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53)
253화. 다가오는 성전 (2)
게벨은 뽑아 든 칼을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어색하게 집어넣고 아이작을 마주 끌어안았다.
“허, 박대하진 않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 환영해줄 줄은 몰랐구나. 늘 계산적이고 잔머리 굴리는 게 보여서 감정 없는 냉혈한인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만나서 한다는 소리가 그거예요?”
하지만 아이작도 게벨의 평가를 반박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굳이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수도원에서든, 어디서든 그는 철저하게 이득과 성과 위주로만 판단하고 ‘공략’하듯이 살아왔다.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지만, 그에게 이 세상은 게임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만큼이나 오래 살아왔으면 가끔 그에게도 게임을 잊게 만드는 존재가 몇몇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게벨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못 본 사이에 키가 더 큰 거 같군. 근육도 제법…… 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노력한 것 같구나. 넌 어렸을 때부터 근육이 잘 안 붙는 체질이었지.”
게벨은 한탄하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힘을 알고 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는 부분은 아니었다. 아이작은 뒤로 돌아가 내팽개쳤던 카훌린을 집어 들었다. 카훌린에 깃들어 있는 칼루리엔이 뭐라고 투덜거렸다.
다만 게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 칼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칼은 아닌 거 같은데. 혹시 그게 소문으로만 듣던 카훌린이냐?”
“알아보시네요?”
“나름 성기사 출신인데 그 정도 성물을 못 알아볼 리가…… 아니, 그러면 네가 엘릴의 대전사로 선택받았다는 게 헛소문이 아니라 진짜였던 모양이군.”
게벨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게벨 씨가 그동안 들었던 소문이 뭔지 모르겠지만, 그중 뭐가 진짜인지 다 듣게 되면 일일이 다 놀랄 수도 없을 겁니다.”
***
아이작은 게벨과 함께 이사크레아 수도원까지 일부러 걸어서 이동했다.
밤이 내려앉고 한참 어두워졌지만 두 사람이 어둠을 무서워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도로는 불을 크게 밝히지 않아도 문제없을 정도로 걷기 편했다.
게벨은 이사크레아 주변을 둘러보며 연신 감탄했다.
“예전에도 여기에 와본 적 있었다. 그냥 평범한 촌 동네였지. 사람들 표정은 우중충하고, 영주는 그나마 나오는 수입으로 성벽이나 쌓던 것을 기억한다. 네가 이 영지를 다스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는데, 이 정도면 제국 안에서 여기보다 살기 좋은 곳도 드물 것 같군.”
“입에 발린 소리 하지 마세요.”
아이작은 게벨이 오랜만에 만났다고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전에 비하면 크게 발전하긴 했지만 쇠르나 렌하임 같은 대도시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게 사실이다. 시간이 지나면 더욱 번창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이제 막 발전하기 시작한 시골 동네다.
하지만 게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눈에 보이는 도로나 겉만 번드르르한 건물만 놓고 말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의 표정이나 공공기물이 얼마나 정비되어 있는지, 치안 상태 같은 걸 놓고 이야기하는 거다.”
게벨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아리엣 수도원에서 쇠르까지 오는 길만해도 도로가 망가져서 몇 번이나 산길을 헤맸고, 강도도 다섯 번쯤 만난 것 같다. 혼자 있어서 만만해 보였겠지. 쇠르에서는 밤에 돌아다니기도 어려울 정도야.”
아이작은 게벨의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밤중인데도 사제들이 밝힌 등이 사거리마다 놓여있었고,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술집을 드나들거나 낮에 못다 한 일을 이어갔다.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도 불안해하거나 경계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쇠르라면 예전에 가본 적 있었는데요. 그때 바르바리 강도단이 돌아다니는 걸 보긴 했습니다만 그 정도인가요?”
“네가 말하는 건 1년쯤 전인가? 그사이 말도 안 되게 치안이 안 좋아졌다. 물론 너 때문은 아니고, 여명군 때문이지. 너도 꽤 많이 돌아다녔을 텐데 제국 꼴을 못 봤나?”
그제야 아이작은 게벨과 자신의 인식 차이가 생긴 이유를 깨달았다.
아이작은 게르토니아 제국에서 거의 발을 딛고 돌아다니지 않았던 것이다. 후안 주교의 소환 명령을 받아 노르덴 항구에 간 이후엔 배를 타고 돌아다녔고, 치안이 안정된 루주베르크에 잠깐 들렀다가 엘릴 왕국에 파견되었다. 그 뒤 다시 울텐하임으로 돌아오는 것도 배를 타고 이동했고, 이후에는 넬을 타고 하늘로만 돌아다녔다.
이 때문에 아이작은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녔음에도 제국 상황이 얼마나 막장인지 모른다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제일 큰 차이는 화형대다. 이 도시에는 화형대가 없군.”
게벨은 이사크레아 영지의 광장에 잠깐 멈춰선 채 중얼거렸다.
“지금 제국은 대도시마다 화형대 불꽃이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고 있다. 태울 게 없으면 성화라도 붙여두는 상황이지. 여명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면서.”
“……그러고보니 시라크사에서 화형대를 본 적 있긴 하군요.”
아이작이 유일하게 머물렀던 루주베르크나 울텐하임 모두 교단의 손이 크게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그나마 발 디뎠던 시라크사에선 그 수십 개의 화형대를 목격했었다.
게벨은 그런 상황이 제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 영지가 살기 좋은 동네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해가 되는군요. 제가 잘난 것보다는 다른 곳이 막장이라서 그런 것 같긴 합니다만…….”
“모두가 미친 세상에선 제정신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따돌림당한다. 네가 그 광기를 이 마을로 가져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거야.”
***
아이작은 게벨을 수도원 안으로 데려와 귀빈으로 모셨다. 사제들은 성배기사가 극진하게 대접하는 게벨의 정체를 궁금해했지만, 아이작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게벨은 사치스러운 귀빈실도, 식사도 거절했지만, 지하실에서 꺼내 온 고급술은 거절하지 않았다. 아이작과 게벨은 의미 없이 불 피워둔 난로 앞에서 술병째로 마시며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아이작의 소문에 관한 진상을 파악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럼 소문들은 차라리 겸손한 편이었군. 명천사 칼루리엔을 박살 내고 그 칼에 심어놓았다고?”
“정확히는 오월의 검이 다져놓았고 제가 막타를 친 거죠.”
“엘릴과 대련을 벌였다는 건…… 아무리 너라도 심했구나. 적당히 과장해야지.”
“맞습니다. 사실 대련도 아니었죠. 일방적으로 얻어맞았지.”
엘릴 왕국에서 벌어진 이야기들은 믿기 힘들지만 유쾌하고 즐거운 무용담처럼 꺼내놓을 수 있었다. 게벨은 자신이 가르치고 단련시킨 제자가 제국의 강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사들을 물리치기까지 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솔직히 수도원에서 너에 관한 소문을 들을 때마다 내가 너를 가르쳤다고 몇 번이나 으스댔었다. 하지만 이젠 도저히 그러지 못하겠군. 이건 내가 잘 가르쳐서가 아니라, 네가 대단한 게 맞는 것 같다.”
“게벨 씨가 저를 돌봐주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 쥐 잡아먹던 꼬맹이가 이렇게 되다니, 원.”
아이작은 웃으려다가 곧 정색하고 게벨을 바라보았다.
“제가 쥐 잡아먹던 거 알고 계셨나요?”
“모를 리가? 땅을 대충 파고 묻은 척만 하는 건 티가 난다. 사체가 없는 건 이미 확인했지. 요리할 방법도 없는데 대체 어디서 어떻게 먹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만.”
아이작은 안도했다. 아직 촉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분명했다. 게벨에게는 솔직히 말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아니라 게벨을 위해서라도 일단은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만약 언젠가 교단이 자신의 촉수를 문제 삼으면 진실을 아는 사람들부터 붙잡아 들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솔데와는 이미 운명 공동체가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게벨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성기사로서 경력이 오래된 만큼 아이작에게 석연찮은 비밀이 있다는 것은 그 역시도 알고 있을 것이나, 게벨 역시도 캐묻지는 않았다. 둘은 암묵적인 비밀인 것으로 합의를 보고 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다시 화제는 바뀌어 아이작의 여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게르토니아 제국으로 돌아온 뒤의 일은 그다지 유쾌할 수 없었다. 주로 카밀과 이름 없는 혼돈에 관한 것이었다. 카밀 추기경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게벨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 소문도 사실이었군. 카밀 추기경은 이름 없는 혼돈의 교리를 연구하다가 그렇게 된 것인가…….”
아이작은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엘바덴에서 일어난 일을 보았을 때 그녀가 자멸하게 될 것은 기정사실화된 일이었다. 게벨은 빛의 법전 추기경이 자신이 키운 제자 손에 죽었다는 사실에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비틀며 미소를 지었다.
“카밀은 사제라기보다 기회주의자 정치인에 가까웠다. 전형적인 등하맹인이지. 지금 추기경 중에 안 그런 자가 있겠느냐. 이런 식으로 그 추악함이 빛에 드러났다니 정말 다행이군.”
후안 추기경을 지원하고 응원 중인 아이작은 내심 뜨끔했으나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게벨은 파문당한 성기사이자 탈영병이지만 그의 믿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브하르 같은 신실한 신도에 가까웠다. 다만 복수를 위해 좀 열려있을 뿐인.
아이작은 그 복수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필요를 느꼈다.
“음, 그리고…… 바슐라프 노턴도 만났습니다.”
“바슐? 바슐라프 노턴? 놈이 살아있다고? 잠깐, 그렇다면.”
게벨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바뀌었다. 일종의 절박함마저도 엿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놈이었나? 놈은 어떻게 했지? 죽였나?”
“죽였냐고 물으신다면……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마주쳤을 때에는 제가 죽지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었습니다만.”
물론 아이작 나름의 비장의 수인 촉수를 숨겨둔 채로 싸우긴 했지만, 순수하게 검술 실력만 가지고 싸웠다면 패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때 아이작은 검기 좍좍 뽑아내는 소드마스터를 상대할 능력이 없었으니까.
“소드마스터를 대체 무슨 수로 잡아 죽이라고 하신 거예요?”
아이작의 말에 게벨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소드마스터라니? 그러면 엘릴 신도가 됐단 말이냐? 아니, 애초에 그럴 리가 없다. 그 녀석에게 소드마스터가 될 재능 따위는 없었어. 나보다도 못한 놈이었는데?”
“예? 검기를 뽑아내던데요. 심지어 황실 근위기사단 수석기사였습니다.”
게벨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이 혼란스럽다는 듯 흔들렸다.
“정말 바슐이 맞나?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게 아니고?”
“자기 스스로 바슐이라고 했고, 아발란체 성기사단 검술을 쓰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게벨 씨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고, 자기 딴에는 그때 사정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아이작은 바슐이 그에게 한 변명을 게벨에게도 들려주었다. 바슐은 단지 교단의 명령을 받아 아발란체 성기사단을 사지로 몰고 갔을 뿐이며, 자신도 후회하고 있고, 자신에게 그 명령을 내린 등하맹인을 죽이기 위해 칼을 갈고 있다는 것까지.
이야기를 들은 게벨은 침묵에 빠져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제법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생각이 정리된 게벨은 무겁게 입을 뗐다.
“다른 사람을 착각한 건 아닌 것 같군. 확실히 바슐이 아니고서야 모를 정보야.”
“그럼 그 말을 믿는 건가요?”
“네 말이 사실이라면 죽일 놈은 바슐이 아니긴 하지. 바슐은 배신할 놈이 아니기는 했다. 하지만 석연찮은 부분이 없는 건 아니군. 뭣보다 소드마스터라니…… 그건 엘릴 신도라 해도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아이작도 동의했다.
소드마스터의 자질은 일단 어려서부터 두각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기적 없이도 스스로의 힘에 확신을 가질 만큼 강한 믿음과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한 경지이기도 했다. 아이작은 게벨이 자신보다 못하던 옛 친구의 성장에 질투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미심쩍은 부분을 의심하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결투 당시 바슐도 ‘자기도 나름의 비장의 수가 있다’고 이야기하더군요. 그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그럴지도. 말도 안 되는 갑작스러운 성장에는 반드시 신이나 천사가 배후에 있다. 만약 바슐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엘릴 신도로 배교하는 대가로 무언가를 얻었을지도 모르지. 자세한 건 만나게 되면 그때 생각해 봐야겠다.”
바슐이 들으면 꽤 자존심 상할 이야기겠지만 게벨은 단언하듯 말했다. 그가 결코 자기 실력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성취라고는 조금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보다 너를 위험한 곳에 몰아넣은 꼴이 되고 말았군. 미안하다. 소드마스터라니, 설마 그런 게 되어 있을 줄은…….”
“아뇨. 괜찮습니다. 덕분에 소드마스터의 실력도 견식할 수 있었으니까요.”
바슐과의 대련은 정말로 엘릴 왕국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검기 사용자의 검술과 방식을 미리 익혀두는 것만으로도 아이작은 여러 차례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게벨 씨야말로 여기까지 오는 길이 위험하지 않았나요?”
게벨은 탈영병에 파문 성기사다. 그를 알아볼 사람은 드물겠지만, 잘못 붙잡혀 조사라도 당하면 곤란해진다. 특히나 이 정도로 제국이 여명군의 광기에 물들어 가고 있는 상황이라면.
아이작의 말에 게벨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음, 사실은 네가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안심하고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더군.”
“부탁이요? 흠, 차라리 잘됐네요. 저도 사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래? 그럼 내가 먼저 말하지.”
게벨은 진지한 얼굴로 아이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이사크레아 령 여명군에 자리가 남는다면 끼워줄 수 있겠나?”
아이작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는 어딘가 읽기 힘든 표정으로 웃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혹시 이사크레아 령 여명군의 검술교관이 되어 주실 수 있을까요?”
아이작의 질문이 대답을 대신하면서, 즉시 게벨의 직위와 직책이 결정되었다.
이사크레아 군 검술교관 게벨 크란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