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66)
Subject Here – 266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같이 (1)
아이작이 처음 생각한 것은 ‘올칸 규율이 좀 소식이 늦나?’라는 것이었다.
‘이름 없는 혼돈’의 이름이 없는 이유는 자신의 이름을 아는 자들을 전부 죽여 버렸기 때문이며, 스스로 신앙을 파멸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빛의 법전의 공격도 뭣도 아닌 자살에 가깝다. 그리고 그 이름을 아는 존재가 어떻게 됐는지 안다면 알아서 딱히 좋을 것도 없어 보였다.
“외람되지만, 만생자시여.”
아이작은 시비조처럼 들리지 않길 바라며 주의 깊게 말했다.
“그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전부 다 죽었습니다. 과연 제국 전체를 뒤진다 해도 찾아낼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만, 찾아내도 올칸 규율에 그 이름이 알려지는 것이 과연 괜찮을는지요?”
[어리석은 소리 마라, 성배기사.]만생자는 비웃으며 말했다.
[등대지기가 그런 귀중한 지식을 섣불리 지웠을 리가 없다. 너라면 이름을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죽여 버릴 수 있는 이름을 그냥 지워 버리고 존재를 잊겠느냐?]‘아니, 왜 남의 이름을 살인 도구로 취급하고 난리지? 어이가 없네.’
아이작은 속으로 씨근거렸지만, 솔직히 자신이라도 그렇게 몇 번 썼을 것 같긴 했다.
[그리고 지식의 취급에 대해서는 네가 알 일이 아니다. 올칸께서는 그저 그 어떤 정보도, 지식도 누군가의 속박에 감금되어 있어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비록 그것이 치명적인 미래를 불러올 지식이라 해도.]아이작은 이 저작권이 뭔지도 모르는 과격한 카피레프트 약탈자가 뭐라고 생각하든 존중하기 힘들었으나, 그 약탈자는 지금 천만 대군을 끌고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이작이 아무리 데굴데굴 구르고 발버둥을 쳐도 천만 명은 못 죽인다.
그 시체에 깔려 죽는다면 모를까.
‘그리고 이 와중에 제국이나 교단은 도와주지도 않을 것 같고.’
아이작의 머리가 차가워졌다.
좋다. 도와주지 않으면 아이작 스스로 살길을 찾아낼 뿐이다.
아이작은 딱히 애국심도 신앙심도 없다. 자신의 사람들을 지켜 주기 위해서라면 신도 나라도 팔아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이작은 만생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직접 리히트하임으로 가서 이름 없는 혼돈의 이름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때까지 대약탈을 미루어 주십시오.”
만생자는 아이작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이작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했다.
이윽고 그녀는 아이작의 말이 진심인 것을 깨닫고 몸을 숙였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안다. 자칫 잘못하면 빛의 법전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아이작 혼자 올칸 규율에 맞서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그를 돕지 않는다면, 애초에 빛의 법전은 그의 아군조차 아니다.
설령 돕는대도 그 전에 오크들에게 깔려 죽을 판이다.
만약 실패한다 해도, 천만 대군을 상대로 최소한의 시간을 번 것으로 아이작은 할 일을 다한 셈이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뵙도록 하지요.”
[좋다. 대신 쇠르는 보증금으로 받아 가도록 하겠다.]처음부터 예상했던 바다.
올칸 규율도 내심 이 상처뿐인 승리를 수습할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군대는 처참하게 패배했고, 천사가 나서서 겨우 협상 끝에 점령한 셈이니 기세도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성배기사와 천사 사이의 야합이 이루어졌다.
***
‘빌어먹을 황제 놈, 병사 한 명도 안 보내? 그렇게 날 애지중지하는 척하더니?’
아이작은 쇠르로 돌아가면서 속으로 씨근거렸다.
교황에 대한 기대는 바닥이었지만 솔직히 황제에 대해서는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모든 관계는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한다.
만약 황제가 제국군을 보내 올칸 규율을 막는 데 진심을 보여 주었다면, 아이작도 별 미친 짓을 벌여 가며 그의 제국을 보전하는 데 힘을 보탰을 것이다. 황제가 자신의 영지를 지키는 것을 도와주었으니 자신도 그의 제국을 지켜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서.
Subject Here –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이작이 개인적인 인연을 동원해서 끌어모은 한 줌의 병사들뿐.
그렇게 아이작이 분기탱천해서 쇠르로 돌아갔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당혹스러운 소식이었다.
“교단은 여명군의 지속을 명령했고, 제국군은 성도 리히트하임을 방어를 위해 출정했다구요?”
“그래. 리옹 후작의 전령이 편지를 보내왔다.”
리옹 후작의 편지를 가지고 온 전령은 다소 불만스러운 모습으로 게벨을 쏘아보다가 이미 봉인이 뜯어진 편지를 아이작에게 내밀었다.
게벨이 아이작보다 먼저 편지를 봤다는 것을 팍팍 어필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미 쇠르 방어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해도 좋다고 게벨에게 전권을 위임해 둔 터였다.
편지쯤 먼저 봤다고 게벨에게 화를 낼 생각 따윈 없었다.
오히려 덕분에 빠르게 편지 내용을 가지고 의견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작은 긴 한숨을 내뱉고 먼 거리까지 달려온 전령을 치하한 뒤, 적당한 보상을 챙겨 주고 돌려보냈다. 그는 시체와 피, 불탄 재로 가득 찬 광장을 보았다. 이제 쇠르가 과거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몇 년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올칸 규율도 피를 많이 흘렸지만, 제국도 쇠르라는 대도시를 잃었다. 이로 인해 몇 명이 굶주리고 생활의 터전을 잃을지 가늠도 하기 어려웠다. 아이작이 없었으면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졌겠지만, 결국 양쪽 모두에게 상처뿐인 승리였다.
이 와중에 성도 방위에 나선다?
아이작은 리옹 후작의 편지를 되새겨 보았다.
‘빠른 보고에 감사하다. 우리도 올칸 규율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 중이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지원 병력을 보내려고 했는데, 교황으로부터 여명군 지속 명령이 내려와 전략을 수정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올칸 규율의 침공이 엄중한 것으로 보고 성도를 방어하기 위해 움직였다. 제국의 후방이 굳건해졌다 확신이 들었을 때 지원 병력을 바로 보내겠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리옹 후작의 편지지만 사실 황제의 의지를 대변한다고 봐야겠지. 황제는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명석한 사람이지. 올칸 규율의 침공이 대약탈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여명군 때문에 나라가 들썩들썩하니 나라도 빈틈을 노리겠군.”
“맞아요. 그런데 이 와중에 리히트하임을 보호하겠다고 제국군을 보내는 건…… 황제답지 않군요.”
문자 사이에 숨은 맥락을 읽어야 했다.
황제는 교단에 결코 공손한 성격이 아니다. 제국이 공격받는 와중에 교황을 보호하기 위해 제국군을 후방으로 돌려?
말도 안 된다.
“황제가 현명하다면 쇠르로 제국군을 파견하려고 했겠죠. 그런데…… 아마 교단과 이야기가 갈렸던 모양이군요.”
아이작은 대충 무슨 대화가 오갔을지 상상해 보았다.
‘교단: 올칸 규율이 뭐? 성지만 점령하면 천년 왕국이 도래하는데? 천년 왕국이 도래하면 그깟 속세의 제국 따위 얼마나 털리든 영원한 보상과 천국의 문이 열린다고. 그때가 되면 야만인 놈들을 불구덩이에 처넣고 심판하겠지!’
‘황제: 천년 왕국이 뭔데, 이 씹덕 새끼들아! 제국이 털리면 후방 보급도 끊어지고 물자 보급도 안 이루어지는 건데 성지 점령은 될 거 같냐? 병사들 사기는 멀쩡할 거 같고? 제국이 텅텅 비면 울텐하임도 리히트하임도 싹 갈려 나가는 건데?’
황제가 강변해 봤자 교단은 엥 어쩔여명군 저쩔성지 하면서 땡깡을 부렸을 것이다.
아이작 본인이 빛의 법전에 유감이 있어서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다. 정말 교단이 하는 행동이 이것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게이머 감각으로는 교단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교황이라면 지금 교단처럼 플레이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승리 조건은 성지 점령과 천년 왕국 도래 선포다. 제국이 털리든 말든 아이작이 알 바 아니다. 어쨌든 승리 조건을 만족하는 신앙이 모든 것을 독차지하기도 하고.
그런 관점에선 속세에 연연하는 황제가 한심해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도 아이작도, 심지어 교황도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게이머처럼 굴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럴 수 있는 존재들이 있다면…….
아이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뱉었다.
‘천사들이 지침을 내렸겠지. 올칸 규율은 무시하라고.’
“교단의 지침에 황제는 분노했겠지. 자기 제국을 지키지도 못하고 병력과 물자를 빼가는 교단이 곱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게벨의 말에 아이작도 동감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런 교단의 방침에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성도를 방위한다’라는 결정을 내렸다. 아이작은 리히트하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떠올랐다.
차기 추기경 선거.
Subject Here – 지금 성도에서는 아이작이 죽인 카밀의 공석을 채울 추기경을 뽑는 선거가 벌어지고 있으리라.
***
아이작과 게벨은 장소를 옮겨 한적한 성벽 위로 갔다. 물론 쇠르의 성벽 대부분은 돌무더기 비슷한 것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언덕을 걷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하지만 듣는 귀가 있을 것이란 걱정은 들지 않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방어가 아니겠군요.”
“그래. 공격이다.”
추기경 선거를 위해 각지에서 주교가 소집된 상황이다. 황제는 이 ‘엄중한 자리’를 올칸 규율의 대약탈이라는 위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제국군을 리히트하임에 친정했다.
즉, ‘올바른’ 추기경을 뽑으라는 황제의 무력시위였다.
보호한다는 말을 선택한 이유는 편지가 혹시라도 다른 손에 새어 나갈까 봐 고른 용어였다.
성도 방위는 일종의 종교적 쿠데타 시도인 셈이다.
제국이 풍전등화나 다름없는 상황이니, 황제는 ‘거국적 결단’에 대해 더 강한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교황은 교황이다. 그 권위와 신벌을 생각하면, 제국군의 충성심이 아무리 강해도 감히 교황청에 칼을 겨눌 것 같지는 않은데.”
충성심과 신앙심은 별개다.
가끔은 그 둘이 혼용되기도 하지만, 충성심이 삶의 목표라면 신앙심은 삶의 뿌리, 기반, 철학이다. 자신의 근본을 감히 부정할 용기가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 비범한 사람이다.
“섣불리 공격하는 대신 무력시위로 대신하겠죠. 그 안에서 사제들이 ‘대신’ 교황에게 반기를 들어주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교단도 무능하지는 않아. 그냥 당해주지는 않겠지.”
게벨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느 집단이나 그러하듯 교단에도 착하고 나쁘고 유능하고 무능한 놈들이 있다. 교황 역시 그냥 사람이 좋아서 뽑힌 것이 아니다. 그가 만약 천사라도 불러내 황제를 파문하면 즉시 모든 사람들이 황제로부터 돌아설 것이다.
황제도 그걸 걱정해서 함부로 대들지 못했다.
문제는 ‘과연 천사가 교황 편을 들어줄까?’라는 점이다.
이건 아이작도 확신하기 힘들었다.
황제는 성체다.
신의 기적이 인간에게 임했다는 증거물이다.
그에 비하면 교황은 사제들이 쑥덕거려 대표로 내세운 일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천사들은 그 대표에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지만, 공정한 재판을 요청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만약 모종의 이유로 천사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 상태거나, 어떤 새로운 약속을 받은 상태라면…….’
황제의 성체가 정말 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지금 이 행동도 어떤 계시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럼 천사를 불러내는 것은 교황이 자기 무덤을 파는 짓이 된다. 이미 황제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천사들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지상 권력만으로 해결을 봐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건 성기사단과 제국군이 싸운다는 뜻이다.
지금 여명군이 코앞이고, 밖에서는 올칸 규율이 쳐들어오고 있는 상황에서.
둘 중 하나가 물러서지 않는 한 다 같이 파멸하고 말 것이다. 만약 끝까지 간다면…….
이성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은 황제다.
“리히트하임으로 가야겠습니다.”
아이작이 선언하듯 말하자 게벨은 놀란 얼굴을 했다.
“지금 리히트하임으로? 거긴 곧 전쟁터가 될지도 모른다. 보통 전쟁터도 아니야. 자칫 잘못하면 천사와 기적이 난무하는 전장이 될 거다.”
“어차피 리히트하임으로 가야 할 용건이 있었습니다. 게벨 씨는 로튼해머 단장과 함께 쇠르 주민들과 병사들을 수습해서 이사크레아 영지로 돌아가 주세요. 올칸 규율과는 협상을 끝냈으니, 당분간 쳐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아이작은 쇠르를 둘러보았다. 쇠르를 방어하던 병력들은 오크들을 전부 죽이려고 하기보다 쫓아내는 데 주력했다. 애초에 적들의 훈련 수준도 숫자도 너무 많아서 너무 몰아붙였다간 반격당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조직을 갖춰 공격해 오면 내줄 수밖에 없다. 만생자와 약속한 것도 있고.
“가서 황제든 교황이든 설득해서 지원군을 꾸려 보겠습니다. 그러려고 시간을 번 거니까요. 방어한다면 쇠르보다는 산세가 험한 이사크레아가 더 나을 겁니다.”
그러면서 아이작은 엉뚱한 생각을 한 가지 더 했다.
‘만약에라도 리히트하임이 전쟁터가 되어 버린다면…… 몰래 검열청을 털기도 쉬워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