으로 금지하고 있으니까. 올빼미의 가르침이라는 급진적 교리보다 그게 더 큰 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칼센과 오월의 검은 아이작 자신의 부모의 원수가 되는 셈이다.
‘칼센, 이 개자식. 그걸 숨기고 있었어?’
아이작은 이를 꽉 깨물며 가까스로 감정을 억눌렀다. 애당초 칼센은 자신이 흰올빼미의 자식인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오월의 검 역시도 그가 네필림이라는 것만 알아보았을 뿐 누구의 자식인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그냥 신경 안 썼는지도 모르지. 그럴만한 성격이니까. 세상에 네필림이 널리고 널린 것도 아닌데 헷갈릴 수가 있나?’
물론 네필림을 낳는 것이 큰 죄라고 해 봤자 들키지만 않으면 처벌당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세상에 네필림이 극소수나마 존재하는 것이다.
아이작은 마음을 다스렸다.
흰올빼미가 그의 생물학적 어머니라는 증거는 시기가 일치한다는 점밖에 없다. 그리고 설령 진짜라고 한들, 그녀가 아이작의 진짜 어머니도 아니니 복수할 의무도 없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명천사 어머니라니. 그리움보다는 멀미가 먼저 난다. 심지어 복수 대상은 명천사들이다.
장수에 도움 되는 목표는 아니다.
아이작이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려 하는 모습이 호르헬에게는 진정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는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그런 사정으로 칼센은 큰 공을 세우고도 신도들에게 그 업적을 알릴 수가 없었지요. 흰올빼미의 이름은 교단의 극소수 기록과 사제들에게만 남고 지워졌습니다.”
“……그랬군요.”
“비록 명천사였다고는 하나, 흰올빼미는 크나큰 죄를 저지르고 오랜 시간 도주 중인 자였습니다. 등대지기께서는 이 업적에 기뻐하시며 칼센에게 이름을 예비해 두셨을 정도니까요. 그런 면에서 아이작 형제의 업적을 살펴보았을 때…….”
호르헬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분명 큰 업적이나 천상의 대계를 이루는 데 얼마나 보탬이 되었는가를 생각하면 아이작 형제의 업적은 다소 부족한 점이 없잖아 있긴 하지요.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형제는 나이가 어리지 않습니까?”
“…….”
“천년 왕국의 도래가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다가오는 새로운 질서에 손을 보탠다면, 아이작 형제가 새 시대의 선지자가 되는 길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섯 번째 명천사의 자리에 아이작 형제의 이름이 새겨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