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76)
276화. 나락에서 다시 (1)
아이작이 언제든 입맛대로 역사 개변을 할 수 있는 간편한 시간 이동 장치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일단 파수자의 등대를 발동하는 것만으로도 신성력과 체력 소모가 막대하다. 그리고 지금 이것은 ‘현재’를 따라잡기까지 일어나는 ‘간이역사’에 불과하다.
만약 아이작이 충분히 개연성 있는 전개를 만들어 내지 못하거나 자신에게 터무니없이 유리한 역사를 만들어 내면 순식간에 ‘없던’ 일로 치부될 것이다.
그러면 즉시 다시 비밀 서고에서 데라 헤만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우르반수스로 역사 개정을 한답시고 황제 파문을 없던 일로 만들거나 교황을 죽이러 간다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
아이작이 보기에 우르반수스 개변은 위험한 양날의 검이다. 소금 의회의 신이 개변을 시도했다가 소금 사막 아래 처박혀 버렸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다른 신앙의 천사들의 개입도 불러오기가 너무 쉽다. 아직 천사 한 명도 상대하기 버거운 아이작이 불필요한 어그로를 끌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우르반수스 개변은 자신과 목적이 맞아떨어지는 천사를 찾아야 한다는 게 문제다.
만약 ‘작가’로 선택된 천사가 배신하거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면? 최악의 상황으로 빠질 수도 있다. 때문에 아이작은 앞으로의 미래도 어느 정도 예감할 수 있었다.
개연성과 시의성 때문에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다.
위기와 고난은 비슷한 비율로 찾아올 것이다.
이번에도 고해 사제 복장을 빼앗아 입은 둘은 손쉽게 지하 감옥에 접근해 들어갔다. 이미 감옥 곳곳에서 황제파 귀족과 기사들에 대한 ‘고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쉽게 도착했군. 믿을 수가 없다. 아이작, 네 덕분이다.”
바슐은 더 깊은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면서 중얼거렸다. 재투성이의 빙의용 몸에 불과한 그는 역사의 개변 과정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따지고 보면 예전 라엘라와 비슷한 존재니 그럴 만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이작은 바슐이 얼마나 복수에 진심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왜 갑자기 불쌍하게 쳐다보는 거냐?”
“……게벨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늙어서 복수밖에 할 게 없는 늙은이들이라는 게 참 그래서요. 가족이라도 있었으면 거기로 돌아갔을 텐데.”
“갑자기 왜 시비냐? 결혼했다고 유세 떠는 거냐? 원래 성기사는 독신이 일반적이거든?”
“그냥 해본 생각이에요. 복수를 말리지는 않을 테지만 다 끝내고 갈 데 없거든 이사크레아 영지로 오세요. 거기 게벨 씨도 있으니까 둘이 잘 대화해서 풀고, 전쟁고아들이나 돌보면서 지내시면 좋겠네.”
“웬 고아냐? 난 애들이랑 안 친해.”
“게벨 씨도 그런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잘하더군요.”
바슐은 아이작의 말을 듣고도 흥 코웃음 쳤다. 하지만 그는 아이작의 말에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았다.
대개 복수에 미친 자들이 그렇다. 복수까지는 생각하지만, 그 이후는 생각하지 않는다.
복수자들이 복수를 끝낸 후 허탈감에 시달려서 ‘복수란 의미 없는 일이군’ 같은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이유다.
복수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친구도 만들고 취미도 만들고 새로운 인연이나 인생의 행복을 미리미리 찾아 둬야 복수한 후에 ‘묵은 빨래 끝냈다’ 혹은 ‘일주일 묵은 똥 쌌다’ 같은 후련함을 느낄 수 있다.
평생을 한 가지 일에 매진했으니 그게 끝났을 때 허탈감을 안 느낄 리가?
아이작은 게벨이나 바슐이나 그렇게 되길 원치 않았다.
둘 다 평생을 복수에 미쳐 재미없게 살았으니, 늙어서라도 인생의 재미를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게벨이 신병들을 괴롭히면서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바슐도 새로운 인생의 낙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작, 너도 비밀 서고에 용무가 있다고 했었는데 황제 구출을 우선시해 줘서 고맙다.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길을 막을 테니 너는 황제를 데리고 도망쳐라. 황제라면 올칸 규율을 막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다.”
“아, 좋지요. 바슐만 믿습니다.”
아이작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사실 아이작은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개변 이전과 비슷하거나 더 위험한 수준의 고난이 닥쳐야 ‘진짜 역사’로 채택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정지. 누구냐?”
발트제메르가 있는 지하 감옥 부근에 도달하자 황금사자 문양을 갑옷에 새긴 성기사 두 명이 막아섰다. 다른 감옥들과 달리 성기사가 경계를 서는 걸 보니 급이 다르긴 다른 모양이다.
아이작은 고해 사제 복장의 소매를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배교자 발트제메르를 심문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발트제메르에게 손끝 하나 대는 것은 물론 누구의 접견도 불허하라 명령하셨다. 들은 바도 명령서를 받은 것도 없으니 물러나라.”
아니나 다를까 꽉 막힌 성기사답게 여지조차 주지 않고 단호하게 대응했다. 심지어 겨누고 있는 창끝에도 흔들림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작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문용 도구들이 실린 수레를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보이지 않으십니까? 교황 성하께서 서명하신 명령서가…….”
성기사들의 시선이 수레 쪽으로 향한 순간 아이작과 바슐은 동시에 앞으로 뛰쳐나가 검을 내리찍었다. 성기사들은 곧바로 창을 들어 올려 대응했지만, 만전을 기하고 습격한 두 사람을 막긴 어려웠다.
아이작은 카훌린의 가속 능력으로 단숨에 성기사의 투구 아래 틈을 찔러서 소리치는 것을 막았다. 바슐은 잿덩이의 형체를 남기더니 다음 순간 이미 먼지의 궤적을 그리며 성기사의 목을 치고 있었다.
놀란 것은 성기사보다 바슐이었다.
그는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의 재투성이 손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곧 아이작과 시선이 마주치고 한층 더 경악했다.
“알고 있었나?!”
“어쩌다 보니 알았습니다.”
아이작은 굳이 ‘지워질 역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재투성이도 이미 정체를 들킨 판국이니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능력을 발휘한 것 같았다. 천사가 아군이라니 든든하기 그지 없지만, 그 힘을 함부로 써댈 생각은 없었다.
발트제메르의 감옥은 당연하게도 봉인으로 막혀 있었다. 하지만 루앗딘 열쇠를 들이대자 손쉽게 봉인이 파괴되며 자물쇠가 떨어져 나갔다. 루앗딘 열쇠를 가진 사람이 몰래 침입할 것이라고 생각 못 한 안일한 교단의 대응이 잘못이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자 어두침침한 감옥의 풍경이 드러났다.
감옥의 환경은 예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지푸라기로 채워 넣긴 했지만 침대도 있고, 품위를 지킬 수 있는 변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 감옥의 주인이 누리던 환경에 비하면 돼지우리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감옥 구석 자리에 한 남자가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세상 전부를 손에 움켜쥐기 직전까지 갔다가 나락으로 추락한 사내였다.
“황제 폐하.”
바슐의 목소리가 들리자 발트제메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발트제메르는 한 기억을 회상 중이었다.
스무살 무렵이었다.
그는 이유 없이 크게 앓았다. 원래 곧잘 다른 형제들이 하인들을 매수해 식사에 독을 섞곤 해서 잔병을 앓았던 그에게는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그는 매번 살아남았지만, 이번 열병은 심각했다.
온몸이 끓어오르는 듯 달아올랐으며, 사제나 의사들이 몇 번을 왕진해도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열로 아득해진 정신 속에서, 발트제메르는 자신이 불에 담금질 당하는 상상을 했다.
세상의 화로는 신으로 재탄생할 재목이 화로 속에 들어갔으며, 언젠가 그 화로를 깨뜨리고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신이 바로 진짜 빛의 법전이라고 했다.
발트제메르는 자신이 재탄생 되기 위해 화로 속에 들어간 빛의 법전이라고 상상했다. 신이 벼려지고 있는 지하의 불은 훨씬 더 뜨겁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깟 독 따위는 통증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불경한 생각이지만 아픈 그에게는 그런 것을 떠올릴 만한 여력이 없었다.
살은 녹아내리고, 뼈는 분해되며, 영은 기화하여 흩어진다. 그리고 다시 살을 두드려 담금질하고, 뼈는 재조립되며, 영은 응고되어 흘러내린다.
몇 번이나 부서지고 재조립되는 환상 속에서, 발트제메르는 자신의 몸이 한 마리 수사슴의 형태로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수사슴은 불꽃으로 된 갈기와 열기가 피어오르는 뿔을 가지고 있었다.
발트제메르는 그 수사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그 수사슴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아직 약하고, 제 발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였다.
발트제메르는 그 완성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때 하인 한 명이 들어왔다. 그가 가장 아끼는 하인, 어렸을 때부터 친구처럼 지내던 하인이었다. 그가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믿고 먹을 수 있는.
하인은 굳은 표정으로 방 곳곳에 기름을 뿌리고 단검을 꺼내 들었다.
아직 벼려지고 있는 수사슴을 향해, 침대에 누워 열병을 앓는 발트제메르를 향해 단검을 겨눴다. 독을 먹어도 죽지 않는 지긋지긋한 암살 상대를 직접 끝내고 불을 지를 생각이었다. 발트제메르는 고함을 지르려 했지만 쉰 목은 아무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칼끝이 목에 닿은 순간, 방 안이 환한 빛으로 가득 찼다.
방 안에 태양이 강림한 것 같은 찬란한 섬광이었다. 그저 찬란한 한 개의 빛기둥이 방 한가운데서 조용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방 안은 열기로 가득 차고, 꽃들은 말라붙으며, 커튼과 바닥의 마른 바닥에 불이 붙었다. 불꽃은 기름을 타고 삽시간에 방 안에 가득 번졌으며, 단검을 든 암살자는 순식간에 재 덩이가 되어 버렸다.
발트제메르는 불꽃에 휩싸인 채 천사를 응시했다. 본능적, 아니, 가장 이름 높은 명천사가 목소리와 함께 은근히 드러낸 의지만으로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등대지기는 발트제메르를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불꽃은 순식간에 저택 곳곳으로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비명과 고함,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발트제메르는 이 대화재가 시작된 지점 한가운데 있었지만, 조금의 뜨거움도 느끼지 못했다. 마치 이 불꽃 속이 그가 있어야 할 가장 안전한 장소처럼.
그날 밤 발트제메르는 기적을 품은 몸, 성체로 거듭났다.
그가 진심으로 황제가 되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
발트제메르는 흐릿한 눈을 들어 바슐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에 빠져 있던 상념과 달리 이 어두컴컴한 공간은 그를 쇠약하고 나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근위 기사인 바슐의 목소리는 헷갈릴 수가 없었다.
바슐은 황급히 발트제메르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움직일 수 있으십니까? 서두르셔야 합니다.”
“바슐…… 진짜 바슐이군. 여기가 어디라고 제정신으로 온 건가? 살아있었으면 도망쳤어야지.”
“아직 폐하께서 갚으셔야 할 빚이 한참 많습니다. 그 빚을 받아내기 전까지는 곱게 죽게 못 두지요.”
발트제메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바슐의 손길을 뿌리치고 주저앉았다.
“나는…… 나는 자네를 속였네. 자네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어.”
“폐하, 왜 그러십니까?”
바슐은 당황해 채근했지만 발트제메르는 끝까지 손길을 거부했다.
“나는 자네가 빛의 법전 교단에 대해 복수하는 것을 돕겠다고 했었지. 나는 그게 교단에 치부를 들춰내고 약점을 잡거나, 그 권위를 일부만이라도 훔쳐 올 생각으로 받아들였어.”
“그건 압니다. 서로 뜻이 맞으니까 받아들인 것뿐이니…….”
“그건 애당초 틀려먹은 목적이었네. 나는 지상은 인간이, 천상은 신이 통치하게 만들겠노라고 말했지만 사실 틀렸어. 나는 내가 지상과 천상, 모두를 대표할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었네.”
바슐이 등하맹인들을 처치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물론 다음으로 권력을 잡은 자들이 쇄신을 거듭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발트제메르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저 인간의 권력에 교단의 권력까지 더한, 최고의 권력자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이 등대지기로부터 선택받은 인간의 의무이자 권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목적에 백성을 위한, 통치를 위한, 미래를 위한 철학과 이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꿈에 불과했다고, 등대지기가 나타난 순간 밝혀졌다.
“나는 내가 등대지기의 선택을 받은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등대지기가 굳이 나타났던 것은 내 교만과 허영을 부추기기 위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
발트제메르는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나는 황제의 권위를 집어던지고 등대지기에 모든 것을 의탁하게 되었네. 천상의 권위까지 등에 업고 싶어서 말이야. 내 스스로 리히트 조약을 파기한 셈이지.”
“폐하.”
“결국 나는 내 신하들을, 내 부하들을, 날 믿는 추종자들을 모두 배반했네. 그저 황제의 권력까지 쥔 등하맹인이 되려 했을 뿐이야.”
발트제메르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얼굴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하늘에 도전한다면 이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끝까지 내 힘으로 해냈어야 했어…… 천사에게 의탁하지 않고 내 힘만으로 도전했어야 했는데!”