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50)
250화. 밑그림 (3)
천년 왕국은 빛의 법전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명천사는 모든 신도들이 선망하는 위치다.
그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나는 배교할 꿍꿍이를 뱃속에 품은 수상한 놈입니다’라고 증언하는 셈이다.
아이작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제 교단은 아이작에게 명천사가 되기 위해 위업을 더 쌓아야 한다며 온갖 막일을 시키겠지만, 그만큼 막강한 권위와 더불어 교단의 꿍꿍이에도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권위로 자신을 사교도라 몰아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
아이작이 무엇보다 바라던 일 아닌가?
‘일단 다행이라면 작명 고지는 결국 고지에 그친다는 점이군.’
살아생전 천사가 되었다가 폭주한 엘릴이라는 모범생의 예시가 있기 때문에, 모든 천사는 죽은 후에야 이름 지어진다. 당장 고지를 받들더라도(어차피 거부권 따위는 없지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 칼센처럼 아홉 번째 신앙이 되라고 한다거나……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
칼센은 선량한 성기사였지만,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의 대리인이다. 아이작을 아홉 번째 신앙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건 정말 이름 없는 혼돈의 복귀를 돕는 셈일 테니까.
즉, 아이작을 칼센처럼 쓰고 버리는 패로 만들 수는 없다. 대신 명천사라는 후한 보상으로 유혹하는 것이다.
아이작이 이름 없는 혼돈의 복귀를 꿈꾸지 않도록.
교단 역시 얻는 것이 있다. 이 대가로 황제와 교단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아이작을 확고하게 교단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명천사가 되기 위한 시련’이라면서 임무를 내리면 아이작이 거부하지 못할 테니까.
양쪽 다 아이작의 목줄을 쥐고 싶어 한다는 뜻이었다.
‘좋아. 천사든 교황이든 계속 내 목줄을 쥐고 싶다 이거지? 좋을 대로 해라. 그런데 목줄을 쥐고 있겠다는 건 맹견을 바로 옆에 두겠다는 의미라는 걸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
굳이 이렇게 염병을 떨지 않아도 아이작은 빛의 법전이 추구하는 질서를 지지한다. 어떻게 보면 교단의 어떤 사제들보다도 아이작의 믿음이 더 굳건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신앙의 질서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들이 이렇게 끊임없이 의심하고 경계하는 이유는 그들이 신앙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앙인은 끊임없이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려 든다. 역설적이게도, 아이작은 신앙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빛의 법전의 가치를 추구했다.
“……그럼 부족하지만 고지를 받들겠습니다. 제 부족함이 부디 빛의 법전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이작의 대답에 호르헬은 미소 지었다. 그는 정말로 기쁜 듯 아이작의 손을 꼭 모아쥐고 기도하듯 말했다.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아이작 형제! 형제가 부디 교단의 큰 칼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만약 어려운 일이 있다면 기탄없이 이야기하십시오. 제가 적극적으로 돕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이작의 눈이 반짝였다.
“먼저 그렇게 이야기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호르헬 형제님. 그럼 바로 사업, 아니, 제가 처한 시련부터 먼저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돌변한 기색에 호르헬은 아이작 앞에서 처음으로 당황했다.
“마, 말씀하십…….”
“실은 오시면서 보셨겠지만, 이 영지는 가난한 촌락입니다. 제 부질없는 명성을 듣고 모여든 신도들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받아들였는데, 제가 그간 숭고한 여정을 지속해 오느라 영지 운영에 상세히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그런 거치곤 길이 상당히 잘 닦여 있…….”
“내일도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라 굳건히 믿는 신도들의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잘 먹이고 잘 재우는 것이 우선입니다. 제가 이름 지어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면 전보다 더 많은 신도들이 주린 배를 쥐고 몰려들 텐데, 주린 신도들을 뒤로하고 여정을 떠나는 것이 과연 이치에 맞을지…….”
쉽게 말해 돈 달라는 이야기다.
그 뒤로도 호르헬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끝도 없이 구빈 계획과 자금 융통 방법에 대해 떠들자, 결국 호르헬은 ‘자세한 것은 라마리에 주교에게 맡긴다’면서 먼저 작별 인사를 하고 나왔다.
아이작은 떠나는 호르헬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세상을 굴리고 쪼개는 법은 알아도 밥 짓고 동전 헤아리는 법은 모르는군.’
천사들과 천상의 거대한 대계를 굴리다 보니 바닥의 돌부리는 안 보이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비루한 차림새도, 비쩍 마른 몸도 이해됐다.
천상의 권위를 몸에 걸치고 있으니 옷 따위는 신경도 안 쓸 테고, 맛있는 음식 같은 것도 저차원적인 욕망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신앙이란 원래 그 낮은 곳의 사람들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그가 알지 모르겠다.
사실 후안 주교 같은 사람이 정말 귀한 걸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디 보자, 렌하임 성당의 라마리에 주교는 어떨까?’
라마리에 주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이작과의 ‘사업 협상’ 자리에 나왔다. 하지만 코앞에서 명천사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하기에는 라마리에의 배짱이 부족했다.
결국 렌하임 성당은 아이작에게 살덩이가 뜯겨나가는 듯한 지원책을 마련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은 그에게 후안보다는 낮은 점수를 주었다.
***
라마리에 주교도 떠난 뒤, 아이작은 흰올빼미에 대해 생각했다.
네필림은 자신의 모태가 되는 신앙의 기적을 물려받는다.
하지만 흰올빼미는 ‘빛의 법전’ 출신의 천사고,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의 기적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부터 논리의 오류가 생긴다.
‘그럼 흰올빼미는 이름 없는 혼돈의 기적으로 갈아탄 건가?’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아이작은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름 없는 혼돈의 본명을 알고 있던 자들은 전부 다 죽었다. 천사라고 거기서 예외가 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죽지 않았다면 이름 없는 혼돈의 본명을 아는 자가 남아있다는 뜻이 될 테니까.
다른 가능성도 있다.
당연하게도, 애는 혼자서 낳는 게 아니다.
번식했으므로 타천 당했다는 것은 어쨌든 상대가 있었다는 뜻이다.
‘흰올빼미는 일단 여성형인 것 같으니까 엄마라고 치자. 그러면 아빠도 있었겠지.’
붉은 살점의 선지자 같은 붉은 살덩이들이 섹스하는 모습을 생각하자 속이 이상해졌다. 하지만 부모가 섹스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자식은 원래 그런 기분을 느끼는 법이다.
물론 빛의 법전 천사들의 외견은 붉은 성배와 좀 다르긴 하겠지만,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이상하게 생겼을 뿐이다.
아이작은 자신의 풍부한 상상력을 억제하고 자신의 이름 없는 아빠에 대한 추측만을 계속했다.
이름없는 혼돈 신앙을 물려받은 대상은 이쪽일 가능성이 높았다.
왜 빛의 법전 쪽 핏줄은 무시하고 이름 없는 혼돈 쪽 핏줄만 가져왔나 싶었지만, 이때 이미 흰올빼미는 배교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녀에게는 천사로서의 신성은 있어도 물려줄 신앙은 없던 셈이다.
‘설마 양쪽 다 천사는 아니겠지?’
보통 인간과 천사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네필림이라고 한다. 천사와 천사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가리키는 말은 없다. 그렇다고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산아제한 정책을 시행 중인 신들이 더욱 질색할 뿐이겠지.
다만 오월의 검 같은 눈알들이 비벼대는 것을 생각하자 한층 더 기분이 이상해졌다.
정신 나갈 것 같은 장면이다. 그런 모습을 하고도 번식이 가능하다니, 부모가 이상성욕자라는 것을 깨달은 것만큼이나 충격적이다…….
‘머리가 아파지는군…… 아니, 칼센, 이 새끼부터 어떻게 심문해야겠는데.’
아이작은 자신의 뱃속에 기거하며 제 좋을 때만 튀어나와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고 사라지는 칼센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가 원한다면 명상을 통해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죽은 놈을 고문해서 정답을 뜯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답답했다.
물론 출생의 비밀이 앞으로의 행보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탄생이 어떤 거대한 계획의 밑그림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작이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자신이 체스판 위의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 불쾌한 감정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고 울스텐이 걸어들어왔다.
아이작이 명천사라 하더라도 ‘그래서 뭐?’라고 할 수 있는 드워프나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맘대로 들어와서 미안하군, 성배기사. 사제들이 떠난 거 같아서 말이야.”
“괜찮습니다. 그러고 보니 할 말이 있다고 하셨었죠?”
“그래. 아무래도 사제들이 그거 때문에 온 거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이렇게 떠난 걸 보니까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군.”
아이작은 새로운 화제로 일단 생각을 돌리기로 했다.
출생의 비밀이니, 신들의 거대한 계획이니 하는 것들은 머리만 아프고 전개에 도움은 되지 않는다. 그에 비해 드워프가 만들어 주는 굉장한 아이템이나 당장 때려죽이고 포식할 수 있는 괴물이 더 흥미로웠다.
“사제들이 걱정할 만한 것이라니 흥미롭군요. 뭡니까?”
“……자네 괜찮나? 성배기사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차.”
아이작은 잠시 정신줄을 놓았다는 걸 깨닫고 머릿속을 가다듬었다.
“괜찮아졌습니다. 발견하셨다는 게 뭐였죠?”
“사실 자네도 잘 아는걸세. 일단 가서 얘기하는 게 좋겠군.”
***
울스텐과 함께 간 곳은 타천사가 묻혀 있는 폐광이었다.
아이작은 사제들과 타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자마자 이곳에 오게 되다니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이때까지 묻혀 있던 타천사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이 생겨났다.
이때까지 그에게 타천사란 ‘쓸모 있는 희귀재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생물학적 어머니가 타천사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게 흰올빼미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아이작은 어머니의 유골을 파밍해서 아이템을 만들고 있던 셈이다. 패륜도 이만하면 창의적인 수준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명천사들은 제각각 개성적인 외모를 하고 있는데, 폐광에서 발견된 타천사는 기천사 수준으로 ‘일반적인’ 빛의 법전 천사의 외형을 하고 있었다.
아이작과 울스텐은 마침내 타천사 상 앞에 도착했다.
여전히 타천사는 돌의 모습으로 벽 안에 박제되어 있었다. 아이작은 그동안 울스텐이 상당히 많이 뜯어내서 아이템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날개 반 장밖에 손상되지 않은 상태였다.
“필요한 물건을 만드시는 데 아낌없이 써도 된다고 했는데, 별로 안 뜯으셨군요? 게다가 비용 마련을 위해 팔아도 된다고까지 했는데.”
하지만 울스텐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내가 팔지 말라고 했네. 뜯지도 말라고 했고.”
아이작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울스텐은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내가 보여주려고 한 건 이게 아니라 더 깊숙한 곳에 있네.”
타천사 작업 상황이 얼마나 진행된 건지 보여 주려고 한 게 아니라고?
아이작은 얼떨떨해하면서도 뒤를 따라갔다.
울스텐은 복잡하게 꼬여 있는 폐광의 지도를 머릿속에 꿰고 있는 것처럼 능숙하게 지나갔다. 만약 아이작 혼자 왔다면 반드시 헤맸을 거리였다.
“그냥 말씀해주시죠. 지하에 괴물이라도 있습니까?”
“그것보다 더 심하네. 말로 설명이 안 돼. 이건 자네가 봐야 이해할걸세.”
아이작은 대체 뭐길래 이렇게 기대감을 높이나 하면서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걷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이작은 다시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울스텐. 혹시 스스로가 체스판의 말이 된 것 같다는 기분을 느껴본 적 없습니까?”
“체스 말? 호사스러운 생각이군. 자네들은 어차피 모두 신의 체스 말 아닌가?”
아이작은 이 무신론자에 가까운 폭언에 놀랐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세상의 화로의 신은 지금 부재중이다. 그는 대지 아래 거대한 화로 안에 들어가 스스로의 몸을 녹이고 제련해 재탄생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즉, 그는 체스 플레이어가 아닌 셈이다.
아이작이 뭐라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울스텐은 그럴 기회 따윈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체스 말은 그런 생각 따윈 하지 않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이미 체스 플레이어인 셈이지.”
드워프나 할법한 자존심 강하고 당당한 말이었다. 아이작이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려던 찰나, 울스텐의 엉덩이만큼 자세를 낮추고 좁은 틈을 지나가야 하는 공간이 나왔다. 그곳을 통과한 순간 갑자기 공기가 차가워졌다.
탁 트인 공간이 나오면서 맑은 공기가 들어온 것이다. 깊은 지하에 어울리지 않는 공기였다.
“여긴…….”
“주변을 밝히게.”
이미 루앗딘 열쇠로 주변을 밝히고 있던 아이작은 자신이 서 있는 공간 주변 말고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말은 이 지하 공동의 규모가 엄청나다는 뜻이었다. 루앗딘 열쇠의 열기를 더더욱 강하게 피워올리자 겨우 반대편의 윤곽이 보일락 말락 하기 시작했다.
그때 울스텐이 손에 들고 있던 조명용 성물을 강하게 내리친 뒤 던졌다. 환하게 타오르는 성물이 주변을 대낮같이 밝히며 느릿느릿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그제야 이 공동의 규모를 볼 수 있었다.
아득할 만큼 거대한 공간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영지 아래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심연이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이 정도면 싱크홀이나 붕괴를 걱정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울스텐이 보여 주려는 것은 이 공간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맞은편, 무너진 흙더미 속에 드러난 커다란 석재구조물을 가리켰다. 기묘한 무늬들을 본 아이작은 숨겨진 유적지 같은 것을 생각했으나, 가까이서 보고서야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울스텐이 말한 ‘흥미로운 발견’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검소한 표현이었다.
아이작은 감탄하기에 앞서, 공포를 먼저 느꼈다. 그것은 까마득한 숫자의 타천사들이었다. 서로 뒤엉키고 부딪치고 으스러진 타천사들이 토사 아래 쓰레기처럼 파묻혀 있었다. 숫자가 아니라 면적으로 계산해야 할 규모였다.
토사 아래 파묻혀 있는 타천사들의 규모를 추측해 보려 했지만 정신 나갈 것 같은 기분에 포기했다.
이 정도면 최소한 이사크레아 수도원 심층 지하 거의 전부가 타천사라고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