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72)
Subject Here – 272화. 금지된 지식 (2)
“나오셔도 됩니다.”
아이작은 낮은 구멍에서 먼저 빠져나와 속삭였다. 뒤이어 조용히 바슐이 빠져나왔다.
두 사람 모두 진흙투성이였다.
역사가 깊은 도시가 대개 그러하듯, 리히트하임 역시 지하 구조물이 켜켜이 쌓인 형태였다. 다만 리히트하임의 사제들은 지하를 유용하게 쓰는 법에 관심이 많았고, 그곳에 세상에 존재할 필요 없는 것들, 죄인이나 금지된 지식, 사악한 성물 따위를 가두고 도시로 눌러 두는 형태를 취했다.
때문에 리히트하임은 다른 도시와 달리 지하에 대한 계획적인 재개발을 수차례 진행했다.
당연히 황제가 갇혀있는 감옥과 검열청의 비밀서고 역시 지하에 건설되었다. 다만 이런 재개발을 반복하다 보면 설계상 누락되거나 버려지는 부분이 나온다. 이런 공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설계자들도 알지 못하는 비밀통로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아이작은 이런 비밀통로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바슐은 폐소 공포증에 걸릴 것 같은 수로에서 빠져나와 통로다운 곳으로 나오자 기가 질리고 말았다.
정말 리히트하임의 지하 복도였다.
“리히트하임 지하에 이런 비밀통로가 있는 줄 몰랐군…….”
그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리히트하임의 높은 성벽을 어떻게 통과하느냐였다. 강력한 신성력으로 보호받는 성벽은 쉽게 훼손하기도, 기적을 써서 넘어가기도 어려웠다. 만약 그렇게 하면 넘어가더라도 반드시 들킬 것이다.
그러나 아이작은 비밀통로로 간단하게 우회했다.
“만약 이 정보가 불사 교단이나 붉은 성배에게 흘러 들어갔으면 끔찍한 재난이었을 텐데…… 아니, 그보다 너는 이걸 어떻게 아는 거냐? 뭐 하는 놈이야?”
“그걸 당신이 아는 게 중요할까요, 아니면 황제를 구출하는 게 중요할까요?”
“황제가 좀 더 중요하지. 가자.”
바슐은 황제에 큰 충성심을 가지고 있진 않다. 하지만 황제는 복수를 이뤄 내는 데 중요한 수단이었고, 이대로 천사들의 농간에 당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말씀드렸다시피 검열청 비밀서고부터 먼저 갈 겁니다.”
“흠, 그래. 그거. 너는 비밀 서고에 용건이 있다고 했고, 성벽도 통과하는 데 도움을 줬으니 내가 뭐라 하진 않겠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냐? 황제를 구출하는 것보다 더?”
“저는 황제 100명보다 제 영지의 사람들이 더 중요해요.”
아이작은 어이없다는 듯 바슐을 바라보았다.
물론 황제와도 개인적인 인연이 있긴 하지만 그게 막 엄청 살갑고 반갑고 그런 인연은 아니다. 그리고 이번 사태에는 솔직히 황제의 과욕이 심했으니, 어느 정도는 본인의 책임도 있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이사크레아 영지의 주민들은 아이작이 없으면 안 된다.
아이작이 그들을 더 신경 쓰는 것이 당연했다.
바슐은 뭔가 더 말해 보려는 듯했지만, 아이작은 성큼성큼 지하 복도를 거침없이 나아갔다. 복잡한 지하 복도의 구조를 아는 것은 아이작이었기에, 바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쫓아갔다.
그때, 갑자기 아이작은 묘한 어지럼증을 느끼고 휘청거렸다.
“뭐야, 왜 그래?”
“음, 아뇨. 모르겠네요. 성도에 들어온 탓인가?”
아이작은 갑작스레 시야가 둘로 겹쳐 보이는 듯한 어지럼증에 의아해했지만 금방 괜찮아졌다. 혹시나 해서 신체 상태를 살폈지만 이상은 없었다.
저벅, 아이작과 바슐은 발소리를 듣고 숨을 죽였다. 얼굴을 전부 가리는 흰 두건을 쓴 사제 두 명이 수레를 끌고 맞은편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끌고 가는 수레에는 각종 섬뜩한 도구들이 실려 있었다.
바슐이 속삭였다.
“이단심문청 고문사제들이군. 어디로 가는 거지?”
“오늘 지하 감옥에 ‘손님’들이 잔뜩 들어왔을 테니 물어볼 것도 많겠지요.”
정식명칭은 ‘고해사제’다.
이단심문관들이 밖에서 돌아다니며 교단의 해결사 노릇을 한다면, 고해사제들은 잡혀 온 죄수들의 자백을 듣거나 회개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아무래도 비자발적인 자백과 회개를 많이 받다 보니 고문사제라고 불리는 일이 더 많았다.
아이작과 바슐은 눈빛을 교환하고 소리 없이 둘을 향해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 두 사제를 소리 없이 처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원래 리히트하임의 지하라는 것이 드러나기 싫은 것을 숨겨두기 위한 장소라 들킬 염려도 없었다.
Subject Here – 둘은 고해사제들의 시체를 들어왔던 통로에 다시 집어넣고, 진흙투성이 옷을 갈아입었다.
머리까지 덮는 두건은 얼굴을 숨기기에 적당했다.
“나야 이미 배교했다지만, 너는 정말 사제를 죽이는 데 거침이 없군.”
“제가 사제 목을 치는 게 처음 같습니까? 이런 놈들은 죽여도 양심의 가책이 안 느껴져요.”
아이작은 이미 시라크사에서도 사제의 목을 날려 버린 바 있었다.
물론 그때는 교단이 자신을 비호해 줄 것이라는 자신이 있어서 저지른 일이었지만, 지금 리히트하임 지하에 몰래 잠입해 고해사제 목을 날려 버리는 걸 알고도 그럴지는 알 수 없었다.
***
바슐과 아이작은 문제가 생기면 서로를 구하려고 목숨을 거는 대신 남은 한 사람이 자기 목적을 더 중시하기로 했다.
물론 둘 다 자기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약속이기도 했다.
바슐은 리히트하임에 막 들어왔을 때만 해도 아이작과 헤어져 각자 용무 보자고 할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지하 복도를 한 시간째 걷고 있는 지금, 그는 생각을 바꿨다.
바슐은 아이작이 없으면 안 된다.
아이작이 없으면 바슐은 황제를 찾기는커녕 영원히 이 미궁 같은 복도를 헤매다가 굶어 죽거나 지쳐 죽을 것이다.
“……아이작, 길을 알고 가는 거냐?”
아이작은 그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힐긋 돌아보았다.
“리히트하임 지하는 전부 연결되어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검열청에서 지하 감옥까지 가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빙빙 돌아가는 건데?”
아이작은 길을 걷다가 갈림길에서 잠시 멈췄다. 그는 정면의 복도를 잠시 응시하다가 바닥의 돌조각 하나를 주워 휙 던졌다. 순간 복도에서 뭔가 웅얼대는 소리가 나더니 돌에 불이 붙으면서 바닥에 닿기도 전에 재가 되어 버렸다.
“맹인 파수꾼의 함정입니다. 이곳 설계는 명천사가 했어요.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들도 ‘진짜 길’을 암기한 사람뿐이죠. 아니면 기적을 취소시킬 만한 권능을 품고 있거나.”
아이작은 바로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이제 바슐은 별말 없이 아이작을 따라갔다. 대체 아이작이 이런 것들을 어떻게 아는 건지, 그가 무엇을 찾아 비밀서고에 접근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그만큼 의지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함정뿐만이라면 그냥 돌파해 보겠는데, 신수를 불러내거나 경보를 울리는 함정도 있어요. 소란이 있으면 감옥 경비가 더 엄중해질 테니…….”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며 바슐을 힐긋 돌아보았다.
“만약 들키게 되면 제가 비밀서고를 터는 사이에 그쪽은 황제를 구출하세요.”
“뭐라고?”
“황제를 구출해서, 세력을 규합하고, 이사크레아 영지를 보호해 주세요. 제가 여기서 바로 죽지는 않아도 당장은 빠져나가기 힘들 수도 있으니.”
“그런 약한 말을…….”
“댁이 죽어도 저는 황제를 구출하도록 하죠. 겸사겸사 등하맹인 목을 칠 기회도 찾아보고. 괜찮죠?”
바슐은 아이작 말에 코웃음 쳤다. 결국 들어오기 전에 했던 합의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았다.
서로의 목숨을 구하려고 목숨을 거는 대신, 남은 한쪽이 다른 한쪽의 목적을 대신 이루어 주기로.
“내가 죽을 일은 없으니 손해 보는 거 같은데.”
“되게 자신감 넘치시네. 아, 도착했네요.”
모퉁이를 돌아간 순간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석문에 바슐은 흠칫하며 놀랐다. 그는 분명 같은 모퉁이를 반복해서 몇 번이나 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완전히 다른 구조가 펼쳐져 있었다.
당황하는 바슐에게 아이작이 말했다.
“빛의 굴절과 착시를 이용한 장난질이에요. 이해하면 어려운 개념도 아니긴 한데, 두 번 올 것도 아니니까.”
“아까 내 말은 취소하지. 나는 네가 죽으면 여기서 도망도 못 칠 것 같다.”
둘은 시답잖은 말을 나누며 문을 열었다.
아이작이 아는 대로, 석문은 별다른 잠금장치 없이 열렸다. 비밀 서고의 진정한 보안 기능은 문 따위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서늘한 바람과 함께 먼지 냄새가 밀려왔다.
바슐은 침을 삼키며 제국에서도 가장 은밀한 공간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
Subject Here – 엄청나게 거대한 공간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천장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고, 수많은 상자들이 질서 정연하게 몇 층씩 쌓여있었다. 상자로 이루어진 복도들이 시커먼 어둠 속에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본 바슐은, 그런 풍경이 문 옆의 공간까지도 펼쳐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리려던 그는 곧 너무 무게감 없어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헛기침했다.
“이것도 빛의 굴절과 착시를 이용한 장난질인가 보군. 사실 그렇게 크지 않은 거지?”
“그럴 리가요. 맹인 파수꾼이 기적을 이용해서 시간 배열과 공간 순서를 꼬아 놓은 겁니다.”
바슐은 배신당한 표정을 했지만, 눈앞의 광경은 아이작에게도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비밀 서고는 그 이름처럼 단순히 책만 보관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검열청이 가둬 두고자 하는 것은 지식이다. 그리고 지식을 담고 있는 것은 책만이 아니다.
금지된 기적이 담긴 성물, 근원을 알 수 없는 현상, 정체 모를 생물체, 존재해선 안 될 물체…… 질서를 어지럽히는 그 모든 것들이 빛의 법전 검열청의 ‘검열’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중 지울 수 없거나 지우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들은 가장 안전하면서도 은밀한 곳에 숨겨 두었다.
그리하여 채워진 이 방대한 공간은, 천 년 동안 성기사들과 이단심문관들이 목숨과 열정을 바쳐 일궈낸 곳이었다.
아이작은 일단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마자 머리 위에서 갑자기 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바슐은 놀라며 칼을 뽑을 뻔했다.
“그냥 움직임에 반응하는 빛일 뿐이에요. 서고 방문자를 위한 편의 기능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아, 그, 그래?”
바슐은 머쓱한 표정으로 곁에 있는 상자를 쓰다듬으려 하자 아이작이 경고했다.
“그 상자에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사슬과 성서로 감아서 봉인해 둔 거지만 낡아서 훼손되기도 쉬워요. 특히 사슬로 감아 둔 건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사람을 해친다고? 이게?”
“해치기만 하면 다행일 겁니다.”
아이작의 경고에 바슐은 손을 감췄다. 생각해 보니 엄중하기로 소문난 비밀 서고에서 함부로 아무거나 손대는 게 어리석은 짓이었다.
바슐은 한심한 짓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바슐, 어둠 속에 뭐가 있다고 자세히 보려고 하지 마세요. 집중하는 순간 끌려가는 수가 있어요. 집중하고 따라오기나 하세요.”
“바슐, 콧노래 부르지 마세요. ‘그것’들은 노랫소리를 따라 해요. 서고 안이 합창으로 가득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조용하세요.”
“바슐, 그건 벽이 아니라 거대한 상자예요. 이 정도 크기면 어디 집 한 채를 통째로 옮겨 온 모양이군요.”
바슐은 마침내 포기했다.
나름 구를 대로 구른 전사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선 갓난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이 모든 주의점을 전부 파악하고 경고하는 아이작의 담담한 목소리였다.
“미치겠군. 그냥 문 쪽에서 눈 감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네 용건 마치고 돌아오면 안 되겠냐?”
“바슐, 지금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바슐은 아이작에게 또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따지려다가 문득 그 말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자 하나를 품에 안은 아이작이 이상한 시선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바슐은 섬뜩한 기분에 방금까지 자신에게 경고하며 앞장서던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앞에 있던 아이작은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며 어둠 속으로 달려가 버렸다. 놈이 사라진 자리를 따라 바슐이 흥얼거렸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유령인가?”
“뭘 봤는지 알겠네. 유령은 아니지만, 그냥 모르는 게 좋을 겁니다. 저걸 따라 끝까지 갔으면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이 서고 안을 떠돌았을 거예요.”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면서 비밀 서고를 둘러보았다.
“검열청 비밀서고의 가장 강력한 보안 기능은 그 방대함이에요. 터무니없을 정도로 넓고 복잡한 구조는 침입자가 원하는 목표물을 찾을 수 없게 만들죠. 서고를 망치지 않는 선에서 은근히 위험한 봉인 대상들을 풀어 두어, 자체적인 간수 역할을 하게 만들기도 하고요.”
바슐은 지친 표정으로 아이작이 들고 온 상자를 보았다.
“그런 거 치곤 벌써 찾은 거 같은데?”
“이건 제가 찾는 게 아니에요. 그냥 물을 담으면 술로 변하는 수상한 접시가 든 상자지.”
“그럼 어떻게 원하는 걸 찾으려고?”
“이렇게.”
아이작은 상자를 들어 올려 단숨에 내동댕이쳤다. 와장창하는 소리가 비밀 서고 안에 가득 메아리쳤다. 경악하는 바슐의 시선 속에, 머리 위의 등불이 심하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바슐은 자신도 모르게 칼을 뽑아 들었다.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