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57)
257화. 다가오는 성전 (6)
“클레르, 세상에. 꼴이 말이 아니군.”
순찰대가 체포해 온 사람 중에 사제복을 입은 사람이 있다는 보고를 들은 아이작은 곧바로 그가 누군지 확인했다. 어쩐지 도착이 늦는다고 생각은 했는데, 설마 시에로 여명군 무리에 끼어있을 줄은 몰랐다.
클레르는 아이작을 만나자마자 계단에서 엎드려 흐느꼈다.
“제가 부족해서…… 이렇게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찾아뵈었습니다.”
도망친 여명군 무리 중에 클레르가 있는 줄 알았으면 좀 더 친절하게 데려올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민가에서 도망친 여자의 이야기와 순찰대의 보고를 듣고, 아이작은 클레르가 나름대로 사람을 구하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었다.
울텐하임에서 사고를 친 학생 사제는 이제 사제는 아니게 되었지만 대신 한 사람의 번듯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제법 쓸만할지도 모르겠어.’
솔직히 클레르에 대해 반신반의했던 아이작은 그의 바뀐 모습을 보고 기대를 품었다. 이제 그는 빛의 법전에 대해선 회의를, 이름 없는 혼돈에 대해서는 경계심 어린 관심을 품은 인재가 되었다.
아이작이 그러하듯 촉수도 쓰기 나름이라는 교훈을 얻을지도 모른다.
“일단 좀 씻고 식사부터 하지. 그다음 오는 길에 있었던 여정을 좀 들려주게.”
***
“이름 없는 혼돈의 기적을 쓴 것 같다고?”
클레르는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와 그간의 이야기를 했다.
그는 울텐하임에서 출발하여 객지를 헤매다가, 시에로 여명군에 합류하여 여기에 오면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토로하였으나, 아이작의 관심을 끈 이야기는 하나뿐이었다.
그가 시에로 여명군 무리가 약탈을 말리려 했을 때, 빛의 법전은 기도에 반응하지 않았지만 이름 없는 혼돈은 반응해 주었다는 것.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나?”
“아뇨…… 외울 생각도 해본 적 없습니다. 의식을 진행할 때 외에는…….”
아이작은 당혹감을 숨기기 위해 얼굴을 만졌다. 그는 이때까지 기적을 일부 권속들 외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작이 성장하면서 저절로 신체 능력이 발달하는 경향은 있지만, 대놓고 ‘기적’이라고 할만한 것을 허락한 이들은 소수뿐이었다.
때문에 클레르가 이름 없는 혼돈의 기적을 썼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가 이름 없는 혼돈의 의식을 치르기는 했지만 아이작에게 서품을 받은 것도 아니며, 애당초 이름 없는 혼돈이 반응해 줄 이유가 없다.
“어떤 종류의 기적이었지?”
“그들의 발목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외친 기도문이었습니다. 땅 밑에서 검은 기운이 솟구쳐 올라 잡아채더군요. 아주 짧은 순간뿐이었습니다.”
“지금 다시 보여 줄 수 있나?”
클레르는 성배기사 앞에서 이름 없는 혼돈의 기적을 쓴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이미 울텐하임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준 아이작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아까와 같은 기도문을 외웠다.
“흩어진 망각의 파편을 당신의 손길로 그러모으게 하소서.”
난로 앞 카펫 위로 스멀거리며 검은 기운이 스며 올라오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미약한 기운이었으나, 명백히 이름 없는 혼돈의 기적이었다. 게다가 아이작은 미세하게나마 자신의 신성력이 소모되는 것을 느꼈다.
아이작이 클레르의 기적을 신경 쓰는 이유는 이 일이 혹시 이름 없는 혼돈의 부활을 암시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갈까 봐서였다. 카밀이 이름 없는 혼돈의 교리를 연구하던 것처럼, 다른 곳에 얼마나 더 숨겨진 비밀들이 있을지 모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천년 왕국의 도래에 이름 없는 혼돈의 기적이 필요하다고 하니, 충분히 더 퍼져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들이 전부 이름 없는 혼돈의 이름으로 테러를 저지르거나, 최악의 경우 백사병 같은 사태를 또 터뜨릴 생각이라면 아이작이 막는다 하더라도 걷잡을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클레르는 내 신성력을 소모해서 기적을 사용했다. 가까이 있지 않았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약한 양이긴 했지만…….’
아이작은 혹시나 싶은 생각에 신성력이 흘러나가지 않도록 의식을 집중하고 클레르에게 한 번 더 명령했다.
“한 번 더 사용해 보게.”
클레르는 이번에도 시키는 대로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두어 번 반복해서 외워봐도 나타나지 않자, 클레르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아이작은 그 모습에서 확신했다.
‘……역시 나를 촉매로 기적이 발동되는 거였군.’
아이작은 일전에 울텐하임의 지하묘역에서 클레르에 의해 소환당한 적이 있었다. 비록 영혼의 극히 일부뿐이지만 소환은 소환이고, 이후 그의 의식을 가로채 도와주기까지 했다. 이때 클레르는 아이작에게 깊게 감화되었고, 그를 향한 숭배의 감정을 품게 된 것 같았다.
물론 또 다른 가능성도 있었다. 이 세계는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원하는 기적을 준다. 클레르의 진심이 세계를 움직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름 없는 혼돈에게 기도했으므로, 그쪽 계열의 기적이 발휘된 것이고.
즉,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가 된 것이다.
아니, 이 경우에는 ‘이름 없는 혼돈’이 아니라 이름이 붙은 셈이었다.
아이작 이사크레아라는 이름이.
“……저는 이제 어떻게 될까요?”
클레르가 한탄하듯이 물었다.
아이작은 클레르의 침울한 얼굴을 보고서야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는지 깨달았다. 이름 없는 혼돈의 의식을 치른 것만으로도 죽을죄인데, 이제 그 기적까지 발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당장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다.
아무리 그 자애로운 성배기사라도 용납하기가 힘들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즉, 그는 죽을 각오로 아이작에게 솔직하게 고백한 것이다.
아이작은 당연히 그럴 마음이 없었다.
“클레르, 내 말 주의해서 듣게.”
“예.”
“자네의 기적은 아무래도 나한테서 비롯된 것 같다.”
“예…… 예?!”
***
아이작은 클레르의 눈앞에 저 너머의 색채를 풀어놓았다. 왼손바닥을 중심으로 스멀거리며 기어 나오는 색채는 클레르가 불러낸 것보다 훨씬 색이 짙으면서도 끈적할 정도로 진한 농도로 흘러내렸다.
‘그나마 보여 줄 만한 건 이거뿐이군.’
촉수는 아무래도 너무 자극적이다. 설득하려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야 했다.
“무슨…… 서, 성배기사님도 이름 없는 혼돈의 기적을 쓰시는 겁니까?”
“그래.”
아이작이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를 신뢰하기도 했지만 클레르가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닌다 해도 믿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이름 없는 혼돈 교리를 연구하다가 괴물로 변했고, 본인도 신학대학에서 도망쳐 거지 여명군에 합류했던 학생 사제다.
인제 와서 명천사로 고지받은 아이작이 이름 없는 혼돈의 기적을 쓴다고 떠들어 봤자 믿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적을 언제든 통제할 수도 있고 말이지.’
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클레르를 설득할 수 있다면 그의 활용 범위는 훨씬 높아진다.
일단 클레르는 제정신으로 이름 없는 혼돈의 기적을 쓸 수 있는, 어쩌면 아이작 다음으로 이름 없는 혼돈의 사제에 가까운 존재다. 그의 됨됨이는 이미 확인했으니 나머지는 아이작이 다루기 나름이다.
무엇보다 아이작은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라서 광인이 되는 게 아니라, 광인들이 이름 없는 혼돈을 섬겨서 백사병이라는 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을. 네리아나 그녀의 사교도들도 그 실험의 일환이었다.
“대체…… 대체 무슨.”
“놀랐겠지만 사실이다. 하지만 너라면 이미 나를 충분히 판단했겠지. 내가 촉수 쫙쫙 뿜으면서 사람 잡아먹고 괴물 소환하는 의식을 벌이는 미친놈처럼 보이나?”
아이작은 뻔뻔하게 말했지만 클레르는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그래. 나도 네가 미친 사교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목을 베지 않는 거다. 미친 사교도였으면 이미 울텐하임에서 죽였겠지. 나는 혼돈의 힘을 다루고 있지만, 너와 마찬가지로 이건 내 선택이 아니었다.”
‘잠깐, 캐릭터 만든 것도 선택이라면 선택인가?’
하지만 게임 속에 뛰어들어서 직접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는 경고는 없었으니 이 정도면 거짓말은 아니다.
클레르는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가 이사크레아 영지로 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선행을 쌓아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떳떳하게 살기 위해.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에게 떳떳해져야 했다.
아이작은 저 너머의 색채들을 회수하며 말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힘을 어떻게 쓰는가지.”
“……이해했습니다.”
“나는 이 힘을 기존의 질서와 체계에 무관하게, 자신만의 선을 위해 사용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네. 악해질 수도 있는 힘을 가진 만큼, 더더욱 선을 위해 노력해야 해. 그건 모든, 힘을 가진 자의 의무다.”
아이작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일단 그 기적은 주변에 보여 주거나 발휘하지는 말게. 오해를 사기 쉬울 테니까. 하지만 내일부터 내가 몇 가지를 좀 더 알려 주도록 하지.”
“예.”
클레르가 아이작의 기대에 맞게 움직여 준다면 큰 성장을 보여 줄 것이다. 그리고 아이작이 여명군에 참전했을 때 예상치 못했던 전력이 되어 줄 가능성도 있었다.
“저, 저는 어디서 지내면 될까요?”
당장 갈 곳이 없는 클레르의 질문에 아이작은 미소 지었다.
“적당한 처지의 비슷한 사람들이 있네. 야채 잘 먹고 동물에게 친절한 사람들이니까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클레르는 그 기묘한 소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제국이 점점 안 좋은 상황으로 흘러가는군.’
아이작은 게벨, 이솔데, 클레르를 연달아 만나면서 제국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상황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제국은 점점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엄청난 규모의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성지를 향해 떠나고 있으며, 교단은 다른 신앙의 기적까지 연구할 정도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이러다간 성지를 탈취하더라도 제국은 망하거나 그 가까운 수준에 치달을 것이다.
이런 도박수를 벌인다는 것은 교단도 이번 원정에 사활을 걸었다는 뜻이다.
그 다음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정말 천년 왕국의 도래라는 게 휴거나 종말 비슷한 걸 의미하는 건가?’
아이작은 자신이 살던 세계의 종말론을 떠올렸다. 온갖 재앙이 밀어닥친 뒤 멸망한 세상에서 신이 살아남을 자를 판별하고, 죽은 자들도 되살려 영원한 천국으로 데려간다는 결말.
누군가는 ‘그딴 걸 누가 반기겠냐?’라고 생각하겠지만, 신도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신성하고 성스러운 결말이다. 인과응보가 이루어진 세상, 그들의 고통이 보답받는 세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결말을 위해 죽거나 희생하기도 했다.
300년 전 백사병이 도래하기 전에도 그러했을 것이다.
아이작은 아문달라스가 보여 주었던 그때의 풍경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그 결말에 일조하고 있는 것이라면, 성지는 수복되지 말아야 한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 내 잘못이 없는 건 아니지만.’
황제를 설득해 여명군을 부추긴 것은 아이작이다. 하지만 황제가 거부했어도 여명군은 일어났을 것이고, 어차피 일어날 여명군을 좀 더 성공적으로 이끌고자 했던 설득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광기는 예상하지 못했다.
특히 시에로 여명군이 문제였다.
‘황금우상 상단을 건드리기 시작하면 상황이 막장으로 흘러갈 텐데, 이건 교단도 통제하기 쉽지 않을 테니 문제군.’
황금우상 상단의 유용함은 물론이고, 그들에게서 상납금을 받는 주교나 사제들도 한둘이 아닐 것이다. 당연히 그들을 통제하려고 애쓰겠지만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문제도 많이 터진다.
분명 문제가 생긴다.
그 문제가 얼마나 크게 터지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엘릴 왕국의 원정군은 곧 파견될 것이고, 세상의 화로 교단 물자도 들어오고 있다. 황금우상 상단은 여명군을 위한 물류를 끊임없이 실어 나르며 전쟁특수와 치안 부재를 동시에 느끼고 있고, 소금 의회 역시 잠든 신을 깨우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이 와중에 거지 떼가 사고를 칠까 봐 걱정하는 것이 한심하게 보일 따름이었다.
‘그러면 흑제국은 뭘 하고 있지?’
붉은 성배는 이미 물밑에서 음모와 공작에 들어갔을 것이다. 올칸 규율도 분명 움직임을 보일 것이나, 그게 여명군 선포 이후일지 이전일지 아이작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불사 교단이 기묘할 정도로 조용했다.
항상 그랬다. 불사 교단은 가끔 테러나 약탈을 벌이는 것을 제외하면 결코 제국을 토벌하겠다며 대규모 원정군을 꾸리거나 하는 짓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조용히 방어에만 치중할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런 대규모 원정을 앞두고 아무것도 안 할 리가 없다.
분명 무언가를 하고 있을 것이다.
***
얼마 뒤, 아이작의 걱정대로 문제가 결국 터졌다.
아이작은 물론이고 제국 누구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형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