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71)
Subject Here – 271화. 금지된 지식 (1)
호르마는 무심코 ‘황제’라고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못 들은 척했으나, 로헨 추기경만은 아니었다.
“이단자 발트제메르입니다. 교황 성하.”
등대지기의 출현 이후 의연한 이들은 로헨을 비롯한 파수자 회의 쪽 사제들뿐이었다. 평상시에도 천사를 만나고 대화를 나누었던 이들이, 이번 사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교단도 제국도 농락하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제국을 천상에 헌납하는 것으로.
등대지기가 몇백 년 만에 나타나서 한 일이라곤 황제의 뿔을 꺾고 주교 한 명을 불태운 것뿐이다. 천사가 이뤄낼 수 있는 무시무시한 업적에 비하면 소박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단순한 행동만으로도 제국의 진정한 힘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 주었다.
교황은 섬뜩함을 느꼈다.
입장만 다르다 뿐이지 천상의 권위 앞에 교황이나 황제나 다를 것이 없었다. 단지 화려한 옷을 차려입었느냐, 넝마주이에 오물투성이가 되어 버렸느냐의 차이뿐이다.
그것은 천상의 변덕으로 간단하게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이었다.
“교황 성하.”
그때 무릎 꿇고 있던 발트제메르가 교황 앞에서 입을 열었다.
“제 교만에 대한 죄를 인정합니다. 제 몸은 불사르시되, 제 죄 없는 병사들은 부디 해치지 말고 귀한 곳에 쓰소서.”
“어, 어딜 감히 교황 성하께서 허락하시기 전에 입을 여느냐?”
발트제메르를 끌고 온 기사가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끼는지 말을 더듬으며 그의 목을 찍어 눌렀다. 발트제메르의 얼굴이 그대로 지면에 처박혔으나, 그는 저항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교황의 처분을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교황 역시 발트제메르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등대지기가 한 것은 파문뿐이지, 황제를 죽이지는 않았다. 사실상 일부러 살려둔 것 아닌가? 그런데 자신이 감히 손을 대도 되나? 아니, 애초에 이 남자를 죽이는 게 옳긴 한 건가?
만약 발트제메르를 꺾은 것이 자신의 기적이었다면, 자신이 부린 성기사들이었다면 당장 불태워 버리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교황이 황제에게 느끼는 감정은 어이없게도 ‘동질감’이었다.
허공을 떠돌던 그의 시선이 마침내 멈췄다.
교황은 어떤 판단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는 무엇이 정답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로, 선택하는 것을 미뤘다.
“……이단자 발트제메르를 지하 감옥에 가둬라.”
“예? 하지만…….”
“그가 다른 신앙이나 교리에 오염되어 있을 수도 있다. 이 배교 행위의 이면에 다른 사악한 존재의 개입이 있을지도 모르니 차차 심문하여 확인하도록 하겠다.”
즉시 발트제메르를 태워죽이지 않겠다는 말에 사람들은 당황한 듯했다. 그들은 한시라도 황제를 불태워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교황은 더 설명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이제 교황의 말에 의문을 품거나 대항하는 자는 파수자 회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교황은 그저 순종하는 사람들이 울타리 안의 양 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왕관 쓴 한 마리 양일 뿐이었다.
***
해가 저물고 어두워지자, 리히트하임은 죽음과도 같은 적막에 휩싸였다.
누구도 천사의 영광이나 환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등대지기의 등장은 사제들에게 영광스러운 경험이었으나, 그들은 불꽃의 따뜻함보다 열기를 먼저 느꼈다.
고통스럽고 두려운 열기.
그 열기는 단숨에 제국의 최강자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Subject Here – 밤이 오고서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면서 겪어 본 적 없는 새로운 시대가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황제가 없는, 교단이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하는 새로운 시대를 의미했다.
리히트 조약이 파기되었으므로 황제의 땅, 황제의 무력, 황제의 재산들은 이제 모두 교단의 소유였다.
그런 적막과 어둠 속에서, 한 병사가 조용히 막사를 빠져나왔다.
그는 소리 없이 평원 한가운데 널브러진 시체를 찾아갔다. 디트리히의 시체였다.
등대지기의 등장에 놀라 짐승들도 달아난 것인지, 시체는 훼손된 흔적 없이 깨끗했다.
병사가 디트리히의 시신에 손을 대려 한 순간, 갑작스럽게 말 사체 밑에서 불쑥 검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병사 또한 빠르게 반응하여 검을 손날로 밀쳐 냈다.
검기에 휩싸인 손을 본 습격자는 의심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바슐?”
“아이작.”
병사복을 입은 남자는 황제 근위 기사단 수석 기사 바슐라프 노턴이었다. 그 역시 난리가 벌어졌던 제국군 진영에서 구른 것인지 입고 있는 병사복에 핏자국이 가득했다.
아이작은 상대가 바슐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칼을 치우지 않고 노려보았다.
“여긴 뭐 하러 왔습니까?”
“보면 모르나, 시신 수습하러 왔지…… 브란트 공작과는 나도 인연이 많아. 이렇게 썩게 방치할 사람은 아닐세.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랬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몸을 숨기기 전까지는.
아이작은 잠시 바슐을 노려보다가 검을 거뒀다.
둘은 잠시 말없이 디트리히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에 집중했다. 망토를 수의 대신해서 몸을 싸매고, 표식이 될 만한 나무 밑에 가매장해 두었다. 시신이 있던 자리는 짐승이 끌고 간 것처럼 적당히 파헤쳐 놓은 뒤, 말의 피를 더 흩뿌렸다.
한밤중에 소리를 죽인 채로 하기에는 쉬운 작업이 아니다. 하지만 아이작과 바슐은 별말 없이 그 일을 해냈다.
잠시 후 흙투성이가 된 두 사람은 아이작이 낮 동안 몸을 숨기고 있던 숲에서 침묵에 빠졌다.
‘디트리히…….’
아이작은 한 번도 디트리히를 아버지나 장인어른 같은 살가운 표현으로 불러본 적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둘은 어디까지나 이익이 맞아서 손잡은 사이일 뿐이다. 아이작에게 개인적인 연이 있다면 이솔데지, 디트리히는 아니다.
하지만 디트리히의 죽음은 아이작에게 묘할 정도로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 한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종류는 달랐지만, 그는 딸을, 아이작은 이솔데를 사랑했다. 아이작이 느낀 충격도 거기서 나온 동질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한, 이솔데 역시 분명 이 소식에 슬퍼할 것이었기 때문에.
아이작은 죽은 장인을 위해 추모했다.
하지만 제 신앙으로부터 버림받은 그를 위해 기도문은 외우지 않았다.
***
짧지 않은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 바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동쪽에 난리가 났다며.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아이작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지원군을 안 보내 주길래 궁둥짝이라도 걷어차서 받아내려고 했지요.”
“덕분에 험한 꼴을 봤군.”
아이작은 등대지기가 나타난 순간을 떠올렸다.
온몸이 그을리는 열기 속에서도, 눈을 뜰 수 없는 광명 속에서도 아이작은 휘청대며 앞으로 나아갔다. 자발적으로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황제에 대한 파문 선언을 들었다. 뒤이어 등대지기가 사라진 뒤, 끔찍한 소란이 제국군 진영에서 벌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브란트 공작이 죽는 모습을 봤습니다.”
“……봤다고? 누가 죽였지?”
아이작은 디트리히가 발트제메르를 끌고 진영을 탈출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얼마 가지 못하고 화살을 맞고, 뒤이어 창에 꿰여 말에서 떨어지는 모습까지. 달려온 기사는 디트리히의 등에서 능숙하게 창을 뽑아냈다.
아이작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제국 기사단장 펠트런.”
Subject Here – “펠트런, 펠트런…… 그 개자식, 쎄하다고 계속 생각했지. 남의 뒤나 캐고 다니는 놈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그가 제 목숨을 살리기도 했습니다.”
“살렸다니?”
“브란트 공작이 창을 맞는 순간 뛰쳐나가려 했습니다. 아마 그때 기세가 드러났겠지요. 그러자 그는 제게 눈짓을 보내며 나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싸울 생각이었다면 칼을 뽑거나 병사들에게 알렸겠지요. 분명 의도가 담긴 손짓이었습니다.”
바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펠트런이 아이작을 살리려고 보낸 눈짓이 맞는 것 같았다.
광기와 공포에 휩싸인 제국군에게는 성배기사고 뭐고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서 전투가 벌어졌으면 아이작은 십만 제국군과 더불어, 리히트하임의 성기사단 전체를 상대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의도를 알 수가 없군.”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마 다른 신앙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더군요. 당신처럼.”
바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보았다.
“내가 배신자처럼 보이나?”
“배신자는 아니더라도 엉겁결에 휘말려 든 것일 수도 있지요. 당신은 등하맹인들에게 보복하고 싶어서 엘릴 신앙으로 배교하고, 황제에게 충성했습니다. 이번 내전은 큰 기회였겠지요. 하지만 상황은 이렇게나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죠.”
“…….”
“하지만 엘릴이 둘씩이나 기사를 파견하진 않았겠지요. 제 생각에는 아마 단순히 제국의 정황을 염탐하려고 심어놓은 붉은 성배의 첩자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붉은 성배라, 그럴 수 있지.”
붉은 성배의 첩자는 어디에나 있다.
꼭 배교까지 하지 않더라도 돈과 유혹, 장생에 대한 욕심만으로도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다. 아마 빛의 법전 교단 안에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붉은 성배를 위해 일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상태로.
“하지만 제국 기사단장까지 꼬드겼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닌데. 제국 기사단은 맡은 임무를 굉장히 잘해 왔어. 굴마르 공작가의 여식이 잠입했다는 소식조차 가장 먼저 알아냈을 정도로…… 아아, 젠장.”
“예. 그러니까 더더욱 그렇겠지요. 붉은 성배의 인맥을 활용하면 제국 기사단장으로서 역할도 잘할 수 있었을 테니까.”
가장 뼈아픈 배교는 가장 신실한 신자가 한다고 했던가.
가장 많은 정보를 빼돌리고 활용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스파이다. 제국 기사단장이 이중 첩자일 수도 있다는 것은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놀랍지도 않았다.
“황제 폐하는 끌려간 것 같았는데, 다른 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에셀허트 단장은 전사했다. 다 늙은 몸이니 전장에서 죽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하긴 했는데 설마 같은 편의 손에 죽을 줄은 몰랐겠지. 같은 근위 기사들도 몇 명은 나처럼 도망친 것 같더군. 아, 델리아 리옹 후작도 끌려갔다. 운이 좋다면 몸값만 받고 수도원으로 보내 버리겠지.”
제국을 호령하던 최고 권력자들의 비참한 모습이었다.
아이작은 늘 권력층을 고깝게 여기긴 했으나, 어쨌든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자들이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뱉고 바슐을 향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리히트하임으로 가야지.”
“가서?”
“황제 폐하를 구출할 생각이다. 못할 것 같으면 할 수 있다면 교황을 죽이고.”
“죽을 생각이십니까?”
“미쳤나? 살아야 두고두고 오래 복수를 할 수 있다. 교황 한 놈 모가지로는 수지가 안 맞아. 이번 일을 보건대, 교황도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죽여야 할 놈들은 그 뒤에 더 있어.”
파수자 회의를 두고 보면 예리한 시각이었다. 아이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같이 가죠.”
“뭐? 미쳤냐? 죽으려고?”
“방금 죽으러 가는 거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죽으러 간다고 하면 여기 묶어 두고 저 혼자 가려고 했습니다. 저도 어차피 리히트하임에 들러야 할 용무가 있고요.”
아이작은 애초에 리히트하임 검열청 비밀서고에서 금지된 지식을 빼돌리러 온 것이다. 그 와중에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으나, 황제는 몰락했어도 올칸 규율은 건재했다.
그들을 달래려면 이름 없는 혼돈의 이름이 여전히 필요했다.
“제 일을 진행하면서 겸사겸사 황제 폐하나 리옹 후작도 구출해 보죠. 혼자보다는 둘이 낫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