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67)
Subject Here – 267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같이 (2)
아이작이 꿍꿍이를 품고 리히트하임행을 결정한 시점.
상황은 아이작의 생각보다 훨씬 극단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발트제메르 황제를 파문에 처한다.”
천상의 대리자, 등불 눈을 가진 남자, 여명의 성자, 빛의 법전 교황 호르마 크무엘이 근엄하게 선언한 순간 리히트하임의 교황청, 일명 ‘성좌’라고 부르는 대회의실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본래 성좌에는 무수한 주교들과 추기경, 교황이 앉을 수 있도록 마련된 커다란 삼각 테이블이 있었지만 지금 앉아 있는 것은 교황과 두 추기경, 그리고 기록을 담당한 서기관 총 넷뿐이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호르마는 회의를 기록하는 서기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서기가 펜을 놀려 그 사실이 기록에 남기 전에, 후안 추기경이 다급히 말했다.
“존경하는 교황 성하, 죄송하지만 천년 왕국의 대업을 위해 발트제메르 황제가 꼭 필요한 인재라는 점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럼 그 황제가 자기 마음대로 성스러운 추기경 자리를 좌지우지하는 꼴을 지켜보라고?”
호르마는 무거운 눈으로 회의실 공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교단의 가장 중대한 일들을 결정하는 성좌는 한시도 비어 있어선 안 된다. 원래 카밀이 앉아 있어야 했던 자리지만, 괴물이 된 이후에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다음으로 저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은, 바로 황제가 적극 추천하고 추대를 밀어붙이는 카틴 주교였다.
후안도 교황만큼이나 카틴을 좋아하진 않았다.
돈에 회유되지 않는 그 꼬장꼬장한 할망구는 늘 후안을 혐오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 호르마 교황이 하는 헛소리에 비하면 카틴 정도는 껴안아 줄 수도 있었다.
“꼭 황제가 지지하는 카틴 주교가 저 자리에 앉으란 법이 있을까요. 교황 성하? 저희가 추천한 후보도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 자리에 부족함이 없는 사제지요.”
또 다른 추기경, 로헨 오터가 침착하게 말했다. 후안과는 달리 마른 몸에 학자적인 풍모가 넘치는 품위 있는 사제였다. 그러나 호르마는 후안을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나를 바보로 아는 건가, 로헨 추기경? 자네가 추천한 그 후보는 또 다른 파수자 회의 딸랑이라는 것 외에 모든 면에서 카틴 주교에게 떨어져. 카틴 주교의 인품, 학식, 신앙심, 존경, 선행, 대체 어떤 면에서 비교가 된다고 생각하고 그런 자를 추천한 건가?”
교황은 호르헬 방랑사제를 비롯해 파수자 회의 전체를 자신의 양손으로 활용해 왔다. 그만큼 유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들이 교단 안의 작은 교단처럼 행동하는 것은 꺼림칙하게 여겨 왔다.
로헨은 카틴 주교가 그렇게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면 그냥 추기경으로 임명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말일뿐더러, 카틴 주교는 파수자 회의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교황의 어린애 같은 투정에 화를 내는 대신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저 밖에 십만 제국군을 끌고 오고 있는 황제를 파문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겠습니까? 파문당하면 황제는 신앙에 구애되지 않고 병사들을 끌고 올 겁니다.”
“성기사단이 있잖나! 다 죽여 버리면 되지!”
로헨이 호르마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애새끼인가?”
후안이 경악하며 서둘러 말했다.
“마음속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로헨 추기경.”
“제가 실수했습니다, 후안 추기경. 존경하는 교황 성하, 제 무례한 말투에 사과드립니다. 정정하겠습니다. 혹시 애새끼십니까? 일단 여명군 때문에 성기사단 전력 대부분이 흑제국 접경지에 가 있을뿐더러, 지금 제국군과 충돌하면 여명군을 포기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습니다.”
후안은 일그러진 호르마 교황의 표정을 보면서도 조심스럽게 말했다.
“맞습니다, 교황 성하. 감히 천상의 권위 앞에 일개 황제가 대적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만, 찬란한 광명으로 황제를 불태운다 한들 남는 건 잿더미뿐입니다. 다른 귀족들도 같은 꼴이 될까 두려워 배교할지도 모릅니다.”
호르마도 알고 있다.
이건 그저 그의 분노의 표현일 뿐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따박따박 반박하는 추기경들이 짜증 날 뿐이었다.
애초에 로헨과 파수자 회의는 교단 안에서도 엘리트주의를 고수하면서 따로 노는 놈들이고, 후안은 기회주의자에 황제와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만약 힘의 균형이 황제에게 쏠렸다 싶으면 냉큼 돌아서고도 남을 놈이었다.
그때 후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차라리 등대지기께 호소하여 신명재판을 부탁드리는 것은…….”
“그건 안 돼.”
천사의 권위는 절대적인 결정권을 갖는다.
Subject Here – 교단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천사의 권위에 기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리히트 조약 이래 천사들이 교단의 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호르마는 이런 중대한 일에 천사를 개입시킬 수 없었다. 등대지기의 한마디면 모든 것이 뒤집을 여지조차 없이 끝나 버린다. 그는 솔직히 ‘공정한 재판’을 받았을 때 이길 자신이 없었다.
추기경들도 내심 교황의 속내를 눈치챘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로헨은 호르마의 분노를 감지하고 이 정도면 적당히 훈계했다고 느끼고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했다.
“그러면 황제를 파문하여 돌이킬 수 없게 만들지 말고, 아직 우리 손에 있는 자를 이용해서 황제를 훈계합시다.”
“우리 손에 있는 자?”
“황제는 카틴 주교를 추기경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지요? 카틴 주교에게서 후보 자격을 박탈하면 됩니다. 일반 사제직으로 강등하고 여명군 출정을 명령하지요. 그 일흔 살 먹은 노인에게는 힘든 길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영광스러운 여정이 될 것입니다.”
***
“카틴 주교의 주교직을 박탈하고 일반 사제로 강등?”
발트제메르 황제는 교황에게서 온 칙서를 받고 눈을 부릅떴다. 칙서를 가지고 온 성기사 전령은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황제의 뿔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막사의 천막을 뒤흔들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자 주춤주춤 물러섰다.
“거기다 즉시 여명군 출정을 명령했다고? 카틴 주교는 이미 두 번이나 여명군에 참전한 용사다! 주교 중에서조차 그분을 스승으로 부르는 자들도 많고! 이게 교단이 성인을 대우하는 교리인가!”
“여명군 참전은 그 자체로 영광스러운 시련이자 보상…….”
“닥쳐라!”
발트제메르는 주먹을 휘둘러 전령을 후려갈기려 했다. 그러나 옆에서 다급하게 붙드는 디트리히의 손에 가까스로 멈췄다. 성기사는 땀을 흠뻑 흘리면서도 꼿꼿하게 서서 황제의 대답을 듣기 위해 기다렸다.
디트리히는 성기사를 향해 눈짓했다.
“칙서는 받았으니 돌아가게.”
“황제 폐하의 대답을 교황 성하께 전달해 드려야…….”
“귀담아들었다고 전하게.”
대답으로 치기엔 불충분했지만, 한 번만 더 말대답하면 교황에게 전언을 전할 입도 사라질 것 같았기에 성기사는 조용히 물러났다.
황제가 보여준 태도만으로도 충분히 보고할 것은 많이 있었다.
발트제메르는 성기사를 후려치려던 주먹을 테이블에 내려쳤다. 산산조각 난 테이블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잘 참으셨습니다. 황제 폐하.”
“…….”
당연하지만 디트리히는 발트제메르의 완력을 막을 힘이 없다. 그가 발트제메르를 막는 힘은 강아지 목덜미를 쥐는 것보다도 약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주먹을 멈춘 것은 발트제메르의 자제심이었다.
“카틴 주교께서는 어디 계시지?”
“아직 막사 거처에 계십니다. 별도의 전령이 찾아갔더군요.”
그녀에게는 황제가 받은 것과는 다른 ‘특별한’ 조언도 함께 갔을 것이다.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하지만 처음부터 카틴 주교만이 아니라 황제에게도 전령이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경고의 메시지였다.
통상적인 교단 인사 절차라면 황제에게 보고할 필요가 없다.
교황은 황제를 제지하기 위해 카틴이 평생 이뤄 낸 업적을 바닥에 처박은 것이다.
“하.”
황제는 거칠게 막사 문을 걷어차며 밖으로 나갔다.
밝은 태양빛 아래 빛나는 백색의 도시, 성도 리히트하임이 보였다.
제국군은 그 앞에 도열하여 ‘방위’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아직도 오크 무리가 침입하여 성도를 방어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주변에 높은 산이 없는 넓은 평야 지대에 불쑥 솟은 리히트하임은 중심부로 갈수록 높아지는 피라미드 꼴을 하고 있었다. 등대지기 루앗딘이 성지를 떠나 처음 대륙에 도착했을 때, 고대신과 야만인들로 가득한 이 땅에 전도와 가르침을 퍼뜨리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 도시였다. 이후 그의 가르침을 찾아 무수한 사람들이 찾아왔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루앗딘이 죽어 명천사가 된 후에도 시체는 계속해서 리히트하임 중심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 리히트하임 최상단의 탑 위에서 피어오르는 꺼지지 않는 불꽃, ‘성화’였다.
시대를 거듭하며 저 탑은 빛의 법전 교단의 권위를 상징하듯 높아지고 또 높아지기를 반복했다. 그리하여 지금은 쳐다보기도 힘들 만큼 높은 탑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장 밝고 뜨거운 것은 저 굴뚝 끝자락뿐, 그 밑은 어두침침하기 그지없는 꼴이 정확히 ‘등하맹인’이라는 멸칭과 맞아떨어졌다.
그의 곁으로 리옹 후작이 다가왔다.
Subject Here – “어떻게 생각하나. 디트리히, 델리아?”
“예상했던 바 아닙니까?”
델리아 리옹은 팔짱 낀 채 말했다. 교황이 순순히 물러나진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오히려 이건 예상했던 수 중 가장 방어적인 수였다.
“날 파문하지 않다니 의외로군.”
“그러면 신명재판이 청구될 수 있으니…… 교황도 겁먹었다는 뜻이지요.”
셋은 공범의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교황은 함부로 천사를 부르지 못한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천사가 그들 편을 들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황제가 성체라는 것은 그만큼이나 그들의 확신을 흐트러뜨렸다. 파수자 회의조차도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게 분명했다.
황제는 리히트하임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때가 됐다.”
***
리히트 조약 이래 하늘과 땅은 구분되었다. 하지만 충분히 구분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욕심 많고 무능한 사제들은 신의 권위를 참칭해 간섭하려 들었고, 자신들만의 비밀 교리로 제국을 흔들었다. 이 땅의 무수한 나라와 왕정이 한 줌의 권력을 두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동안, 빛의 법전 교단은 저곳에 앉아 그들을 그저 내려다보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빛의 법전의 뜻을 받들기에 사제들은 너무 무능하다. 천사들이 저들의 무능을 자애로 감싸주는 사이, 교단은 썩어들어갔다. 지금은 그 썩은 부위를 도려내야 할 때다.”
계획보다 갑작스러운 일이 되었지만, 말을 내뱉고 나자 황제는 후련한 표정이 되었다.
전쟁 중에 교황을 갈아치우는 것보다 전쟁 전에 갈아치우는 편이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다. 성배기사의 활약과 카밀 주교의 갑작스러운 죽음 덕분에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기회였다.
교단은 그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장악력이 뛰어나지 않다.
빛의 법전을 신앙하지만, 부패한 교단 상층부에 충성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성기사나 사제들도 많다. 그 와중에 교단 안에서도 존경받는 카틴 주교를 사제로 강등한 것은 성좌의 큰 자충수였다. 분명 불만이 터져 나올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그를 따르는 측근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황제는 그들을 천천히 돌아보며 선언했다.
“지금부터 카틴 주교를 성좌까지 ‘호위’한다. 공정하고 안전하게 선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국군은 온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제국군의 ‘공식’ 강령이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측근들에게만 알려질 선언이었다.
“추기경 선거 직후 부패한 자, 호르마 크무엘의 폐위를 결정한다. 그는 우리의 교황이 아니며, 빛의 법전의 영광을 빛내 줄 대리자도 아니다. 일반인 호르마 크무엘을 성좌에서 끌어내리고 교단에서 신속히 새로운 교황을 뽑을 수 있도록 절차를 진행한다.”
경악스러운 말을 들었음에도 발트제메르 황제의 선언에 대한 반응은 성좌에서 일어난 일과 정반대였다.
황제를 둘러싼 측근들 모두가 쿵쿵 가슴을 두드렸다.
북부 연합의장 디트리히 브란트 공작, 귀족원 대표 델리아 리옹 후작, 펠트런 제국 기사단장, 에셀허트 근위 기사 단장…… 전원 굳은 눈빛을 공유하며 발트제메르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간절하게 기다려 왔던 어떤 순간에 대한 열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발트제메르는 뿔의 불꽃을 불태우며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등불 아래 숨겨진 맹인들을 빛으로 끌어낼 시간이다.”
황제는 자신의 창을 꺼내 들고 움직일 채비를 했다. 측근들도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제는 문득 이 상황에 도달할 수 있게끔 도와준 한 사람을 떠올리며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가 없었다면 엘릴 왕국과 세상의 화로를 끌어들일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후안 주교가 추기경이 되지도, 카밀 추기경이 급사하지도 않았을 테고, 교단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비밀들을 발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황제는 그를 통해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경지의 한계를 아득하게 높일 수 있었다.
감히 도전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경지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천상은 신에게, 지상은 인간에게.
‘그런데 나는 동쪽에서 고생하고 있을 성배기사에게 병력 하나도 보내 주지 못하고 있군.’
제국 동부는 이미 유린당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이작 만은 그저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지금 아이작을 도우러 가면 계속 발목을 잡힐 것이다.
황제는 작은 것에 눈감는 수밖에 없었다.
교황까지 손에 넣어야만 제국은 비로소 일치된 하나의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오로지 자신만이 통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